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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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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16 ㅣ No.185

[저는 믿나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김혁태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고백입니다. 종말론과 관련된 부분이기도 하고요. 온 창조세계와 그 역사는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곧 그분의 다스림 아래 최종적인 완성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목격증인이 된 사도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말합니다.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을 일시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일에 비견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심과 다시 오심 사이는 그분의 부재하심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가심은 그저 이별이 아니고, 그분의 다시 오심은 단순히 재회가 아닙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은 하지만 매우 독특합니다. 우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 속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현존은 천상적입니다. 그분의 이러한 현존은 하느님의 무한히 깊은 심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실과 같아서, 우리의 감각과 세상에는 닫혀(감추어져)있습니다. 거기서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세상이 생기기 전에…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요한 17,5)속에 사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 각자의 삶 속에도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교회의 삶과 세상의 역사 속에 살아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찾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만납니다. 그분은 시간을 떠나 영원하신 하느님의 저 초월적인 현실 속에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속에 즉각 현존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 속에 감추어진 그 현실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날’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보라, 내가 곧 간다.”(묵시 22,7.12)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 우리 가운데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다시 오실 필요가 있는 걸까요?


내가 곧 간다

예수님의 재림은 세상 종말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이 세상은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종말에 관해서는 신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더 다루겠습니다만, 종말이 신앙인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인 건 분명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을 파멸과 재앙의 모습으로 그립니다(마태 24,3-31 참조). 문학, 영화, 미술 등도 예수님의 재림을 자주 무시무시한 광경으로 묘사합니다. 종말의 시간을 강조하는 일부 종교적 집단은 흔히 재림의 공포와 불안을 조장합니다. 과연 그날은 전쟁과 대혼란의 날이 될까요?

신약성경의 종말론을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의 묵시사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하튼 핵심적인 것은, 하느님의 최종적인 승리에 대한 희망과 신뢰입니다. 좌절과 실패와 파멸과 죽음을 넘어 - 이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 두려움과 공포로 엄습하지만 - 주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이는 결코 헛된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를 남김없이 확인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부활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 악과 불의와 죽음으로부터의 승리와 해방, 이것이 온 피조물에게도 결정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인 수순이나 진화의 법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과 통치만이 그러한 승리와 해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첨단 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 스스로 지구의 운명을 단숨에 끝장낼 수도 있는 가공할 위협의 시대에 살고 있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역사의 미래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이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이 꾀는 사기로 드러날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75-677항 참조).

그러므로 온 피조세계와 함께 교회는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묵시 22,20).


아버지의 뜻 안에

신약성경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신다는 임박한 기대 속에 살았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르 9,1). 신약성경의 몇몇 대목은 이러한 급박성을 고려할 때 쉬이 납득할 수 있습니다(사도 2,42-47; 1코린 7,29-32 참조).

하지만 주님의 재림은 늦추어집니다. 이에 따라 재림의 긴박성도 수그러듭니다. 그러나 이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바, 주님은 오실 분이시며 동시에 이미 와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찬례가 거행되는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으로 실현될 미래가 선취됩니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재림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1테살 4,16-17 참조). 그분은 죽음과 부활로써 산 이와 죽은 이의 주님, 역사의 주권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재림은 죽은 이들의 부활과도 연계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시간적으로 이해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계산 밖에 놓인 것입니다.

역사상 심심치 않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짜를 특정하며 호들갑을 떠는 무리가 등장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호기심은 일반적입니다.

오늘날 신앙인의 의식마저 지배하고 있는 진화론적 세계관은 예수님의 재림을 우주의 마지막과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한편,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우리는 우주의 생성과 운명에 관해 많은 비밀을 해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시작과 끝은 시간의 시작과 끝에, 곧 시간 안에 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은, 창조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시작과 끝 너머에, 곧 시간 밖에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날짜와 장소를 계산하는 일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림의 때에 관한 성경의 여러 표징들도 천체물리학적인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의 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그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고 말씀하셨을 테지요.


최후의 심판

예수님의 재림은 최후 심판과도 연동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십니다. 심판도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자아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향해 준엄한 선고를 내리실 엄위하신 심판관으로 재림하실까요? 그리하여 ‘상선벌악’의 원리에 따라 의인에게는 상급을, 죄인에게는 형벌을 내리실까요?

최후의 심판이 피고를 심문하고 처벌하는 인간사회의 법정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기준’에 따라 우리를 향해 엄중하게 물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작은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그들이 바로 당신 자신이셨다고!(마태 25,31-46 참조)

그러나 옥좌에 앉으신 분은 고발하고 벌주는 무서운 재판관이 아니라, 한없는 자비와 사랑의 눈길로 우리를 맞이하시는 분으로 오실 것입니다.

거기 그분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모든 걸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사랑이었고 무엇이 사랑이 아니었는지! 무엇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고, 무엇이 그 사랑에 대한 거부였는지! 남김없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랑이 심판 기준이 됩니다.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서는 심판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선고가 아니라 바로 그분과의 결정적 만남을 의미합니다. 이 만남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들이 가려지고, 그러지 못한 것들은 정화의 길을 거쳐, 우리는 온전히 주님과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마지막 때에

오늘날 종말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신앙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마지막 때”(1요한 2,18)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때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수백 년 수만 년이 흐를지라도,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종말의 때라는 특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마지막 때이니, 그 어느 때보다 시련과 투쟁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김혁태 베드로 - 전주교구 신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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