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우리는 왜 무반주 다성 성가 (Polyphonic Chant)를 부르고 또 듣고 싶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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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3 ㅣ No.566

+ 찬미 예수님!

 

2005년 10월 21일 밤 8시 서울 대교구 명동 주교좌 대성당 및 그 다음 날 밤 8시 수원 교구 분당 요한 성당 대성당에서 제 16회 정기 연주회를 개최한 무지카 사크라 합창단의 단원으로서, 오늘은 "왜 무반주 다성 성가 (Polyphonic Chant)를 우리는 부르고 또 듣고 싶어할까?" 라는 제목하에, 다소는 생소한 그러나, 이틀 간의 연주회에 참석하신 열성 교우님들께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미 잘 이해하고 계실 이들 두 연주회의 차이점을 글로서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무대에 섰던 연주자로서 명동 대성당에서의 연주도 아주 좋았고 또 분당 요한 성당에서의 연주도 참 좋았기에, 어느 쪽의 연주가 더 좋았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우선 말씀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바라옵건대, 앞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음악을 전공할 혹은 비전공할 우리들의 청소년들에게 특히 이 글의 내용이 전례음악의 속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 이 글은 제가 녹음한 이들 연주회 실황 녹음들을 들어 보지 않고 썼습니다. 내일 밤에 작업을 하여 다 올려드릴 터이니, 우선 이 글을 읽으신 다음에 이들을 들어 보시어, 이 글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큰 차이점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서론

우리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 생각하는 바가 있기에, 말 혹은 글을 통하여 이러한 마음을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우리들의 정서를 고도로 승화시켜 전달하려고 하는 일체의 행위를 두고서 우리들은 보통 "예술(Arts)"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음악(Music)"은 예술적 표현의 한 형태로서, 연주할 당시에도 아무도 그 모습 조차 볼 수도 없는 형이상학의 극치로서 "피부와 귀"를 통하여 가장 마음 깊이 전달되는 예술 중의 예술이기에,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기쁘거나, 외롭거나, 슬프거나 혹은 고통스러울 때에 호흡과 함께 터져 나오는, 그리하여 우리들 각자의 영혼이 한 가지 마음으로 서로 통하여 하나로 드러나 일치하게 되는, 천주께서 우리들을 지극히 사랑하시여 우리들에게 거저 주신 참으로 고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이번의 연주에 임한 분들과 또 참석하여 경청해 주신 분들 공히 느꼈을 차이점 혹은 특징을 우선 간단하게 한 두마디로 요약하면,

 

명동 대성당에서의 연주회는 "노래를 한 연주회",

 

분당 요한 성당에서의 연주회는 "기도를 드린 연주회"

 

이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 본론

"노래를 한 연주회"에서는 음악적 기량 즉 인간적인 예술적 기량을 "잘" 극대화 하였을 때에 관객들이 "더" 감동을 받게 되기에, 훌륭한 작곡가일수롤 자신의 깊은 마음으로부터 스며나오는 그 무엇을 주제로 하여 곡을 작곡할 때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작곡 작업에 임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오페라 중에 자주 듣게 되는 사랑하는 연인을 잊지 못하여 눈물 흘리면서 내 뱉는 탄식을 담은 아리아(Aria)는  아마도 좋은 "노래"일 것입니다.

 

[다음을 클릭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아리아(Aria)에 대한 설명으로 바로가기..].

 

전문 오페라 가수, 성악가로서 흩어지는 노래 소리에 가사의 내용을 소리로써 잘 담아내기 위하여 피눈물나는 연습을 하는 이유도 이러한 기교적인 부분을 잘 표현하여 청중들에게 깊은 "인간적인 감명"을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들은 사실은 너무도 많아, 이 글에서 굳이 누구의 작품이 더 좋더라고 말씀드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즉, 누구의 작품을 우리가 더 좋아하고 혹은 사랑하는 지를 논하기 이전의 문제인 셈이죠.

 

이에 반하여, "기도를 한 연주회"에서는 우리가 미사 중에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기도문을 호흡에 담은 선율로서 읊조리기에, 인간적인 예술적 기량을 여하히 잘 구사였는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를 않고 (물론, 문제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대신에 얼마나 기도에 충실한 음악을 구사하였는지가 중요해질 것입니다.

 

즉, "연주자들이 선율에 담은 기도"가 소위 말하는 "관상기도"에 얼마나 적합한 음악인지가 중요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장르의 노래 혹은 음악이, 가톨릭 교회의 전통 문화 유산 중에 그 역사가 아주 오래 되었고 또 미사 예식 중에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일정 부분 이상 아주 잘 흡수된 관상기도에 얼마나 더 적합할 것인지를 살펴 볼 때에는, 인간적인 갈등, 탄식 등등의 관람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세속 음악들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기교적인 면들은 그리 중요하지가 않고, 영생의 구원자이신 천주 성자께서 나에게 다가오시려고 할 때에 온전하게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잘 받아 들이어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오직 주님의 은총, 즉 성령(Holy Spirit), 으로 가득 채워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되므로, 어제 분당 요한 성당에서의 "기도를 한 연주회"의 경우에는 특히 관상기도에 적합한 정말로 주님보시기에 진솔한 좋은 음악이 모처럼 연주되었다는 말씀을 감히 드리고 싶습니다.

 

실제로 연주에 참가한 단원들에게 뒷풀이 자리에서 물어 보니, 어제의 연주회 중에 빅토리아의 작품 레뀌엠 연주 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에 몰입하는 정말로 소중한 체험을 하였다고 많이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주 중의 이런 신앙적 몰입은 사실은 사람의 인위적인 힘으로는 잘 되지를 않는데,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천주께서는 연주에 임하고 있는 저희들에게 강림하시어 저희들을 이끌어 주셨던 것이 분명하기에, 천주께 깊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다.

 

우리가 한 마음 한 생각으로 천주께 기도 드릴 때에 비로소 우리의 간절한 청원, 즉 기도, 를 들으시고 천주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비로소 드러나시어 작용하시므로 (Act), 바로 이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천주의 의지 (Divine Will)의 작용을 우리가 미사 중에 혹은 연주회의 양식를 통한 성음악 실황 연주 중에 다들 느끼어 알 수 있도록, 그레고리오 성가 (Gregorian Chant) 및 무반주 다성 성가 (Polyphonic Chant)를 열심히 보급하라고 역대 교황님들께서는 가톨릭 교회의 성음악 관련 문헌을 통하여 사제, 수도자, 및 전례음악 관련 봉사자 (전례음악 전공자 및 비전공자 포함) 모두에게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가톨릭 성교회의 전례음악을 연주하는 모든 신심단체의 존재 및 활동 목적일 것입니다.

 

[

참고: 위 부분에 대하여 아래의 글들을 참고하시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1. 교황님의 역할 - 이단인 단의설에 대한 설명과 함께.. (클릭하세요) 에서, 특히 단성설 및 단의설이 왜 오래 전에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는지에 대하여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어려운 글입니다.

 

2.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성음악 관련 (발췌)글 모음.. (클릭하세요)에서 한글로 요약된 부분을 꼭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3.  가톨릭 전례음악에 관한 다음의 가톨릭 교회의 4개의 기본 문헌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게시자 주: 일전에 제가 이곳에 올렸던 게시글들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아래의 자료들 중에 한글 번역문에는 오역된 부분들이 더러 있으므로, 반드시 영문 문헌과 함께 비교하면서 읽으셔야 할 것입니다.

 

3-1. 다음은 "성음악에 대한 지침", 즉 "성음악 훈령" 인터넷 주소입니다.

http://www.adoremus.org/MusSac.html (영문) (클릭하세요)

http://www.nzkcc.com/munhun/munhun_data/hunryung.htm (한글) (클릭하세요)

 

3-2. 다음은 "자의교서" 인터넷 주소입니다.

http://www.adoremus.org/1203PiusX.html target=_blank (영문) (클릭하세요)

http://www.adoremus.org/MotuProprio.html (영문) (클릭하세요)

http://www.vatican.va/holy_father/pius_x/motu_proprio/documents/hf_p-x_motu-proprio_19031122_sollecitudini_it.html (이탈리아어) (클릭하세요)

 

3-3. 다음은 "성음악 규준" 인터넷 주소입니다.

http://www.adoremus.org/MusicaeSacrae1955.html (영문) (클릭하세요)

http://www.vatican.va/holy_father/pius_xii/encyclicals/documents/hf_p-xii_enc_25121955_musicae-sacrae_en.html (영문) (클릭하세요)

http://222.109.34.30/pds/vatican/pope/PIUS12/MUSICAE/MUSICAE.htm (한글) (클릭하세요)

 

3-4. 다음은 "전례헌장" 인터넷 주소입니다.

http://www.adoremus.org/SacrosanctumConcilium.html (영문) (클릭하세요)

http://www.vatican.va/archive/hist_councils/ii_vatican_council/documents/vat-ii_const_19631204_sacrosanctum-concilium_en.html

 http://222.109.34.30/pds/council/02sacrosanctum.htm (한글) (클릭하세요)

] 

 

즉, 유흥(Entertainment)성 "노래하는 자세"로 임하여 노래를 부르고 또 기교적인 면을 잘 들려 드림으로써 청중들의 감성에 호소하여 인간적인 환호와 갈채를 이끌어 내자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로지 "기도하는 노래기도"를 통하여, 연주 중인 단원들이나 경청하시는 교우님들께서 연주 중에 천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거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는 그러한 연주 장르가, 바로 전례음악, 즉 무반주 다성 성음악 (Polyphonic Chant) 연주 장르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성음악을 연습할 때에도 당연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습에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연습 중에 몸에 베인 것을 내뿜는 것이 연주이기에, 항상 시작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하는 자세로 연습에 임하고, 또 마침 기도로써 마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하오니, 살아 있는 동안에 진실로 천주께 더욱 더 가까이 가 보고 싶으신 교우님들께서는 그냥 청원하는 염경기도도 좋을 것이나, 성가를 열심히 불러 보도록 하세요. 특히, 가사가 가톨릭 성교회의 기도문 (여기서는, "고유 기도문"이 아니라, "통상 기도문"을 말하고 있습니다.)을 노래로써 자연스러운 호흡과 함께 읊어 보시기 바랍니다.

 

[

참고: 예를 들어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Graduale Triplex 로 불리는 미사 전례용 그레고리오 성가 책에서, Kyriale (주: 지금 사용 중인 가톨릭 성가집에서는 이들을 "미사곡"이라고 부르고 있음.)로 불려지는 일련의 그레고리오 성가들의 가사를 말합니다.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시면, 미사 중 사용되는 기도문들 중에 어떤 것이 "통상 기도문"들이고 어떤 것이 "고유 기도문"인지에 대하여 또 이들 기도문들의 역할에 대하여 잘 아실 수 있습니다. 

 

1.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gospelbbs/-/a/5763/ (클릭하세요) 글의 전반부 내용 참고.

 

2. http://www.cma4u.com/ency/m/mass.htm (클릭하세요) 글 전부.

 

이런 "노래기도"에 제대로 몰입하게 되면, 차분한 호흡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서 아주 뜨겁게 느껴지는 그 무엇이 온 몸을 따뜻하게 그러나 매우 강열하게 감싸안음을 느낄 수 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천주께서 성령의 형태로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노래 소리를 듣고서 응답하시어 우리들에게 작용하고 계시는, 즉 천주를 뵈옵고 한 가지로 일치 됨이 이루어 지기에 느끼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에게 살아 있는 동안에 가장 행복한 순간, 즉 "천국을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느낌으로 알게 되고 나면, 기꺼이 성가를 부르려고 하고 또 잘 부르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므로 그 결과 굳건한 신앙심이 마음 속에 자라지 않을 수가 없기에, 아주 오래 전부터, 즉 그레고리오 대 교황님 (재위기간 AD 590년 - 604년)께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정립하여, 삼위일체이신 천주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천주경신례" 즉 "천주흠숭지례" 그 자체인 미사성제 전례예식을 지탱하는 큰 기둥으로 삼아, 가톨릭 성교회가 지금까지도 지구상에 단 하나의 교회로 또 단 하나로 유지되어야만 하는 교회로 유지가 될 수 있도록 획기적인 제도적 조치를 취한 6세기 초 훨씬 이전부터, 수도원을 비롯한 여러 신심단체에서는 기도시에 함께 모여 성가를 잘 부를 것을 적극 권장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 본당의 전례음악 봉사자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봉사자들께서도 이러한 미사 전례예식의 정신을 우선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이러한 미사 전례예식의 정신을 잘 담은 가톨릭 교회의 성음악 관련 문헌에 어떠한 내용들이 있는지에 대하여서도 많이들 공부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즉, "내가 지극정성으로 정성을 다하여 하면 되었다"는 극히 주관적인 판단은, 교우님들의 영성에 참으로 위험 천만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면 삼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여, 개신교 측에는 16세기 초에 마르틴 루터 개인의 감정적인 반발 때문에  천주께서 직접 말씀으로 세우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항명하며 떨어져 나가면서 가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이 단지 성서 뿐이었기에 개신교 교회측에는 온고지신할 문헌이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가톨릭 측에는 신약성서 자체가 가톨릭 교회의 전통안에서 형성이 되고 선정이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인류 유사 이래 가장 정직하고 가장 정리가 잘 되어 있는 문헌을 통하여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전승)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을 존중하고 배워 따를 생각을 하는 대신에 굳이 무시하고 따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무 것이나 몰입하여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가톨릭 신앙생활은 아니니, 이런 점에, 우리들은, 또한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영성 교육시에, 각별히 유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

참고: 1512년 경에 마르틴 루터에 의하여 어지럽혀진 부분을 바로잡고자 1545년 부터 거의 20여년에 걸쳐 개최되었던 트리엔트 공의회 내용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배출한 공의회로서,

(2) 믿음에 있어 성서(Bible)와 성전(Church Tradition)이 꼭 같은 비중으로 중요함을 천명하였으며,

(3) 가톨릭 교회의 교리 및 교의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칠성사를 세운 매우 중요한 공의회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다룬 내용은 가톨릭 신자들은 필히 숙지하고 계셔야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dictionary.catholic.or.kr/dic_view.asp?ctxtIdNum=3727 (클릭하세요) 가톨릭대사전에 설명된 트리엔트 공의회 내용 요약입니다.

 

 

3. 결론

가톨릭 전례음악의 발전, 보급 및 저변확대를 위하여 설립된, "교육기관인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 [원장: 박원주 신부(2011년 여름 이후), 원장: 백남용 신부(2011년 여름 이전), 구: 가톨릭음악원 (원장: 차인현 신부), 구: 종교음악연구소 (소장: 차인현 신부)]" 부설 무지카 사크라 합창단과 같이,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전례음악을 그 전문 연주 쟝르로 하는 합창단의 초청 혹은 정기 연주회는 본질적으로 "노래로 기도하는 연주회"이기에, 천주께 바치는 연주 중의 "천주흠숭 무반주 노래기도"의 결과, 연주 중인 단원 및 관람객들 모두가 매우 편안한 상태에서 함께 마음의 문을 열어, 천주께서 그 시간에 우리에게 작용하심을 쉽게 오시는 그 모습 그대로 잘 받아 들이어, 천주께서 주시는 참평화, 참사랑을 일치된 한 마음으로 다 함께 느끼고자 하는 데에 그 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세속적 유흥성 화려함의 추구가 아니라) 영성적인 면을 매우 중요시 합니다.

 

따라서, 만약에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전례음악을 그 전문 연주 장르로 하는 합창단이 연주 중에 관람객들 모두를 단 시간 내에 관상기도로 왕창(?) 이끌지 못하였다면, 설사 인간적인 음악적 기교면에서는 성공한 연주회이었다 하더라도, 기 언급한 가톨릭 신앙의 본질적인 면을 널리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합창단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기도하는 연주회"로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연주회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P.S.

일전에 "성(Sacred) 글자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의적 의미"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말씀드린 내용을 성음악과 관련하여 좀 더 쉽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즉, 어떠한 음악 장르에 속하는 곡을 전례용도로 작곡하였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 곡이 관상기도에 적합하지 않으면, 그 곡이 미사 중에 연주되었을 때에 우리가 분심(갈라지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침묵 중에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또 그 순간에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천주께서 우리에게 작용(Act)하시는 것을 방해하므로, 자연히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되어 결국에는 미사 전례 예식 중에 사용을 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자연 = God Given 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수 = God Given Numbers. 

 

따라서 음악에 관한 한, 어떤 음악이 과연 전례용으로 합당한지에 대한 현실적으로 가장 활실한 잣대가 바로 그 음악이 관상기도에 얼마나 적합한지 아니면 적합하지 않은지의 여부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꽹과리나 징 등의 타악기 (여기에는 피아노도 포함)가 미사 중 사용 금지인 것도 바로 관상기도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며, 이에 반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는 관상기도와 너무나 잘 어울리기에 당연히 전례예식용 음악 중의 최고의 자리, 즉 성가 중의 으뜸 성가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이상, 상당히 쉽게 풀어서 이것 저것 여러가지 말씀을 드렸는데, 특히 교회음악 작곡을 전공할 분들 혹은 공부 중인 분들 (작곡가 및 연주자 포함)께서는, "이 곡이 결국에 관상기도에 과연 얼마나 적합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관상기도에 더 적합한 음악일수록 당연히 전례용도에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성(Sacred)" 글자의 가톨릭 교의적 의미 게시글로 바로가기.. (클릭하세요)

 

이상 끝.

 

글쓴이: 소순태 마태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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