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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19: 생명주일 - 다섯째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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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04 ㅣ No.127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19) 생명주일 - 다섯째 계명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 인간은 가꾸고 돌보는 관리자



교회는 5월 첫 주일을 생명 주일로 지냅니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 문화의 위험성을 일깨우고 존엄한 인간 생명의 가치를 되새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은 바로 인간 생명의 존엄함과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명입니다.

- '살인하지 말라'는 다섯째 계명은 인간 생명 존중과 인간 존엄성의 존중, 전쟁 회피 및 평화의 보호와 관련된다. 사진은 태내의 아기를 구하기 위해 자궁 종양 수술을 거부하다 출산 후 일주일 만에 숨진 성녀 잔나 베레타 몰라(1922~1962). 그녀는 2004년 5월 16일에 시성됐다. [CNS]


다섯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는 계명입니다. 인간 생명은 신성합니다. "하느님만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무죄한 인간의 목숨을 직접 해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2258항)고 교회는 천명합니다.


◇ 살펴봅시다

㉠ 인간 생명의 존중(2259~2283항) :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창세 9,5-6). 무죄한 사람을 일부러 살인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황금률(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과 창조주의 거룩하심을 중대하게 거스르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살인하지 마라'는 제5계명과 관련, 분노와 증오와 복수를 금하시면서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정당방위는 어떠할까요? 교회는 개인이나 집단의 정당방위 곧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공격자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에는 살인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목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 권리인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폭력을 가한다면, 부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책임진 사람에게는 정당방위가 중대한 임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시민 공동체를 해치는 공격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2266항)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형벌의 일환인 사형은 어떠할까요? 교회는 불의한 공격자에게서 인간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형뿐이라면 사형에 의존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형이 아닌 방법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면, 사형이 아닌 방법을 써야 합니다. 교회가 사형제도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사형이 아닌 방법으로도 공공질서와 안전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이고 고의적인 살인은 제5계명을 거스르는 중대한 죄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일부러 협력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생학이나 국민 건강을 이유로 행해지는 어떤 살인도, 공권력이 명령하는 것까지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중대한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죽을 위험에 놓이게 하는 것뿐 아니라 위험에 놓인 사람에게 도움을 거절한 것"(2269항)도 제 5계명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인간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마지막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돼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낙태를 중죄로 단죄합니다. 뿐만 아니라 낙태에 대한 분명한 협력도 중죄가 됩니다. 낙태하는 사람은 물론 "낙태를 주선하여 그 효과를 얻는" 사람도 자동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배아 역시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보호받고 보살핌과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생물학적 실험 재료로 쓰려고 배아를 만들어내는 일 역시 부도덕합니다. 안락사 또한 결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생명은 우리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결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 또한 중죄입니다. 자살은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 경향에 상반되며, 올바른 자기 사랑에 어긋납니다. 자살은 또한 이웃 사랑을 어기는 행위이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자살은 제5계명을 거스르는 중죄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은 이들의 구원에 대해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기"(2283항)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린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 인간 존엄성의 존중(2284~2301항) : 악한 표양(스캔들)을 통해 일부러 다른 사람이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도록 한다면, 그 악한 표양은 중죄가 됩니다. 퇴폐적 풍속, 타락한 종교생활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행동을 유발하는 법이나 사회 구조를 조장하는 이들은 악한 표양을 보이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부정행위를 조장하는 규칙을 정하는 기업주들, 학생들을 격분케 하는 교사들, 여론을 조작해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유혹이 없을 수 없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고 개탄하십니다(루카 17,1 참조).

다섯째 계명은 또한 건강을 돌보는 일까지도 포함합니다. "생명과 신체의 건강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값진 재산"(2288항)이 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육신 생명과 신체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육신 숭배를 조장하는 것이 돼서는 안 됩니다. "육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완벽한 육체와 스포츠의 성공을 우상화는 경향"은 새로운 이교도 정신입니다.

교회는 또한 온갖 형태의 과잉을 피하게 하는 절제의 덕을 강조합니다. 무절제한 과욕으로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중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인이나 인간 집단에 대한 과학적ㆍ의학적 또는 심리학적 실험이 병의 치료나 공중 보건의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연구와 실험이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률에 어긋난다면 그 자체로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치료와 처방 목적이 아닌 고의적이고 직접적인 수족 절단, 신체 상해, 불임 수술은 도덕률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장기이식은 "제공자가 겪는 신체적 정신적 손상과 위험률이 그 장기를 받는 사람이 얻고자 하는 선익과 균형을 이룬다면 도덕률에 부합됩니다"(2296항).

제5계명은 또한 죽은 이들에 대한 존경과도 관련됩니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에게는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품위있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죽은 이들의 시신은 "부활에 대한 신앙과 희망 안에서 존경과 사랑으로" 다뤄야 합니다.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는 것은 신체에 자비를 베푸는 일이며, 이것은 성령의 궁전인 하느님의 자녀들을 명예롭게 하는 일"(2300항)입니다. 교회는 육신 부활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화장을 허락합니다.


◇ 알아둡시다

㉠ 평화(2302~2306항) :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은 살의를 품은 분노와 증오가 부도덕하다는 것을 일깨우며 동시에 마음의 평화를 요구합니다. 복수에 찬 분노는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악습을 교정하고 정의의 선을 보존하기 위해서 보상을 부과하는 것은 잘하는 일"(2302항)입니다. 분노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심한 부상을 입히거나 죽이려고 한다면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죽을 죄에 해당합니다. 의도적 증오 역시 사랑에 어긋납니다. 이웃에 대한 증오는 그 이웃이 잘못되기를 의도적으로 바랄 때 죄가 됩니다.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증진하는 데는 평화가 필요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만도 아니고, 적대 세력들 사이의 균형을 보장하는 데 그치는 것도 아니다.…평화는 질서의 고요함이다.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며 사랑의 결실이다"(2304항). 따라서 사람들의 선익 보호,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 소통, 사람들과 민족의 존엄성 중시, 형제애의 끊임없는 실천 등이 없이는 평화가 지상에서 실현될 수 없습니다.
 
㉡ 전쟁을 피함(2307~2317항) : 다섯째 계명은 인간 생명을 일부러 파괴하는 것을 금합니다. 전쟁은 많은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모든 시민과 위정자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진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위험이 있는데, 평화협상의 모든 방법을 다 써도 안 될 경우 무력을 통한 정당방위권을 교회는 인정합니다.

무력을 통한 정당방위가 도덕적 정당성을 얻으려면 엄중한 조건들을 따라야 합니다. 교회는 다음의 조건들을 모두 채울 때만 무력을 통한 정당방위의 도덕성을 인정합니다. △ 공격자가 국가나 국제 공동체에 가한 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해야 한다 △ 이를 제지할 다른 모든 방법들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효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 성공의 조건들이 수립돼야 한다 △ 제거돼야 할 악보다 더 큰 악과 폐해가 무력 사용으로 초래되지 않아야 한다. 이 조건들이 이른바 '정당한 전쟁'에 대한 교리에서 열거되는 전통적 요소들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 전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전쟁 그 자체로 모든 행동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비전투원과 부상병과 포로들을 존중하고 인간답게 대우해야 합니다. 또 어떤 민족이나 국민이나 소수 민족에 대한 집단 학살은 죽을 죄로 단죄돼야 하고, 종족 말살의 명령에는 항거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무기 비축이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보장하는 유효한 방법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막중한 도덕적 제약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군비 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잉 군비는 분쟁의 원인을 증가시키고 분쟁이 확산될 위험을 증대시킨다"(2315항).
 
[평화신문, 2013년 5월 5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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