잎사귀를 자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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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pious] 쪽지 캡슐

2001-07-16 ㅣ No.2233

4박5일의 청소년사목연수와 연이은 선택 피정으로 꼬박 일주일간 본당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렇게 짧은 가출(?)을 하고 돌아와선 얼마나 제방이 정답게 느껴지는지, 역시 사람은 아쉬움이 있어야 고마움을 느낄 수 있나 봅니다. 어쨌든 잘 다녀왔습니다. 무지무지 피곤하긴 하지만....

 

제방에는 예쁜 분홍꽃이 피는 작은 화분이 있습니다. 꽃다발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꽃을 줄일이 있으면 이렇게 화분을 가져다 주는 까닭이지요. 그런데 제가 키우기만 하면 시름시름 시들다가 곧 죽어버리는 거예요. 초등부 꼬마들은 담배냄새에 질식해서 죽는 것이라고 하지만 왜 그런지 저도 이유를 잘 몰랐지요. 어쨌든 그 꽃도 여지없이 시들거리다 못해 분홍꽃의 색깔이 바래지면서 하얘지는 것었습니다. 또 시작이구나. 나의 무성의가 귀한 생명들을 자꾸 죽이고 있으니 이제는 받는대로 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다 주어버려야겠다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대부분의 화분들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이제 하나 남은 것마저 그렇게 되고 있으니 참... 역시 전 자격없는 주인이었나봅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와서는 가위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가위를 들고는 꽃의 잎사귀들을 마구 마구 자르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시들었다싶은 잎사귀들은 사정없이 잘려나갔습니다. 저는 조금 시들었다고 그렇게 잘라버리는 것이 마음이 아파 왜 그렇게 하냐고, 물잘주고 하면 다시 힘을 낼텐데 너무 하는 것 아니냐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말은 지금 이 꽃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이 시들은 잎들이 가져가고 있으니 꽃이 이 모양이 된거라고 하면서 잎들을 필요이상으로 많이 두면 꽃에게 안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듣다보니 그럴듯해서 아무소리 못하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생각한다면 한 쪽을 위해서 다른 한 쪽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부당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을 두고 보면 그 사람의 삶의 목적, 그리고 집중해야할 어떤 중요한 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위해 자신의 생활에서 필요이상으로 많이 차지하고 있는 여러가지 것들을 자제하고 희생시킬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 자제해야 할 많은 잎사귀들이 있겠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잘라내야 할 시들어가는 잎들도 있구요. 마음 아프기는 하지만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 가위로 싹둑싹둑하고 잘라내어 많은 영양분들이 꽃들에게 가도록 해야하는 아픈 과정이 필요할 테니까요.

 

여러분들도 그런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하루를 생각하면 정말 필요없는 일에 과다한 신경을 쓰고, 잡다한 많은 일들에 관여하다가 정작 중요한 어떤 것들은 대강대강 해서 시들어가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 하겠습니다. 하루 일들 뿐이겠습니까? 우리 인생 전체에서도 꽃을 피울 생각을 않고 여기 저기 무성한 관심들로 잎사귀들만 잔뜩 만들어 내고 있다면 그리고 그나마도 시들어버리고 있는 잎사귀들을 만들고 있다면 우리 인생에서 맺어야할 분홍색 꽃이 하얗게 변해 맥을 못추게 될지도 모르지요.

 

저는 우선 TV보는 시간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첫번째 시들어가는 잎사귀가 바로 그것같습니다. 그런데 벌써 오늘 할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으니, 저의 중독 증세가 아주 심각한가봅니다. 아 처량하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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