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성당 게시판

두 얼 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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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섭 [wansub69] 쪽지 캡슐

2000-09-06 ㅣ No.2546

한 다리를 저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어느 날 냇가에서 물에 떠내려오는 흰 구름을 보았다.

소녀는 항아리 속에 흰구름을 물과 함께 떠담아가지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아무도 몰래 흰구름을 우물 속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는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면 우물가로 나가서

흰구름하고 이야기하며 지냈다. 하루는 흰구름한테 물어보았다.

 

"어떻게 살면 행복해지니? 알고 있다면 말해다오."

"좋아, 내가 깨닫게 해주지."

 흰구름이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자 우물 속이 빈 화면이 되었다.

  

동전 하나가 나타났다. 양쪽 얼굴이 각각 다른 동전이었다.

한쪽은 웃는 표정이었고, 한쪽은 찌푸린 표정이었다.

동전은 때굴 때굴 굴러서 뜨락에 섰다.

 

"볕이 드는군. 고맙기도 해라."

 웃는 얼굴이 말하자 찌푸린 얼굴이 투덜거렸다.

"무슨 놈의 햇볕이 이렇게 시들해. 활짝 좀 쏟아지지 못하구서."

 

바람이 불어왔다. 단풍잎을 흔들었다.

웃는 얼굴이 말했다.

"상쾌한 바람이야. 산너머의 소식이 단풍물을 들이네."

찌푸린 얼굴이 말했다.

"빌어먹을, 왠 바람이 이렇게 차담."

 

동전은 때굴때굴 굴러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찌푸린 얼굴이 말했다.

"먹지 못하는 풀이 왜 이렇게 많아."

웃는 얼굴이 말했다.

"여기는 더덕이 있고, 저기에 고들빼기가 있네."

 

해가 서산 마루에 걸렸다.

웃는 얼굴이 감탄했다.

"아, 저 해 지는 아름다운 풍경 좀 봐.

 이제는 또 별을 보는 기쁨이 오겠네."

찌푸린 얼굴이 말했다.

"해가 청승맞게 지는군. 지긋지긋한 밤이 또 오겠지."

 

돌아오는 길에서 웃는 얼굴이 말했다.

"한다리가 성하니 나는 행복하다. 어머니가 계시니 행복하다.

 코로 향기를 맡을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하고, 뜨거운 물을 마실 수 있으니

 또한 행복하다."

 

찌푸린 얼굴이 말했다.

"한다리를 저니 나는 불행하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더더욱 불행하다.

 왼쪽 귀가 약간 멀었으니 나는 불행하고 찬물을 마셔야 하니 역시

 불행하다."

 

소녀는 우물에 기대어 잠깐 잠이 들어 있었다.

소녀의 얼굴이 웃는 표정이 되어 우물 속에 떠 있었다.

흰구름이 살며시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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