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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이분은 누구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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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4 ㅣ No.126

[저는 믿나이다] 이분은 누구신가?

김혁태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그렇게 믿고 따르는 걸까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는 예수님의 질문은 당시 사도들에게나 오늘날 우리들에게나 여전히 절체절명의 물음입니다.

교회의 신경에서 예수님에 관한 고백은 신경의 중심에 놓여있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만큼 핵심적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신경의 중추라고나 할까요.

이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해설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고백을 다섯 번에 걸쳐 다룹니다. 모두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먼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 다음에 이어서 곧바로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첫 부분은 예수님의 이름과 칭호, 두 번째 부분은 그분의 신성에 관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칭호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도 가차 없이 던지시는 예수님의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이분은 도대체 누구신가?”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 곧 교회의 공통적인 대답은, “그분은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다.”입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모두 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 대답들은 예수님의 지존하신 면모, 곧 신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때문에 ‘지존칭호’라고도 부릅니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대표적이지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 밖에도, 복음서들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달리 부르거나, 다른 명칭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다윗의 자손’, ‘라삐’, ‘예언자’, ‘유다인의 임금’ 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가졌던 어설프거나 막연한 관념도 결국은 “그분이 과연 그리스도,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 맞는가?” 하는 것으로 모아집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적대자들마저도 같은 의문을 품었고, 그것이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최종 척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오?”(루카 22,70)

신약성경과 이후 교회는 여러 칭호와 명칭들 가운데서 예수님께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만을 신앙고백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면모에 그래도 가장 가까이 들어맞는 칭호들이지요. 이 칭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가장 적합하고 올바른 대답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분은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이 칭호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436-455항 참조).


나자렛 예수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칭호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예수님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가상의 인물이나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역사 안에 실제로 사셨던 ‘나자렛 예수’, 그분에게만 이 칭호들을 드리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리 신앙의 근거,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토대가 놓여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대답은, “그분은, 아니 그분만이 주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나자렛의 예수님만이 그런 분이라는 신앙과 고백 위에 그리스도교회가 흔들림 없이 서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이 칭호들이 정말 무슨 말인지는 예수님만이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그분의 전 생애만이, 이 칭호들의 참된 뜻을 밝혀주고, 어째서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신지, 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지 알려줍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유다 민족이나 고대 세계가 알고 있던 ‘메시아’ 상이나 ‘주권자’ 상, ‘신의 아들’ 관념 등과 구별됩니다. 그분은 무죄하신 분으로서 죄인의 처지에까지 한없이 자신을 낮추시는(2코린 5,21 참조)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시는(마태 20,28 참조)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필리 2,7 참조) 우리의 형제가 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성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로 고백함으로써, 나자렛 출신의 한 인간이 하느님과 같은 존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과 행동에서 발산되는 강력한 영향력은 그분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적대자들마저 압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12).

하지만 유다인들에게는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기 때문에, 나자렛 출신의 한 인간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도 유다인이었기 때문에,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가운데 요한 복음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명시적으로 고백합니다(요한 1,1; 20,28 참조).

그렇다고 다른 복음서들과 신약성경의 교회가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나 훌륭한 라삐 정도로 여겼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고백한다고 해서 하느님 신앙이 흔들린다는 표시는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라는 신앙과 나자렛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는 믿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신약성경은 과제로 남겨놓았습니다.


니케아공의회의 해결책

이후 30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신앙인들 사이에서 최대의 화두는, ‘유일신 신앙과 예수님의 신성을 어떻게 하나로 해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이 예수님을 두고 다양한 견해와 설명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지 결국 인간은 아니시라든지, 반대로 인간이시지 하느님은 아니시라든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은 하느님, 반은 인간이라는 생각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를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아리우스와 그의 동조자들이었습니다.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모상”(콜로 1,15)이라는 말씀이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을 들어, 예수님이 하느님보다 못한 존재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비슷하거나 모방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원천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의 모상’이신 유일한 ‘아들’이십니다. 또 예수님의 절대적인 순종은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리우스는 또한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는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의 의도는 옳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중간 단계를 설정해서 예수님을 결국 그 자리에 놓았습니다. 곧 예수님을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피조물, 일종의 제2급 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325년에 열린 니케아공의회는 아리우스의 시도에 맞서, 예수님의 신성을 확립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공의회는 먼저 네 번에 걸쳐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하고자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결국 예수님을 피조물 편에 세우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여전히, 이 ‘나심’의 방식은 신비로 머뭅니다(리옹의 이레네오).

그러나 무엇보다 니케아공의회가 채택한 가장 중요한 용어는 ‘한 본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한 본체, 곧 하나의 실체를 이루시면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본체, 실체 또는 본질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사실 그리스 철학용어였습니다. 니케아공의회는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에 아무런 존재론적 차이가 없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신성을 설명하려고 이 ‘한 본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일종의 토착화지요. 성경의 계시진리가 그리스 문화와 만난 것입니다.


신앙인의 과제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니케아공의회의 이 해결책은 ‘헬레니즘화’라는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철학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원천을 왜곡시켰다는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낯설고 알아듣기 힘든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단순히 폐기해야 하는 걸까요?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으로 몸소 들어오셔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진리를 잘 알아듣고 다른 이들에게도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은 신앙인의 엄중한 과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까지 하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그런 것이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김혁태 베드로 - 전주교구 신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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