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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램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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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현 [antonioh] 쪽지 캡슐

2002-01-31 ㅣ No.2040

램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입니다.

밑에 헨리 나웬 신부님의 묵상을 실었습니다. 약간 길더라도 한 번 읽어보시고 묵상하시면 좋은 시간 되겠네요^^    안또니오...

 

 

 

 

 그림 묵상

 

다음 내용은 ’제네시의 일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헨리 나웬 신부가 이 그림을 보고 묵상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작은아들

 

  아버지에게 돌아온 작은아들은 누더기의 속옷으로 겨우 몸만 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빡빡 깎여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었는지, 수용소에 있었는지, 이 모습은 개성을 박탈당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황갈색의 찢어지고 핏기 어린 속옷은 그의 참담했던 생활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샌들이 벗겨진 왼발은 상처투성이이고, 오른발은 망가진 샌들이 겨우 부분적으로 감싸고 있어 그의 삶이 얼마나 가난에 찌들렸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작은아들의 머리는 엄마의 자궁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모양이고 얼굴은 거의 아직 태아의 모습입니다. 렘브란트는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 안긴 인간의 모습을 엄마의 자궁에 안긴 아기의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어머니이신 하느님의 품에 안긴 인간을 그리는 듯 합니다.

 

 

 

2)큰아들

 

  그는 작은아들의 귀향에 대한 목격자입니다. 이 목격자는 아버지를 아무런 기쁨 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분명 작은아들과 그를 안고 있는 아버지이지만 큰아들은 이 그림 전체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리를 두고 서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훨씬 아버지를 닮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수염을 길렀고 붉은 겉옷을 걸치고 있는데 이러한 외적 유사성이 둘 사이의 공감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얼마나 다릅니까?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향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반면에 큰아들은 꼿꼿하게 서있고 긴 단장은 그의 자세를 더욱 강하게 표현해 주고있습니다.

  아버지의 망토는 넓고 아들을 맞아들이고 있지만 큰아들의 망토는 자신만을 감싸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팔은 펼쳐져 있고 축복의 자세로 돌아오는 아들을 어루만지고 있지만 큰아들은 자신의 두손을 포갠 채 가슴 가까이 대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빛을 받고 있지만 아버지의 얼굴에서 나온 빛은 그 따스함이 작은아들의 몸으로 번져 가고 특히 그의 손은 더 빛을 발하는 것처럼 느껴져 따스함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큰아들의 얼굴빛은 차갑고 얼굴에만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은 어둠 속에 남아있고 그 단장을 감싸쥔 손은 빛을 덜 발하고 있습니다.

 

 

3)아버지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모습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 안에 드러나는 신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염을 기른 반 실명 상태의 노인, 황금빛 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돌아온 자식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절대적인 자애와 조건 없는 사랑, 영원한 용서와 같은 신성의 실재를 보게 됩니다. 여기에 인성과 신성,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과 강인함, 늙음과 영원한 젊음이 함께 표현되어 있습니다. 눈먼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등을 육체적인 시력이 아니라 내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어루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의 핵심은 아버지의 손에 있습니다. 이 손은 모든 빛이 모여 있고 이 그림의 다른 두 목격자들의 시선도 아버지의 손에 쏠려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이 되어오신 의미와 화해와 용서, 치유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반 맹인인 노인이 흐느끼면서 상처받은 아들을 쓰다듬으며 축복하는 모습에서 아들뿐 아니라 이제 아버지도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권위의 남성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이 그림의 손에서도 드러나는데 재미있게도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들의 어깨를 만지는 아버지의 왼손은 매우 강하고 근육질입니다. 손가락들이 펼쳐져 있고 아들의 등과 어깨를 넓게 감싸고 있습니다. 일종의 누르는 힘과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특별히 엄지손가락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른손은 이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손은 누르거나 잡거나 하지 않습니다. 매우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섬세합니다. 손가락들이 모아져 있고 아주 우아합니다. 이 손은 아들의 등위에 부드럽게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도감과 위로를 주는 어머니의 손인 여성의 손인 것입니다.

 

 

 

  헨리 나웬 신부는 자신의 영적 여정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세 관점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우선 신학과 철학 강의, 저작 등으로 살아왔던 그의 생활 속에서 영적인 활력을 잃었던 자기 자신을 진솔한 성찰을 통해, 자신을 작은아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학문적인 추구와 경쟁적인 활동들이 그를 지치게 하였고, 길을 잃고 고향을 잃은 작은아들의 모습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움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작은아들임을 깊이 느꼈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는 자신의 삶의 전 과정을 큰아들의 모습 안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섯 살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이래 그는 한 번도 교회를 떠나 본 적이 없는 큰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전 삶 안에서 상당히 의무에 충실하고 전통적이며 집안 중심의 사람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이 새로운 시각 안에서 그의 분노, 불평과 질투 등을 느꼈으며 은근히 자신을 정의로운 자로 보는 근성들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집에 머물렀던 큰아들이지만 작은아들과도 같은 ’잃은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헨리 나웬 신부는 또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으로 아들을 안고 있는 시선마저 잃어버린 노인, 즉 아버지의 모습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큰아들이든, 작은아들이든 아버지가 되라는 불림을 받았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이 그림에서 그는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성소의 의미를 완전히 표현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노인과 같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두려움이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서서히 아버지 됨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직 돌아온 아들을 반기며 아무것도 묻지 않는 아버지 되기를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헨리 나웬 신부님의 묵상과 같이 작은아들일 수도, 큰 아들일수도, 그리고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을 다시금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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