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연탄재 도둑

인쇄

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11-18 ㅣ No.5551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나는 할머니와 단둘이 학교 근처 자취집에서 살았습니다.

주인집 아저씨가 연탄을 배달하는 분이라 연탄을 들여 놓는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문제는 쓰고 남은 연탄재였습니다.

집이 비좁으니 쌓아둘 데는 없고, 재를 내다 버리려면 날마다 5분이나 걸리는 언덕길을 내려가야 하는데, 솔직히 날이 추울 때면 귀찮아서 아무 데나 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날도 몹시 추웠습니다.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연탄재를 버리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외딴집에서 꼬부랑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더니, 연탄재 두 개가 든 상자를 들고 쓰레기장으로 내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구부정한 허리로 천천히 며ㅕㅊ 걸음 가시다가 앉아서 쉬고, 또 가다가는 쉬고.....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걸음걸이로 보아 20분은 족히 걸릴 것 같았습니다.

"에그 허리야, 에휴....."

허리를 두드리시며, 가뿐 숨을 내쉬시며 그렇게 할머니는 고개를 내려가셨습니다.

다음 날 야간자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그 할머니네 오두막 부엌문 옆에 놓인 연탄재를 보고 발길을 멈춰 섰습니다.

골목길에 쪼그리고 앉아 꼬부랑 허리를 치고 또 치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나는 연탄재 두 개를 슬며시 들고 나와 골목 끝 쓰레기장에 내다버렸습니다.

그러기를 열흘 나짓 했을까.

우리 할머니께서 동네에 신기한 일이 생겼다며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저 아래 혼자 사는 노인네가 있는데 누가 그집 연탄재를 몰래 버려 준다는 구나."

나는 그해 겨울이 다 갈 때까지 아무도 모르게 연탄재 도둑 노릇을 계속 했고, 그것은 십 년이 넘은 지금도 내 맘을 따뜻이 데우는 즐거운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178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