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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짱님 덕분에 이 나이에도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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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9-07-12 ㅣ No.9988


               노짱님 덕분에 이 나이에도 눈물을…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장맛비라고 한다. 그야말로 우중주말이다. 다행히 천둥 번개는 심하지 않아서 조금은 불안한 가운데서도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다. 좀 전에 급히 껐던 컴퓨터를 다시 켜고 이 작업을 한다.  

아파트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보니 절로 고마운 마음이 든다. 노짱의 49재를 맞아 지난 9일과 10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을 다녀왔다. 9일 오전 서울에서 빗길을 달릴 때는 걱정이 많았다.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중부지방에 많은 비를 내리고, 남부지방은 소강상태를 보일 거라는 예보였다. 그 장마전선이 10일에는 다시 남하하여 전국적으로 비가 확대되리라고 했다.
 

▲ 봉하마을 전경 / 봉화산 사찰 정토원 근처에서 내려다본 봉하마을 전경이다. 노짱이 생전에 봉화산을 오를 적마다 내려다보았을 노짱의 고향 마을이다.  
ⓒ 지요하  추모시집

9일 아침에 그런 예보를 접하고,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야 했다. 합정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사당역으로 가면서 줄곧 묵주기도를 했다. 사당역 부근에서 버스를 타고 봉하마을로 가면서 한동안은 묵주기도에 열중했다. 좋은 날씨를 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했다. 노짱의 49재와 관련하는 9일과 10일, 이틀 동안의 모든 행사들이 좋은 날씨 속에서(비에 젖지 않는 가운데)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틀 동안 장맛비가 봉하마을을 비켜 주었다. 9일 낮 충청도 땅을 벗어날 즈음부터 비가 내리지 않는 가운데 하늘에 구름만 가득했다. 하늘에 가득한 구름이 7월의 따가운 햇볕을 잘 가려주는 역할을 했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었다. 그런 최상의 조건 속에서 9일 오후의 추모시집 헌정식과 49재 추모예술제를 잘 치를 수 있었다.

10일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맑은 날씨였다. 장마전선이 남해상으로 물러난 상태라고 했다. 그 장마전선은 10일 밤부터 다시 북상하여 전국적으로 영향을 주리라고 했다. 구름 없는 맑은 날씨는 그만큼 뜨겁고 무더웠지만, 무릇 행사는 날씨가 우선 도와줘야 함을 실감시켜주는 것이기도 했다.

▲ 추모시집 헌정 / 262명 문인들을 대표하여 노무현 님 영정 앞에 추모시집을 헌정하는 리명한 소설가(한국문학 평화포럼 상임고문). 뒤 모시옷을 입은 이는 광주에서 온 김준태 시인.  
ⓒ 지요하  추모시집

봉하마을에서 이틀을 살고 충청도 태안 땅, 내 집에 돌아와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12일) 오전,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이번에는 감사의 기도를 한다. 노모께서 병환을 겪으시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아침에 주일미사를 지낸다. 아침에 노모를 모시고 비를 맞으며 성당에 가서 미사를 지내면서도 하느님께 감사했다. 미사를 마치고 빗길을 밟고 돌아오면서 차창 밖의 비를 보며 절로 즐거워지는 마음으로 성호를 긋곤 했다.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짓다

지난 6월 22일 색다른 시를 한 편 짓는 작업을 했다. 세상 떠난 이에게 바치는 '추모시'였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꽤 많은 목적시를 지었다. 대개는 어떤 행사를 기획하고 치르는 쪽의 부탁을 받고 지은 시들인데, 결혼축시 같은 것은 자발적으로 지어준 경우가 많다.

아무튼 이런저런 목적시가 많아서 시집을 만든다면 한 권을 채우고도 남을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기회가 되면 목적시들만을 묶어서 대한민국 최초의 개인 목적시집을 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추모시를 지어본 경험은 많지 않다. 2000년 7월 안면도 자연휴양림 안에 안면도 출신 고 채광석 시인의 시비를 건립하고 저녁에 태안군청 강당에서 '채광석 문학의 밤' 행사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 추모시를 지어보았다. 그 후 2002년 11월 고장 출신 최초 등단 문인이었던 고 이래수 선배(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를 기리는 문학 행사가 태안문예회관에서 있었는데, 그때도 추모시를 지을 수 있었다.

또 2001년 11월에는 매우 특이한 성격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조시(弔詩)도 한 편 지어보았다. 「한 시절 천재 작가의 곡학아세를 장송하며」라는 이름의 조시인데, 어떤 현실적 필요에 따라 지은 그런 유형의 조시로는 아마도 내 글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 추모시집 헌정 / 봉화산 정토원 대웅전 법당 안을 메운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추모시집'에 참여한 시인들  
ⓒ 지요하  추모시집

그때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2009년의 중간 도막에서 나는 또 한 편의 추모시를 짓게 되었다. 세상 떠난 이를 추모하는 시로는 세 번째가 된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추모시를 짓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짓거나 글을 쓴 경우는 전에도 두어 번 있다. 1993년 10월 어머니의 칠순생신 때 잔치를 하던 야외음식점의 분수 연못에 네 살배기 조카아이가 빠져 죽은 사고가 있었다. 그때 어느 날 꼭두새벽 성당의 성체조배실에 홀로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지은 적이 있다.

1986년 2월 작고하신 선친을 추모하는 글을 쓸 때도, 또 2005년 서른 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가운데 제수씨를 추억하는 글을 쓸 때도 눈물을 흘렸지 싶다.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짓거나 글을 쓸 때는 이상한 당혹스러움을 겪기도 한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글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신기하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그만큼 냉철함이나 냉정을 잃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눈물은 한결 정갈한 마음과 절절한 상태를 선사해주고 유지시켜 주는 것 같다. 의식이 더욱 투명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비장함과 뜨거움이 어우러지는 감정의 둔덕 위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이지의 별빛도 보게 되는 것 같다.


▲ 가까이에서 본 부엉이바위 / 봉화산 정토원에서 봉하마을로 내려오는 길처에서 부엉이바위를 보며 가슴 저리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 지요하  추모시집


노짱을 그리고 기리는 추모시를 지을 때는 먼저 많이 울었다. 노짱의 순박하고 푸근하고 정다운 이웃 아저씨 모습들을 보며 한바탕 눈물을 쏟은 다음 맑게 깨어나는 이지로, 한결 정갈해진 마음 상태로 시를 지을 수 있었다. 가급적 언어를 절제하고자 했다. 추모의 언어에 상징 의미를 싣고자 했다.

노짱의 49재에 즈음하여 발간된 추모시집에 참여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하느님께 감사한다. 전에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262명의 시인들이 지은 추모시를 모아 방대한 추모시집을 만들고, 그 시집을 세상 떠난 이에게 헌정한 것은 세계문학사상 유례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 의미 깊은 일에 나도 기꺼이 참여했다.

추모시집에 참여한 시인들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 한량없다. 9일 봉하마을을 가면서, 또 10일 서울에서 다시 일박하고 11일 태안으로 돌아오면서 버스 안에서 시집에 푹 파묻힐 수 있었다. 시들을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수많은 가지가지 마음의 꽃들을 접할 수 있었다. 노짱의 죽음으로 이 땅에 눈부시게 피어난 억만 송이의 꽃들이 집약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결같이 눈물의 꽃들이면서도, 회한과 자탄과 반성의 음조 속에서도 희망과 결의를 되새기고 다지는 비장함이 함축되어 있었다. 나는 그 많은 시들 속에서 노짱의 죽음이 정녕코 '창조적 죽음'임을, 그의 죽음이 억만 송이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음을 다시금 실감하고 또 실감하며 가슴 벅차게 확인할 수 있었다.

▲ 262명의 시인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추모시집 / 노짱의 죽음으로 이 땅에 피어난 억만 송이 꽃들이 집약되어 있는 시집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 제목을 시집의 이름으로 삼았다.  
ⓒ 지요하  추모시집

집에 와서 노짱 추모시집을 아내에게 주니 아내는 사인을 요구했다. 전에도 내 책에 사인을 해서 아내에게 선물한 적들이 있지만, 내 개인 책이 아닌 공동저작물에 사인은 한 적은 없었다. 개인 저서가 아닌 책에 사인을 하는 것은 어색한 일임을 잘 알면서도 아내는 내 사인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노짱 추모시집을, 또 그 시집 속의 내 시를 중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일 터였다. 나는 기꺼이 추모시집에 사인을 했다.

†. 사랑·평화
사랑하는 아내 구갑회 글라라 님에게
2009년 7월 10일 노무현님 49재에 봉하마을을 다녀와서
남편 지요하 막시모 드림

아내는 어제(11일) 밤늦게까지 추모시집을 읽었는데, 오늘도 비를 핑계로 집안에 틀어박혀 시집을 붙들고 있다. 자신이 우리나라 시인들의 이름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될 거라는 말도 하며…. 하여간 고마운 일이다. 노짱님도 하늘에서 미소를 지으실 것 같다.


09.07.12 18:49 ㅣ최종 업데이트 09.07.12 18:49
출처 : 노짱님 덕분에 이 나이에도 눈물을… - 오마이뉴스
노무현 49재, 추모시, 봉하마을, 추모시집 헌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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