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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청원자 5 [윤유일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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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나 [sanghoo] 쪽지 캡슐

2003-10-04 ㅣ No.3994

 

 

 

5. 윤유일 바오로

 

(여주 포도청 1795년 6월 28일 36세) 장하치명

 

 

 

윤유일 바오로는 평신도들에 의해 창설된 한국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첫 밀사로

 

북경교회와 변문에 두 차례씩 왕래하며 주문모 신부를 안내하였고,

 

1795년 을묘박해 때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키고 붙잡혀 신부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 고문하는 형리에게, 교회에 해가되는 말은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고

 

잡히던 그 날 장살 형으로 순교하였다.  

 

 

윤유일의 죽음은,..

 

초기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열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이승훈이 동지사(조선시대에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에 정기적으로

 

파견한 사신) 서장관인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들어간다,

 

 

이승훈은 아버지의 허락으로 북당성당에 가서 그라몽 신부를 만나 필담(筆談)

 

으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1784년 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측근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 받은 사람들이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

 

모여 신앙공동체 집회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조선에 교회가 창설되어 북경교구 관할인 조선에 첫 공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을사 추조 적발사건이 일어나 집주인 김범우는 귀양가서 장독으로 죽고

 

명례방 신앙공동체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얼마 후 명례방 사건이 잠잠해지자 이승훈은 북경에서 본 기억을 되살려

 

1786년 교회를 재건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10명의 신자를 신부로

 

임명하고 각 지방에 파견하여 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이때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은 "성교절요"라는 책에서 자기들이 행하고 있던

 

성직 행위가 독성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성사 집행을 중지

 

시키는 한편 권일신의 제자였던 윤유일을 밀사로 북경에 파견하여 평신도의

 

성직 행위 등을 문의한 것이다.

 

 

윤유일은 주교께 보내는 편지를 지니고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1789년 10월에

 

북경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주교를 찾아가 편지와 조선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자세하게 전하니  

 

그의 도착은 북경교회에 큰 기쁨을 주었다.

 

주교가 회신으로 보낸 사목교서에는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의 책망과

 

미신행위 근절, 유교 제사금지 등에 대해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1790 봄에 윤유일 바오로는 북경에서 영세와 성체와 견진 성사를 받고

 

아무 어려움도 당하지 않고 서울에 무사히 돌아왔다.

 

그는 명주 조각에 쓴 8.000자에 달하는 사목교서를 옷 속에 감추고 돌아와서

 

편지를 내 놓았다. 그 내용은 이승훈 베드로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함부로 사제직에 개입한데 대한 책망이 있었다.

 

 

신품성사를 받지 않았으므로 영세를 제외한 모든 성사는 절대로 행할 수

 

없다면서,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미신자를 입교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계속하라고 격려하였다.

 

 

신자들은 이 편지의 내용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가성직 수행을 중단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더욱 사제에게 성사 받을 마음이 간절하였다.

 

 

마침 1790년 9월에 80회 생일을 맞는 건륭 황제를 축하하기 위한 별사

 

일행에 끼어 다시 중국으로 떠난 윤유일은 두 번째 여행에 우(禹) 라는 예비

 

신자를 동반하고 북경에 가서 주교께 편지를 전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학식 있고 열성 있는 선교사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조선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그들에게 신부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 어떤 모양으로 신부가 국경에 나타날 것인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1791년 진산사건으로 신부 영입이 좌절 되었지만,

 

 

마침내 의주에 두 번째 간 윤유일은 1794년 12월 24일(음력12/3) 밤 자정

 

얼음이 언 압록강을 건너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에

 

본당이 설정된 것이다.

 

 

그러나 5개월 만인 6월 27일(음력5/11) 진사 한영익에 의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것이 밀고되었다.

 

이때 위기일발로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 집에서 강완숙의 집 나무 광으로  

 

급히 피신하였다.

 

이 고발에 따라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인도하였다는 죄목으로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1795년 6월 28일(음력5/12) 잡히던 그 날로

 

매를 맞아 장살로 순교하여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달레한국천주교회사상권326, 377, 380)

 

(순교는믿음의 씨앗이되고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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