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성지 순례를 다녀와서...

인쇄

최향숙 [joanchoi] 쪽지 캡슐

2000-10-06 ㅣ No.1794

떠나기가 힘들 정도로 망자들이 저를 붙들었어요. 제대로 준비하고 마음도 정비하여 순례다운 순례를 하고 싶었는데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내가 너무 과욕을 부렸나?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지요. 그래도 날짜가 되어 우리 일행은 신부님을 앞서 모시며 카이로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설레이던 마음은 금새 어디로 가고 제발 가던 인원 그대로 김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는 기도가 먼저 나오지 뭐예요? 기나긴 비행때문에 뒷자리에서 주리를 틀면서도 시차에 적응하느라 안자려고 애를 쓰는 모습은 그래도 예쁘게 보였답니다. 그렇게 도착한 카이로에는 매섭고, 자존심 세고, 기운이 펄펄 나는 라파엘이라는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친 우리가 피로의 기색을 보일 여지가 없도록 몰아 붙이며 이집트의 역사 안에서, 성서 안에서 그 해박하고 매끄러운 말솜씨로 또 발레로 다져진 상큼한 걸음 걸이로 마구 마구 우리를 기죽이더라구요. 그러나 그 찬란한 문명의 발상지에서 차라리 인간의 위대함을 느꼈다면 너무 비약한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대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림으로 숱하게 보아왔던 그 피라밋과 스핑크스는 과연 압도적이었구요. 그보다 많은 그림이나 글씨들이 이미 4800년 전의 것임에도 여전히 우리의 눈에 현재 보이고 있어요. 섬세한 그림과 글씨들은 역사를 건너 뛰며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고 있었지요. 현세보다 내세에 보다 비중을 두는 삶은 차라리 지금 우리가 시선을 둘 곳이 아닌가 하는 상념까지 곁들여 한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마련 해 두신 여정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 하여 저의 전공(?)과 맞물려 죽음과 미이라와 관과 무덤까지 많은 공부를 하게 하셨습니다. 짜릿하도록 폐부 깊숙히 이집트를 담고 예수님이 계시던 예루살렘으로 갔지요. 그곳은 예수님이 살아 숨쉬던 공기와 걸어 다니던 길과 고난을 목격한 나무와 풀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의 성묘 성당도 역시 예수님을 입관(?) 하던 곳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통곡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주님이 가까이 계시던 곳임을 실감할 수 있었답니다. 그 발자취를 따라 밟으며 우리의 순례는 점점 더 깊어져 감히 성묘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는 은혜로운 감격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본 우리는 로마에서 교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중세의 거대한 교회와 프란치코 성인의 작은 모습을 보며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되었습니다. 다시 닭장 같은 6인용 야간 침대 열차를 타고 루르드로 이동하며 나의 순례는 내게 어떻게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을까 번민하며 밤새 잠못 이루다가, 어쩌면 숲을 보러 나왔으나 구부러진 나무에 가리워 숲을 보지 못할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나의 눈이, 나의 선입견이, 나의 판단이, 나를 옭아매지 않도록 부지런히 말씀에 의지하며 그 분께 기도하며 청했어요. 우리를 부르신 성모님은 당신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예수에게로 나아가기를 진정 원하시며 많은 이들이 함께 한 비 오는 밤의 촛불 행렬은 그 자체로 우리의 희망으로 느껴 졌습니다. 다행히 우리 모든 식구들은 나름대로 하나 가득 기쁨을 안고 순례 여정을 마치며 영육을 고루 살찌우는 것 같아 보이구요. 수녀님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의 기도 덕분으로 대희년의 순례가 잘 마무리 되었으며 이 벅찬 감동으로 여러분께 하느님의 축복을 청해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골고타) 부터 부활까지의 다섯 군데 성지에 봉헌한 축성한 십자가가 있는데요 선착순으로 20분에게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아주 조그만 나무 십자가이지만 특별한 의미를 담고 싶어 준비했습니다. "And know that I am with you always; yes, to the end of time." (MATTHEW 28, 20 )

52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