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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과 개신교 신자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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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뚜스 [senatus] 쪽지 캡슐

2005-04-15 ㅣ No.38

학습목표 (개신교 신자와의 대화)

1.가톨릭을 충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2.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 이해와 존경의 자세를 보인다.

준 비 물

<송희와 신부님과의 대화>

시작기도

'스스로 내맡기는 기도'를 읽고 영광송을 한다.

-샤를 드 푸코의 '스스로를 내맡기는 기도'-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제 영혼을 바치옵니다.
하느님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도    입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그 하느님을 예배하는 종교, 교파가 수없이 많고 그 많은 교파들이 서로 자기 교회만이 참 종교이고 하느님이 원하는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이러한 난립상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같은 성경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서로를 비방하고 오해한다면 하느님께 무척이나 죄송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한 분의 하느님, 한 분의 구세주를 모시고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고 비방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특히, 많은 개신교파에서 그리고 개신교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이며 개신교의 모태인 천주교, 가톨릭에 대해 너무나 이해가 없이 비방하는 일들은 가톨릭 신자인 우리들이 가톨릭에 대해 지식이 부족한 헛점을 이용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는 하나 뿐이고 세상 어디를 가도 일치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와 달리 뚜렷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교회인 가톨릭 교회를 알리기 위해 가톨릭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나    눔

주제: 개신교 친구들이나 개신교인이 여러분에게 가톨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나요? 있다면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교사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칠판에 정리해 봅니다.)

심    화

여러분은 개신교 친구들의 말을 듣고 가톨릭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 주었나요?

여기 송희라는 개신교 친구가 있습니다. 송희는 직접 신부님께 가톨릭에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개신교에 다니는 송희의 질문에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답해주셨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송희와 신부님과의 대화>

송희: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김송희라고 하는 00고등학교 학생이고 저의 종교는 개신교입니다.

신부님: 예!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사제관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송희: 왜요? 저희는 사제관에 신부님을 찾아올 수 없나요?

신부님: 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스스로 찾아주시니 너무 기뻐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 어쩐 일이십니까?

송희: 목사님! 아니 참 신부님! 미안합니다. 처음부터 실례를 하게 되었어요.

신부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학생 하나가 며칠 전에 학교 선생님 앞에서 "선생님" 해야 할 것을 "신부님!" 했었대요. 그랬더니 선생님 말씀이 "네 입에는 그냥 신부님만 익어있구나."하더랍니다.

송희: 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신부님? 저는요, 어릴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서 기독교에서 세례까지 받았어요.

신부님: 혹시 성당에서 세례 받은 것이 아닙니까?

송희: 아니 기독교에서 세례를 받았다니까요.  

신부님: 그 기독교란 무슨 뜻인데요?

송희: 아니 신부님도 참 웃기시네요. 기독교도 모르세요? 우리 개신교 말이에요.

신부님: 처음부터 죄송합니다. '기독교'란 말은 '그리스도교'란 말의 한자표기어입니다. 한자로 그리스도를 기독(基督)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기독교라고 하면 불교나 유교와 구별되는 종교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교를 뜻합니다. 예컨대 가톨릭교,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등 모든 그리스도교인을 한자 표기로 해서 기독교 신자라고 하지요.

송희: 아! 참 그래요? 그런데 밖에서는 그렇게 정확한 뜻으로 말하지 않아요. 그러면 가톨릭이란 무슨 뜻인데요?

신부님: 아니, 오늘 송희양이 저를 방문한 의도가 무엇인데 처음부터 화제가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송희: 실은 오래 전부터 신부님을 한 번 찾아뵙고 여러 가지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을 직접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천주교의 여러 가지 모순점을 밝혀서 신부님과 교리 토론을 벌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신부님: 예! 좋습니다. 그럼 먼저 가톨릭이란 말의 뜻을 말씀드리지요. 우리 천주교의 세계적인 공통 용어가 곧 '가톨릭'입니다. 그 원어는 라틴어 'Catholicus'라는 형용사인데 그 뜻은 '보편된', '공번된'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세계적이고 만인의 종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라틴어 어원에서 나온 말을 영어로는 'Catholic'이라고 하고 불어로는 'Catholique' 그리고 독일어로는 'Katholik'이라고 합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용어 문제를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천주교를 '가톨릭' 그리고 '구교', '성교회(聖敎會)' 또는 공교회(公敎會)라고 하고 가톨릭과 대조하여 개신교의 세계 공통 용어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하지요. 이 말은 1529년 독일 스파이어(Speyer) 회의에서 당시 일부 소위 개혁자들이 가톨릭 교회에 '프로테스트(항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개신교를 구교와 대조해서 신교라고도 합니다.

송희: 오늘 신부님을 통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극히 상식적인 것인데 이것을 이제야 알게 되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신부님: 사람은 언제나 배워야 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송희양이 가톨릭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송희: 예! 죄송해요, 신부님! 오래 전부터 마음으로 생각했던 것이므로 오늘 솔직하게 털어놓겠어요! 천주교에서는 예수님보다 마리아를 더 공경하지요? 성당마다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고, 더구나 성서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일종의 우상숭배겠지요?

신부님: 예! 송희양, 대단히 감사합니다.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많은 화젯거리를 주셔서 말입니다. 송희양!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어디지요?

송희:  이스라엘 나라 베들레헴이지요.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입니까?

신부님: 죄송합니다, 송희양!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을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희;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차차 생활의 기반이 잡히면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할 계획입니다.

신부님: 예?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을 왜 성지(聖地)라고 합니까?

송희: 그거야 예수님이 그곳에서 태어나셨고 그곳에서 설교하셨고 드디어 거기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곳이기에 성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신부님: 옳습니다. 저는 1970년에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에 소르본 가톨릭 학생 성지 순례단에 끼어 영광스럽게 성지 순례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송희양, 예수님의 발자국이 지나간 그곳을 성지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를 당연히 성모(聖母)님이라고 해야겠지요?

송희: 그건 그래요!

신부님:  그렇다면 예수님의 발자국을 더듬어 보기 위해 수 만리 먼 나라에서 성지를 찾아 드는 그 정신이 옳다면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찾아뵙고 존경과 경의를 표시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송희: 글쎄요?

신부님:  저의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저의 어머니는 우리 신도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으시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도들이 "저 부인이 신부님의 어머니래!" 하면서 신부님을 존경하는 신도들은 당연히 그의 어머니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송희양, 송희양의 교회에 계시는 목사님의 어머님을 다른 평범한 사람의 어머니와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까?

송희: 그러니까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한다는 것이지요?

신부님: 그렇습니다. 성서를 펴 봅시다. 마태오 복음 1장18절부터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더불어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탄생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인류 구원을 위해 역사에 등장하시는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마리아라는 처녀를 특별히 간택하였습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루가 1, 28-32) 성서에서 어느 누가 마리아처럼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하는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송희: 예! 그건 그런데 말씀이지요, 여기 루가복음 8장19절에서부터 보세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사람들이 많아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성서 구절은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신부님: 개신교에서는 이 성서 구절을 내세우면서 언제나 성모님은 그리스도로부터 외면당한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올바로 알아듣는다면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정한 뜻은 아닙니다. 육적인 어머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서로 형제들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비록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고 했다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하면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을 수락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육적으로 예수를 낳은 어머니시며 영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기에 또 다른 의미에서도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든지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님이시라는 것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리아를 어머니로 생각하지 알았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마리아는 그 십자가 밑에서 아들의 고통을 슬퍼했을 것이며 더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 26-27) 이 말씀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본 어머니 마리아를 버리고 얻은 새 어머니란 말씀입니까? 그렇지는 않지요. 즉시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아들로서의 슬픔이 너무나 컸기에 당신 사랑하는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는 인간 극치의 사랑이 아닙니까?

우리는 성서를 너무 편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서에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는 여러 군데 나오지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면 그를 낳은 어머니를 그렇게 냉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송희: 예, 그건 다소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데 이건 좀...

신부님: 예! 우리가 성모님에게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께 하는 기도와 다릅니다.

송희: 그럼 기도도 종류가 여러 개 있나요?

신부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송희양! 구노의 '아베마리아'아시지요?

송희: 예, 제가 좋아하는 클래식 중 하나입니다.

신부님: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베마리아, 그라씨아 플레나 ." 이 뜻은 바로 성서에서 제시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기뻐하소서‥‥‥" 하는 뜻이지요 그 아베마리아는 '성모송'이라는 가톨릭의 기도문입니다. 소개해 보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의 내용을 생각해 볼 때 기도문의 전반부는 모두 성서에 나타난 찬사를 딴 것이고 후반부는 "마리아님, 저희가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해 빌어주소서."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유의할 것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 내용입니다. 하느님께는 직접 "주님, 저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지만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와 제일 가까운 분입니다. 송희양도 개신교에서 어느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떤 기도를 부탁한 적이 있으시지요?

송희: 예, 있습니다.

신부님: 같은 내용입니다. 목사님의 기도가 보통 평신도의 기도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듯이 예수님을 낳아서 기르신 마리아의 기도는 어느 누구의 기도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송희: 그러면 마리아의 기도가 더 큰 효과가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신부님: 예, 그건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2장을 펴 보십시오.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요한 2, 1-11)

이 성서 구절을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알아듣는지 궁금합니다.

첫째로 잔칫집에서 술이 떨어지면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성모 마리아가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자기의 아들은 하느님의 능력의 소유자임을 알았기에 마리아는 아들에게 그 난처한 잔칫집 주인의 입장을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하십니다.

셋째는 예수님은 스스로가 자기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란, 즉 기적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네 번째,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니었지마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었기에 감히 거절을 못하고 그곳에서 당신의 때를 변경시켜 첫 기적을 행하신 사실로 분석이 됩니다.

송희: 그러니까 마리아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인가요?

신부님: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께 직접 용돈을 타내기가 퍽 곤란할 때 어머니를 통해서 용돈을 타냅니다. 우리가 직접 하느님께 기도할 수도 있지마는 죄인인 우리가 또 감히 용기를 못 낼 때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기도합니다. 인간 마리아는 우리 인간의 조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에 대한 기도는 '대도(代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회에 송희양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술을 마시면 죄가 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송희: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술을 마시게 되면 과음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많은 탈선을 할 수 있으니까 못 마시게 하는 거지요!

신부님: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께서는 잔칫집에 가서 술이 떨어진 것을 보시고 술을 만드신 기적을 행했습니까?

송희: ???

신부님: 예수님은 최후 만찬 때도 제자들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루가 22, 17; 마태 26, 27) ?

그리고 술 자체보다 과음을 생각해서 마시지 못하게 한다면 밥도 과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밥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이론이 아니겠습니까? 송희양, 마리아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시고 마리아에 대한 성서 내용을 진지하게 읽어 주시고 어떤 편견이라도 있으면 씻을 수 있는 진실한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송희: 예! 옛날에는 퍽 오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 어떤 분은 동정성을 부정하고 또 어떤 분은 예수를 낳을 당시에는 처녀였지마는 성서에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이 있으니 예수를 낳은 다음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는 분도 있는데 가톨릭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신부님: 좋은 질문입니다. 먼저 마리아의 처녀성은 성서에서 명백히 밝혀집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통보를 했을 때에 마리아는 깜짝 놀라면서 하신 말씀이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천사는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루가 1, 34- 35)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처녀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다음에도 정혼한 일이 없으며 성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형제들은 친형제가 아니고 사촌 형제들 또는 친척 관계의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의 친형제가 있었더라면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송희양!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씻으십시오. 인류 구원사를 살펴본다면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하여 주님의 사랑을 잃었을 때 하느님은 즉각 구세주를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구세주의 출현과 함께 구세주의 어미니 마리아에 대한 예고도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송희: 그런 사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신부님: 있지요. 보십시오. 창세기에 뱀의 유혹으로 원조가 죄를 범한 다음 성서에서는 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으려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 15)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마리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 14) 여기서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아닙니까? "임마누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지 않습니까? 처녀가 예수를 낳는다는 사실에는 벌써 하느님의 영원한 구세사 속에서 마리아를 간택하여 구세주를 낳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초대 교회 때부터 마리아를 모든 사람 중에서 간택된 성모님이시고 가장 복된 자라고 믿어 오고 있습니다. 성서에 보십시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가 1, 42∼43)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기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마리아 자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종의 미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루가 1, 48∼19) 결론적으로 말해서 마리아는 하느님이 특별히 간택하신 분이고 영원히 인류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복된 분으로 뽑으신 분입니다.

송희: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상이나 예수상을 걸어 놓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데 이것은 우상 숭배가 아닌가요?

신부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모상이나 예수상 그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뜻하는 보이지 않는 그분, 즉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보고서 실제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송희양! 국민 의례를 할 때에 국기를 바라보며 경례를 하지요?

송희: 예, 합니다.

신부님:  그건 우상이 아닌가요? 그 헝겊 조각 앞에 경의를 표시하니 말입니다.

송희: 그건 다르지요. 국기는 국가를 표시하니까 국기 앞에서 국가에 대한 존경과 애국을 표시하는 거지요.

신부님: 성모상이나 예수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 국기 앞에서 경례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은 무엇을 표현할 때에 말이나 글, 행동이나 모양으로써 표시합니다. 예컨대 "예수님" 했을 때 그 "예수님"이란 그 발음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 말이 뜻하는 그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고귀한 인격을 표시할 때에 '김아무', '박아무'라고 하지요. '김송희'라고 했을 때 그 발음 자체가 송희양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발음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필립 2, 10)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그분을 상징하는 예수상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송희양, 부모님이 살아 계십니까?

송희: 3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신부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버님 생각이 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송희: 제 방에 모시고 있는 아버님의 사진을 보고 슬퍼합니다.

신부님: 바로 그것입니다. 사진은 한 장의 두꺼운 종이입니다. 그러나 그 종이 위에 그려진 그분이 아버님이기에 그 종이를 특별히 액자에 넣어서 존경하지 않습니까? 퍽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송희양 아버지의 사진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송희: 어 아 ! 그건 안 되지요.그것은 바로 우리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부님: 그런데 휴지 조각에다 침을 뱉는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송희: 그거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신부님: 송희양! '아버지의 사진'이란 그 종이와 '휴지'라는 종이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요?

송희: 물론이지요.

신부님: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성인 성녀들의 모상이 그려 있는 성화나 성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요?

신부님: 너무 그렇게 좁게 편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극히 인간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같은 이론이지요. 예수님이나 성모님이나 기타 다른 성인들의 사진이나 동상을 만들어 그분들께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송희: ???

신부님: 서울 세종로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 돌맹이질을 한다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남산 위에 있는 바위에 돌멩이질을 하면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송희: 그런데 성서 말씀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신부님: 예, 송희양이 말하고자 하는 성서 구절을 먼저 봅시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출애 20, 3-5) 이 성서 내용은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물건을 또는 잡신을 하느님처럼 만들어 공경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서를 똑바로 봅시다. "속죄판은 마치로 두드려 늘여서 거룹(천사의 이름 저자 주)둘이 양쪽에 자리 잡게 만드는데 거룹 하나는 이쪽에 또한 거룹은 맞은쪽에 자리 잡게 만들어라."(출애 25, 18-19)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민수 21, 6)

자! 송양! 보십시오. 천사 거룹도 만들라고 하셨고 구리뱀도 만들라는 성서 말씀을 어떻게 봅니까? 우리는 성서를 접할 때 자기 구미에 맞도록 그리고 너무나 편견적으로 좁게 해석을 하면 하느님의 구원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겸손하게 구원의 진리를 고백해야 합니다.

송희: ???

신부님: 저는 가톨릭의 성상과 성화를 일종의 인류 문화재라고도 하고 싶습니다. 유럽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의 교리를 모르고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가 아닙니까? 오늘 이왕 이런 말이 나왔으니 가톨릭의 성상과 성화의 의미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성상과 성화는 성전(聖殿)을 거룩하게 장식합니다. 구약 시대 솔로몬도 "한 거룹의 한쪽 날개가 한 벽에 닿았고 다른 거룹의 한쪽 날개가 다른 벽에 닿아 있었으며 각각 나머지 날개는 전의 중앙에서 서로 잇대어 있었다. 솔로몬은 거룹에 금을 입혔다. 그는 전의 온 벽을 돌아가며 거룹과 종려나무와 핀 꽃 모양의 돌을 새김으로 새겨 놓았다. 또 성전 안팎의 바닥을 금으로 입혔다."(1열왕 6, 27-29) 구약의 성전을 장식하기 위해 이렇게 정성을 기울였다면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신약의 성전을 예수님의 상이나 성화 기타 사도들의 성상이나 성화로 장식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로 성상과 성화는 신앙 교육에 있어서 시청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고통을 말로써 여러 번 되풀이하는 것보다 실상 그 고통의 십자가상을 한번 보여 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성당에 들어가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보고서 그리고 성당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의 길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서 진정 예수님의 고통을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개신교의 카브코(KAVCO-한국 기독교 시청각)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성서에 묘사된 그림을 통해서 선교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정부에서 국민들의 계몽을 위해 적절한 포스터를 그려 붙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 성상이나 성화를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을 어찌 우상 숭배로 배척하는지 저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성화나 성상이 없는 교회당은 어쩐지 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 가톨릭 신자 가정에는 예외 없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무언의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실내와 장식을 보고서 그 집주인의 성품과 교양의 도를 알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의 그림을 걸어 놓는다든지 밀레의 만종을 걸어 놓는다든지, 가톨릭 신자들은 방 안에 십자가상을 모시고 성화를 모시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외적 신앙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나 초상화 안에서 누구나 경건한 자세로 경의를 표합니다. 그분의 업적을 기리는 방법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의 많은 성인 성녀들의 성상이나 성화를 통해 그들의 생활에 자극을 받게 되고 그들의 성덕 생활을 본받게 되는 생활의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그렇게 외곬으로만 생각한다면 개신교 신자들은 어떤 조각도 그림도 그릴 수 없겠네요! 조각이나 그림을 부인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 문화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개신교 신자들은 조각가도 화가도 될 수 없단 말입니까? 예술도 없단 말입니까? 교회마다 지붕에 십자형은 왜 달아 놓았습니까?

정    리

송희와 대화한 신부님처럼 가톨릭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가톨릭에 대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간의 비판과 대립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지 않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가톨릭 교회에 대해 충분히 알고 다른 종교인에게 설명하여 가톨릭을 이해시키고, 이미 갈라진 교단의 신자들을 같은 형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참고자료:
1. 가톨릭 교회 교리서
2. 가톨릭 기도서
3. 성 바오로 선교네트
4. http://myhome.netsgo.com/domini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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