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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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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경 [klara1617] 쪽지 캡슐

2009-02-22 ㅣ No.1638

 

 
    김수환 추기경님 영정사진
    평화를 지켜 주는 푸른 별이 되소서 김수환 추기경님 영전에 / 이해인 수녀 언젠가는 이렇게 당신과의 마지막 이별이 오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소식을 듣고 보니 가슴이 철렁합니다. 커다란 등불 하나 사라진 세상이 새삼 외롭고 아프고 쓸쓸합니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라는 추기경님의 사목표어가 당신의 삶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진정 모든 이를 위한 삶 이였기에 그만큼 고달프고 고독했던 시간들조차 큰 사랑으로 성화시킨 크신 아버지 우리 곁엔 언제나 "기댈 언덕"이신 당신이 계서 좋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버팀목이신 거룩한 사제 지혜의 스승, 시대의 예언자 용서하는 치유자이신 당신이 계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음 든든했습니다. 순교자의 피로 축복받은 이 땅에서 사랑의 소임 충실하게 마치시고 이제는 존재 자체로 죽음 너머의 기도가 되신 추기경님 우리 가슴속에 오래도록 살아 계실 사계절의 추기경님 슬픔이 내어 준 길을 따라 깊은 그리움 모아 기도 드립니다. 보이지 않는 근심과 고통으로 당신을 잠 못 들게 했던 이승에서의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지복의 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우리 나라와 겨레의 평화를 지켜 주는 푸른 별이 되소서 얼마 전 제가 병실에서 뵈었을 때 아픔 속에도 유머를 잃지 않으시던 따스한 웃음, 남을 먼저 배려하고 챙기시던 그 넉넉한 사랑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말의 애도보다 침묵 속의 기도를 더 반기실 당신을 그리며 말을 아끼렵니다. 마지막 감사와 이별의 인사를 눈물로 대신하며 두 손 모읍니다.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 모두 당신처럼 진실하고 겸허하고 깨끗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아름다운 첫 약속의 기도 속에 - 동아일보(2월17일자 4면에서 옮김)
    추기경 회의(로마, 2001.5.21~24)
    추기경 회의에서는 선교 활동과 연대 및 그리스도 교 일치를 위한
    노력을 강조하였으며, 특별히 성지의 평화와 아프리카 대륙의 전쟁
    과 갈등이 해소되기를 기원하였다.
    추기경 회의(로마, 2001.5.21~24)
    한국 주교단 교황청 정기 방문(로마, 2001.3.19~24)
    한국 주교단 교황청 정기 방문(로마, 2001.3.19~24)
    김기창 화백의 '바보 예술 88년'전시회 관람
    공군사관학교 사관생도들과의 만남(2000.2.13)
5
    희수(喜壽) 축하식(혜화동 주교관 식당, 199.6.21)
6
    F-5E 전투기 탑승(1999.5.12)
7
    화훼 마을 화재 현장 방문(장지동, 1992.2.15)
    2월15일 설날을 맞아 화재로 임시 천막 생활을 하는
    화훼 마을 주민들을 방문하여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있다.
8
    명동을 떠나시며(1998.6.22)
    "송별 미사 강론에서 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여러 분을 사랑합니다.
    사도 바오로와 같이 저도 여러 분을 위해 서라면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습니다' "
    (<생활성서> 창간 15주년 기념 미사 강론, 1998.8.3)
9
    청소년들이여, 꿈과 희망을!
    (KBS 홀, 1997.10.9)
10
    김대건 신부 유해 앞에서 기도
    (상하이 金家巷 성당 내 김대건 신부 기념관, 1997.8.21)
11

    백두산 천지에서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이라는 말답게 참으로 신비로운 곳이다.


    천지가 구름 사이로 오락가락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께서 인간과 숨바꼭질하는 것 같았다.


    천지 건너편의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민족 분단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가톨릭 신문> 1997.8.17 인터뷰)

12
    독도 방문(1996.4.23)
13
    한국 주교단 교황청 정기 방문(로마, 1996.3.20~26)
14
    영화<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관람 후
    전태일 모친 이소선 여사와 함께(서울극장,1995.12.3)
15

    <열린 음악회>출연 (가톨릭대학교, 1995.9.12)


    추기경은 이 자리에서 <애모>를 열창하였는데,
    공식적인 음악회에서 처음으로 가요를 불러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16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학생들과의 만남(교구청, 1995.6.5)
17
    한국 주교단 교황청 정기 방문(로마, 1990.10.10~20)
18
    제44차 세계 성체대회(1989.10.4~8) -교황 이한(1989.10.9)
19
    제44차 세계 성체대회(1989.10.4~8)-'평화의 날' 행사
    (올림픽 체조 경기장,1989.10.4)20-2제44차 세계 성체대회
    (1989.10.4~8)- 장엄 미사(여의도, 1989.10.8)
21
    상계동 철거민들과의 성탄 미사(1986.12.24)
22

    사복 탄광에서의 현장 체험(1985.8.27~29)
    추기경은 가난한 사람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현장 생활 체험, 즉 아시아 사회 주교 연수회(BISA)
    의 일환으로 사북 탄광을 찾았다.

    "피상적으로
    듣고 보았던 현실보다 현장의 어려움은 너무 심각했습니다.
    교회의 제반 여건이 그들과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거리가 멀어진 삶을 살고 있어 현장 생활 체험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는 우리 주교 자신들에게
    커다란 반성의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제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인가 자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주교는 물론 성직자·평신도
    들에게까지 현장 생활체험이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가톨릭 신문>1985.9.15 )

23
    순교자 유해 참배(절두산 성당, 1984.5.3)
24

    버마 아웅산 참변 희생자 추모 미사(로마, 1983.10.13)
    "버마의 수도 랭군에서 여러 분의 사랑하는 이들이 폭사할 때
    하느님도 함께 폭사 하셨습니다.

    그 기막힌 죽음의 쓴 잔을 하느님도 함께 마셨습니다.ㅍ
    그분들과 함께 계시다가 죽음의 순간에는 물러서고 마는 그런
    하느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당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함께 매달리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은
    여러 분의 사랑하는 분들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도 역시 함께
    계셨습니다"
    (아웅산참변 희생자100일 기일미사강론,1984.1.15)

25
    장애인을 위한 미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교육관,1981.12.20)
    "육신의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에서 해방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당일 미사 강론)
26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중앙청, 1979.11.3)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우리중의 누구도 일개 정치인의 일신상의 사건으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중대한 역사적 문제를
    내포한 사태로 보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 역사의 새로
    운 장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서거 이후 한국의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있고,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추도 미사 강론, 1979.11.2)

27

    영등포 교도소 미사(1979.4.20) "우리 자신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진실한 인간, 정의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세상이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이 내 안에서 나고, 자라고, 성숙해지
    는 것입니다"(영등포 교도소 미사 강론, 1979.4.20)

28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즉위식(1978.10.22) "우리는 하느님
    께서 뽑기를 원하신 분을 교황님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추측, 현대 과학에서 자랑하는 컴퓨터의 계산
    결과가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인 폴란드 출신의 보이티야
    추기경이었습니다.

    450여 년 만에 탄생한 비이탈리아인 교황
    님을 모시는 그 시간, 신자들의 열광적인 환성, 우렁찬 목소리
    로 인사 말씀을 하시는 교황님의 패기에 찬 모습. 모두 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교회 역사에 새 장이 펼쳐지는
    감격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교황님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닫힌 문들을 여십시오!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힘을 믿고 그
    분께로 힘차게 나아갑시다.

    두려워하지 말고 국가와 경제의
    경계, 정치 체제 및 여러 문화의 넓은 광장, 문명과 발전의
    경계의 문을 여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는 인간
    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다.

    오직 그분만이 아십니다'
    라고 외치셨습니다"

29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알현(1978.9.3) "바오로 6세는 남을
    위해 많이 우신 분이라면, 요한 바오로 1세는 남을 울리실
    분이다"
30

    79위 순교 복자 시복 50주년 현양대회(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1975.9.28) "순교자들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증거자입니다.

    순교는 사랑의 증거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증거입니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 (마태16,25)
    하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으로 우리에게 십자가위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순교자들처럼 비록 죽음을 통한 사랑의 증거
    는 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제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에서
    최대로 사랑의 증거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79위 시복
    50주년과 화홰의 성년을 지내면서 이 사랑의 실천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화해나 쇄신을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순교 복자들을 모범으로 삼고 외부 행사보다는 우리 자신의
    내부의 쇄신에 중점을 두고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이 더욱
    빛나도록 날로 더욱 정화되고 쇄신되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당일 미사 강론)

31

    지학순 주교와 함께(1974.7.23)
    " '이분의 삶을 지배하였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 나라와 겨레
    에 대한애국애족 심 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

    지 주교님이 유신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선 동기는 남달리
    강하게 지니셨던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분은 고통받는 이가 누구이든지, 신자 비신자 관계없이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며 그들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
    주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가난과 고통이 본인의 탓이라기보다 억압 정치
    와 구조 악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에 대한
    지 주교님의 의분은 불과 같았고 정의를 위해 개혁을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학순 주교 장례 미사 강론, 1993.3.16)
    긴급조치 1호.4호 위반 혐의로 7월6일 구속되었다가
    풀려 난 지학순 주교는 이 날 '양심선언'을 하였고,
    8월에 다시 투옥되었다.

32

    7.4남북 공동 성명과 8.3 긴급 조치에 대한 메시지 발표(CCK,
    1972.8.9) "본인은 7.4 남북 공동 성명과 8.3 긴급 재정명령
    등으로 소연한 현 시국에 즈음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여
    국민의 각오와 시국에 대처할 태세 정비를 촉구하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소신을 밝히는 바이다.


    1. 우리는 7.4 공동 성명이 영구히 전쟁 수단을 포기하고 대화
    로써 조국의 통일을 달성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
    하면서, 남북의 정치가들이 이 약속을 성실히 지키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이것을 평화를 위장한 전쟁 준비의 수단이나 권력
    정치의 기만 전술로 이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

    2. 최근에 실시된 8.3 긴급재정명령으로 야기된 현실 앞에서,
    정부의 보호와 특혜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제를 이 지경에까지
    몰아붙인 책임 있는 기업인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문책함과 동시에,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한 정부가 국가를 파산
    지경에 이르도록 무책임하게 영도해 온 데 대하여 피를 바쳐
    나라를 지키고 땀을 바쳐 봉사해 온 모든 애국 시민의 이름
    으로 엄중히 항의하고 맹성을 촉구한다.

    3. 국민이 개인으로나 단체로서 국가 생활과 국가 통치에 실질
    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끔, 언론.출판.집회.결사.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명한 선거와 균등한 기회와 안정된 환경을 확보
    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만이 남북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담보임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현 시국에 관한 메시지>,
    1972.8.15)

34

    노기남 대주교 장례 미사(명동 성당, 1984.6.29)

    "노 대주교님은 실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기까지 서울 교구
    장으로 계셨던 23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국 교회의 지주요
    기틀이셨으며, 근세와 현대 한국 교회사의 산 증인이셨고,
    당신 자신이 그 역사의 주역이기도 하셨던 분이십니다. …

    우리는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참 좋으신 주교님, 아버지
    같은 목자를 주셨음에 감사 드리면서 대주교님의 영복을 빌고
    자 합니다.'주여, 우리 주교 바오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으로 저를 비추어 주소서!'"(당일 미사 강론)

35
    첫 영성 체 기념 (김천 성당, 1955.11.1)
36

    어머니 서중하 여사
    "어머니는 나를 낳고 기르셨을 뿐 아니라 공부를 시키고 내가 성직
    의 길로 가게 한 분이시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
    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하건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수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 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

    내 마음에 새겨진 우리 어머니의 영상은 늙으신
    모습이다.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고 70여 년의 풍상을 겪으신 그런
    모습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신 분.
    그러나 근엄하면서도 미소도 지으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


    우리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지실수록 얼굴이 더 밝아지고 미소가
    많아지셨던 것 같다. 차츰차츰 삶을 믿음 속에 받아들이고 초탈해
    지셨기 때문일까?

    혹은 당신이 원하신 대로 아들 둘을 신부로 만드
    시고 뜻을 다 이루셨기 때문일까? 또는 귀여운 손자 손녀들 때문
    이었을까?

    우리 어머니는 충분히 그 자질을 갖추셨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셨던 분, 자식들을 피어나게 하기 위해 당신은
    밑거름이 되신 분이었던 것 같다. …

    우리 어머니는 당신이 원하시던
    대로 아들 둘이 신부 되는 것을 보시고 4년 가까이 신부인 나를 위해
    함께 사시며 기도로써 도와 주시다가 1955년 3월에 향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샘이 깊은 물> 1984.11)

37
    대구 대목구장 비서 시절(1953.6.19) -메리놀 외방전교 회 출판
    부장이 대구 대목구를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 앞줄 왼쪽부터 케롤
    몬시뇰, 최덕홍 주교, 메리놀 외방전교회 출판부장
38

    사제 서품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 (1951.9.15)1951년 9월 15일.
    이 날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세상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
    노라'는 결정적인 대답을 한 것이다. …

    그 해 69세이셨던 어머니는
    '자식이 신부가 되는 게 소원' 이었던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지켜보고 계셨다.


    식순에 따라 나는 두 손을 모아 이마를 받친 자세로 마루에 엎드렸다.
    성가대와 선배 신부들이 불러 주는 성인 열품 도문(성인 호칭 기도)
    의 성스러운 메아리가 성당을 맴돌 때,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자리
    할실 수 있도록 나는 내 마음을 비워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중앙일보> 1981.9.22)

39

    군종 신부로 입대하는 형님 김동한 신부와(대구주교관 앞, 1951)
    "우리는 세 살 터울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형님이 초등학교 4학년
    을 마치고 신학교에 갈 때까지는 떨어져 본 일이 없다 싶을 만큼 형
    제요 동무였다.

    나도 형님 따라 2년 후에 신학교에 갔다. 그 후로
    학교에서는 먼발치에서 보았고, 방학 때는 언제나 함께 지냈다.…


    형님은 6·25전쟁 동안 해군 군종 신부로 입대하여 5~6년 봉사하고
    중령으로 제대하셨다"(<고 김동한 신부 추모 문집>, 1993.8.5)

     

40
    역경의 시절, 학병 -앉은 이는 전석재 신부
41

    가족사진 (1944.1) -앞줄 가운데 추기경의 이모님과 어머니(안경
    쓰신 분), 뒷줄 왼쪽 부터 셋째 형님(필수) 내외, 추기경, 넷째 형님
    (동한, 당시 신학생), 큰 누님, 작은 누님 "우리 아버지는 내가 국민
    학교 일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많지 않은데,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본시 성품이 곧으신 분이셨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다. 특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비
    없는 자식' 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그만큼 자식들
    교육에 엄격하셨다. …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낳은 여덟 명의 아들 딸
    중 막내였다. 위의 형이나 누이들은 가난과 잦은 이사 때문에 공부를
    시키지 못하셨는데 내 바로 위의 형과 나만은 그런 궁핍 속에서도
    공부를 꼭 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다. …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먹이고 입히셨다.
    그 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 (<샘이 깊은 물>, 1984.11)

42
    일본 유학 중인 한국인 신부.신학생 모임 (1943.11.20)앞줄 왼쪽
    안경 쓴 이가 김정진, 그 옆이 최석우,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추기경, 그 왼쪽이 최익철(이상 신학생), 맨 오른쪽은 한공렬 신부
43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1941.11.8)앞줄 끝이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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