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곡동성당 게시판

키작은 자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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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모 [leebm] 쪽지 캡슐

1999-11-16 ㅣ No.432

어느 때 주님을 가장 애타게 찾게 될까? 큰 일이 있거나 시름이 있을 때가 아닌 가 싶다. 고통과 근심의 질곡에서 애타게 주님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고... 그렇지만 아무런 응답도 안해주시는 주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울부짖고... 이런 일이 자주 있게 되면 쉽게 빠지게 되는 딜레마는 과연 주님이 계신가 아닌가 하는 질문일 듯 싶다. 나 또한 그런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 했으니까...

 

오늘의 복음은 그런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다. 어지간히 성당을 왔다갔다 한 사람이라면 키작은 세관장 자캐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의 세리라 하면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사람으로 모든 동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던 직업이었다. 세리의 長이 세관장이었으니 자캐오라는 사람도 어지간히 손가락질을 받았으리라(아마도 곱배기로...). 평소 자캐오는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한번 만나보고 싶었었나 보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보기위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한 행동은 무화과 나무에 올라간 것이었다. 그 행동 덕분에 그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얻었고, 자신의 삶을 회개할 수 있었으며 결국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과연 자캐오처럼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아나선 적이 있을까? 그저 예수님을 보기위해 까치발을 서보다가 예수님이 안보인다고 뒤돌아서서 체념하지는 안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뵙기 위해 자캐오처럼 체면이고 뭐고 생각하지 않고 나무에 오르는 적극성과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모신 후 자신의 삶을 뉘우치는 회심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만나면 달라져야만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내안에 모신 예수님으로 만족하고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념으로서의 종교일 뿐이다. 그렇게 관념으로 머무르기엔 그리스도교는 너무 젊다. 젊은 예수처럼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행동이 따르는 믿음만이 참된 믿음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도 있지 않는가?

 

오늘의 복음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해준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 자꾸 뒤로 물러앉으려고 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 주님을 뵙기 위해 다시금 나무로 오르고, 새로운 결심으로 그분을 닮을 수 있도록 해야겠는데... 쉽지만은 않다. 내 앞에는 주님의 모습을 가리우는 많은 장애들이 놓여 있는 듯하다. 마치 자캐오를 가로막은 군중들처럼... 요즘의 그런 내 모습을, 내 삶을 반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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