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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고통과 악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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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3 ㅣ No.124

[신앙의 해 -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고통과 악은 왜?

김혁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첫 고백은 하느님 아버지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고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심을 고백합니다.

지난 호에 이 부분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거르고 지나간 게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고백, 곧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로 시작하지만, ‘사도신경’은 아예 “전능하신 천주성부”로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은 그런 분이 맞나요?

교회는 기도의 시작에 자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이란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라고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나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지 못하는 분께 누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십니다.


무능하신 하느님?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우선 ‘전능’이란 말이 알게 모르게 불쾌감을 유발합니다. 독재나 독단, 전제주의의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자유나 독립, 주체성이 최고의 선이고 가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는 말은 어딘지 구시대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평범한 우리의 일상 체험과는 동떨어져 보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멀리 계신 것 같고, 나는 번번이 하느님께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내가 불행에 빠질 때, 전능하신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 걸까요?

그리고 열심인 신앙인에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왜 거짓으로 속이는 사람들이 더 잘살고, 불의한 사람들이 떵떵거리는 세상인가? 하느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창조주 아버지시라면, 어찌하여 세상에 불행과 악과 고통이 넘쳐나는 것인가?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만 해놓으시고, 하늘에서 관망만 하시는 무능하신 분은 아닐까요?


고통과 악의 문제

무엇보다 고통과 악의 문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관련하여, 아니 하느님 신앙 자체와 관련하여 난제 가운데 난제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하느님께서 선하시고 자비하시다면,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왜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가? 고통과 악은 그런 하느님과는 절대 부합할 수 없습니다.

특히 무죄한 고통 앞에서, 인간은 할 말을 잃습니다. 자기의 탓 없이 갑자기 닥치는 불행과 고통 앞에서, 인간은 절규합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고통을…?”,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불행과 고통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대규모로도 발생합니다. 지진, 쓰나미, 전염병, 원전 사고, 전쟁에 따른 대량 학살 등이 그렇습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이런 고통과 악 앞에서 하느님은 왜 침묵하시는 걸까요? 바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신학적으로는 ‘변신론’ 또는 ‘신정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태와 관련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한번 변호해 보시라는 의미이지요. 물론 답을 찾는 것은 신앙인의 과제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의 숙제입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합니다.

다양한 이유로, 특히 이 고통과 악의 문제 때문에 하느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또 고통과 악의 기원을 악의 원리에서 찾는 ‘이원론’을 우리는 배제해야 합니다. 이런 이원론은, 악과 고통을 전능하신 하느님께 돌릴 수 없으니까 하느님과는 반대되는 또 다른 초월적인 존재나 원리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악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교리서는 ‘절박하고도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고도 신비한 이 질문에 그 어떤 성급한 대답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말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309항).

창조-죄와 은총-구원의 신비와 그 전 역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바대로, 이 신비와 그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따라서 고통과 악의 어두운 수수께끼도 예수님의 운명에서 최종적으로 그 비밀을 밝힐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한편, 우리가 그 신비를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도 분명 그대로 남을 것입니다.


고통과 악의 원인

먼저,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이를 창조의 불완전성에 두는 견해가 있습니다.

피조세계 전체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이 해방의 날을 고대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로마 8,22 참조). 그 과정에서 발전과 진화의 대가나 부산물처럼 고통과 악이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처음부터 세상을 완전하게 창조하실 수는 없으셨던 걸까요?

한계를 지녔으며, 그래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세상과 인간 존재는 있는 그대로 본래 선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자유가 있어야만, 인간은 참된 사랑의 존재, 책임성 있는 주체가 되고,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고통과 악은 이 자유의 행사가 가져오는 결과라는 것이 고전적 설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통과 악은 결코 하느님이 그 원인일 수 없고, 피조물이 지닌 자유의 선택에 그 원인과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악과 고통의 원인들을 단순히 환경, 유전적 결함, 구조적 모순 등에 돌릴 수는 없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유가 나쁜 선택을 함으로써 가져오는 ‘윤리적 악’ 곧 ‘죄’가 ‘물리적 악’들을 증대시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환경 파괴나 인간성 파괴와 같은 물리적 악들이 오늘날 인간의 탐욕 때문에 날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셋째, 고통과 악은 인간의 성숙을 위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이 또 하나의 고전적 설명입니다. 그야말로 ‘허락’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탓 없이 또는 우리 자유의 오용 때문에 빚어지는 나쁜 모든 것에서도 결국 더 좋은 것을 이끌어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312항 참조).

물론 우리는, 뜻밖에 닥치는 고통 앞에서 속절없이 흔들리는 하느님 신앙이, 그 모든 걸 잘 이겨내고 난 다음에는 한층 더 깊어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은 너무 무심하신 것은 아닐까요? 너무 힘든 책임을 우리에게만 다 맡겨놓으시고 당신은 그저 잠잠하신 것은 아닐까요?


대답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전능하심, 고통과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제 그 최종적인 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인류의 이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전능하심, 고통과 악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이신 분이 침묵 가운데,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악을 남김없이 겪으십니다.

세상의 모든 악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보다 더 큰 악은 없습니다. 세상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느님을 거부한 결과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최종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오는 하느님과의 단절은 생명의 단절,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죽음보다 더 깊은 고독, 더 아득한 어둠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 죽음, 이 고독과 어둠을 몸소 겪으십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이보다 더한 하느님의 무능은 없습니다. 힘없이 당하시는 하느님의 무능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또한 남김없이 계시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천만 배는 더 어렵습니다. 무능해 보이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악을 선으로 갚으시는 하느님, 그보다 힘센 하느님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전능과 무능의 이분법을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이 신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피조물의 모든 고통과 악을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다 들여다볼 수 없는 내면 깊이에서 말없이, 아니 말도 못하고 아파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히브 4,15).

내 삶에 유일무이하신 하느님을 믿고, 그러면서도 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은 채 인내하며 사는 것, 이때 신앙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김혁태 베드로 - 전주교구 신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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