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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나이다 - 사도 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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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18 ㅣ No.2

[교리 해설] 나는 믿나이다 - 사도 신경 (1)
 
하성호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본지 주간 · 신부)
 
 
“어떻게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애들 다 키워 놓고 나니 뭔가 허전합디다. 젊어서는 살기 위해 아득바득하다가 보니 삶이 뭔가를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젠 제 갈 길 다 가고 텅 비다시피 한 집에 혼자 남아 있으면 생을 헛살았다는 자책이 무섭게 엄습합니다. 그래 취미 생활도 해보고 이것저것 해봤지만 항상 뒷맛이 허전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으며 인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니 그 허전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중년 부인의 신앙 생활 입문담이다.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을 찾고, 알고 그리고 믿는 새로운 삶의 시작, 신앙은 이렇게 누군가를 찾고 믿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인간 누구에게나 삶의 지표가 된다. 가톨릭 신자는 그 지표가 바로 창조주 하느님이심을 고백한다. 이번 달부터 교리 해설은 믿음의 정수 ‘사도 신경’을 알기 쉽게 풀이해 준다.
 
 
모든 종교는 믿음의 내용을 간략한 신앙 고백문으로 요약한다. 오늘날 우리가 전례 안에서 사용하는 신경 역시 그리스도교 믿음의 내용을 신앙 고백문 형태로 요약한 것이다. 이 신경의 기본되고 중심되는 내용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하지만, 꼴을 갖추기 위해서는 오랜 역사를 요했다. 처음에는 세례성사의 전례 때 사용되던 문답 형식의 간략한 신앙 고백문이 사용되다가 5세기 말엽에 성찬의 전례 안에까지 도입되었다.
 
 
신경이 형성된 배경
 
우리는 지난해 “휴거”를 외치면서 이 사회를 불안하게 했던 한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어처구니없던 교리 주장을 잘 기억하고 있다. 옆집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가 자신의 것과는 맞지 않다고 ‘동네 뒷골목 구멍가게 내듯’ 교회 하나 차려 놓고, 내가 가르치는 교리만이 참되다고 주장하면서 너도나도 파를 만들어 가는 우리의 종교적 현실은 무엇이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인지, 또 어느 교회의 가르침이 정통성을 가지는지를 식별하는 데 많은 혼란을 초래시킨다. 성서를 제멋대로 해석하며 교회의 전통을 무시한 이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도교 신경들이 형성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가져다 줄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 살펴보면 초대 교회 때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역사의 틈바구니에 끼어 숱하게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우리 교회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주추삼아 세우신 바로 그 교회라는 정통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사실 사도들의 활동 시기와 그 다음 시대에 이르는 동안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리스도교는 놀랄 만큼 급성장했다. 이러한 교세의 팽창은 역시 많은 문제점들을 초세기 그리스도교에 가져다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로 입문하는 이들이 여러 지방과 다양한 문화권, 그리고 다양한 종교권 출신들이었고 따라서 교회도 다양하게 그들을 수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연스레 여러 이단이 생기고 때로는 그 이단들이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을 크게 위협하기까지 했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초세기 교회는 자신의 정통 신앙을 이단들로부터 수호하려 했음이 이미 2세기 문헌들에서 역력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다 자기 신앙의 정통성의 기준점을 둘 것인가? 그 기준점을 우리는 “사도적 권위”라고 부른다. 이것은 당시에 이단들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했던 각종 방안들, 즉 ‘사도적 계승’, ‘신약 성서 정경’, ‘신앙의 규범’, ‘신경’ 등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사도적 계승’이란 이단을 경계하면서 감독(오늘날의 주교)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사도와의 연쇄성을 가진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라 사도들은 참된 신앙의 보관자라 여겼고, 사도들의 후계자는 교회의 감독 제도의 참된 계승자라고 주장했으며, 이 사도적 계승자와 동질의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 이론은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신약 성서 정경’은 사도적 저술들을 수집한 것과 적어도 사도들의 동료나 혹은 제자들의 손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사도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이단 반박의 이론이다.
 
그렇지만 사도적 계승과 신약 성서 정경의 확립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교리가 사도적인지 아닌지 결정하기에 미흡했다. 사도적 계승은 연속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아주 가치 있는 규범이었지만, 올바른 교리가 무엇인지를 해석하는 것까지는 해결할 수 없었다. 한편 신약 성서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내용을 전부 담고는 있지만 너무 광범위하고 비조직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정통 교리가 무엇인지를 신속하면서도 조직적으로 정확하게 구별해 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신앙을 조직적으로 요약해 주는 규범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 규범’(Regula fidei)이었다.
 
‘신경’은 ‘신앙 규범’에 따라 간략하게 그리스도교의 신앙 내용의 핵심을 표현한 것으로, 원래는 신도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받아들인 신앙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여러 신경들은 각기 그 시대의 이단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에 이단을 반격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된 내용을 요약해서 담고 있는 것이 특정이다.
 
 
신경의 발전과 종류
 
1.세례 문답 형식의 로마 신경
 
이 신경은 신약 성경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로마 교회가 오늘날 사도 신경의 핵심이 되는 새로운 신앙 요약문을 만들어서 세례 때에 예비자들에게 물었던 일련의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진 신경이다. 신경의 골격은 3부로 이루어진 고대 로마 교회의 세례 형식에 맞춰 그 내용이 3부로 이뤄져 있다.
 
“당신은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하느님의 아들을 믿습니까? 그분은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시고(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셔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다가,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2. 고대 로마 신경
 
세례 문답 형식의 신경은 점차로 개작되면서 신앙의 확정과 근거로 사용되었고, 감독들은 이 신경(고대 로마 신경)에 따라 예비자들을 가르쳤다. 예비자들은 그 내용을 반드시 암기해야 했으며, 그 내용이 교리 교육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누설되지 않도록 비밀을 지켜야 했는데, 그 이유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비들을 신경이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마 신경이 만들어지기는 2세기 말엽인 듯하나, 신앙 고백문 형식으로 확정되어 사용된 것은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반으로 보고 있다.
 
“나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으며, 그 외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며, 그분은 성령과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셨으며, 사흘 만에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곳으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나이다.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
 
3.니케아 신경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된 신경이라 하여 ‘니케아 신경’이라 부른다. 이 신경은 세례 때 사용하던 신경의 내용을 보전하면서 당시에 심각하게 교회를 위협하던 ‘아리우스 이단설’(아리우스 이단설은 신경 후반부에 소개되고 단죄되어 있다.)에 반박하는 신앙 내용이 첨가되었다.
 
“나는 믿나이다. 한 분이신 전능 천주 성부,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성부께 나시고 성부의 실체로부터 유일하게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 천주로부터 나선 천주시요,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하나의 실체이시며, 천상과 지상의 만물이 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으며,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시기 위해 육이 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셨고, 산 이와 죽은 이즐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을 믿나이다. 그러나 그분이 안 계셨을 때가 있었다거나, 탄생하시기 전에는 안 계셨다거나, 그분은 무에서부터 오셨다고 말하는 이들과, 또 하느님의 아들은 다른 본질 혹은 실체를 가졌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화 혹은 변질에 지배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가톨릭 교회는 단죄를 선언하노라.”
 
4. 콘스탄티노플 신경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나오게 된 배경은,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가 니케아 신경을 전례문 형식으로 수정하고 당시에 제기된 신학 문제(성령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나는 믿나이다. 한 분이신 전능 천주 성부,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께 나선 천주의 외아들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요, 참 천주로부터 나선 참 천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 다 이분으로부터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음을 믿으며,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에게서 쫓아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광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5. 사도 신경
 
서방 교회에서는 예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위에서 소개한 ‘고대 로마 신경’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 신경의 표준문(Textus receptus)이 나오게 된 것은 7세기경으로 보며, 이 신경은 로마를 제외한 다른 서방 교회에서 먼저 사용되었다. 10세기말이나 11세기초까지 로마에선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사용하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3세(1216년)께서 바로 이 텍스트의 사도 신경을 서방 교회의 공식 신경으로 공인하셨다(사도 신경의 본문은 앞으로 우리가 해설해 나가야 할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에선 생략한다.) [경향잡지, 1993년 9월호]


[교리 해설] 나는 믿나이다 - 사도 신경 (2)
 
 
우리가 흔히 이웃들로부터 듣게 되는 이야기 가운데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신앙에 관한 내용이 많다. 때로는 불가사의한 신비의 내용도 많지만, 때로는 신앙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미신 행위라는 가혹한 비판의 말도 듣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성당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답해 버리는 이들도 있다. 믿기 위해선 얼마만큼 알아야 하는가? 신앙과 지성과 의지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교리 내용을 이해하고서 갖는 신앙과 무조건 믿는 맹신은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외에도 많은 의문점들을 신앙과 결부시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물음들에 하나하나 답하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일반적인 특징들을 몇 가지로 한정하여 실펴보는 것이 여기에선 더 바람직하리라 여겨진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
 
사도 신경을 흔히 Credo(크레도)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 사도신경의 첫 말마디가 Credo(“나는 믿나이다”)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 말을 따서 그렇게 부른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 단어는 Amen(아멘)인데, 구약성서의 허브리말 어원에서는 이 두 말마디가 같은 어원에 속하는 것으로, ‘견고하다 · 항구하다 · 신뢰하다’의 의미를 띠면서, 넓게는 사도신경의 윤곽을 이루고 있다. 이 두 말마디가 윤곽을 이루면서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 행위를 특정짓는 데 있다.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고백하는 그 신비의 내용 속으로 우리가 깊숙이 동참하여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며, 신앙은 이론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을 이루어야 함을 뜻한다.
 
 
1.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반적 윤곽
 
넓은 성서적 의미에서 신앙이란 인간이 하느님과 가지는 가본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이런 관계성에서 신앙을 가장 간략하게 고백하는 것을 보면, 구약에선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로, 신약에선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혹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로 표현한다. 신약성서에서 이러한 신앙 고백의 내용을 좀더 설명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믿는다는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제시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유추해본다면 구원 신앙의 대상 혹은 내용은 계시로써 밝혀진 하느님 자신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특히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행위이다.
 
또한 인간이 행위자로서 하는 신앙(신앙 주체)은 회개하고 베풀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는 계시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계시가 품고 있는 내용, 즉 구원 역사를 통하여 자신이 스스로 우리에게 접근해 오시는 바로 그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서 따라오는 그분께 대한 인간의 전적인 자기 응답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 5항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로마 16.26; 1,5; 2고린 10,5-6 참조)을 드러내야 한다. 이로써 인간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이 주선 계시에 자의로 찬동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자유로 의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2. 신앙 인식의 특징
 
과학 기술이 발달된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세뇌시키는 사고 방식은 불가시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하며, 학문의 근본 태도는 현상계와 파악될 수 있는 것에만 국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의 확대에 따라 과거의 인간들이 추구했던 존재의 본질에 관한 탐구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 그래서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실과 또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만을 참되다고 여긴다. 예를 든다면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기원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는 유전 공학을 이용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위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과학 기술은 진리를 추구하지만, 신앙은 그것에 반대되는 듯이 이해된다. 그러나 분명 신앙도 진리에 관계된다. 신앙이라 해서 결코 바이성적이고 맹목적인 행위가 아니다. 신앙 역시 이해와 통찰과 인식을 지향한다.
 
하지만 신앙은 사랑과 신뢰 안에서 인격적인 경험을 의미하는 인식이란 점에서 과학 기술 분야에서 가지는 진리 탐구와는 차이가 있다.
 
 
3. 신앙은 신뢰의 행위
 
분명 신앙의 분야는 자연 과학 분야와는 다른 세계를 추구한다. 믿음은 주어진 것을 초월하는 삶의 모험이며, 보이는 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미리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보장이 아니라, 신뢰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라 하겠다. 신앙은 단순히 교의의 명제들이나 신앙 조목들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이 그분으로부터 나오고 또 그분께로 향하는 그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우리의 신앙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이 없을 때 신학 명제들이나 신앙 조목들은 영혼이 없는 인간 육신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우리가 온몸으로 하는 “실제적 동의”이지 머리로서만 하는 “개념적 동의”가 아니라고 뉴만 추기경은 말한다.
 
인간 서로를 결속시켜 주는 믿음 안에서도 신뢰가 중요함을 우린 알고 있다. 나의 부모는 나의 부모였고 또 그것은 사실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나의 부모의 증언이 믿을 만하다고 신뢰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설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부모를 믿으며 또 나의 존재의 근원자로서, 나의 행복을 지켜 주시는 분으로 그들을 신뢰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은 우리를 위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한다. 알아듣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또 우리의 정신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믿는다.
 
 
4. 신앙은 행동을 수반한다
 
우리는 복음을 우리의 신조로써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로써 전파한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하루 종일 따라다닌다면, 그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의 믿음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선을 보호하며,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여긴다. 그들의 지식이 깊지 못하다 해도 그들은 훌륭히 신앙을 선포한다. 반대로 하느님에 관해서는 청산 유수처럼 말은 해도 자기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이는 입술 신앙에 불과하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하기를 시작하는 것을 수반한다. “만일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한 4,20). 우리가 말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선포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야고보 사도가 서간에서 말하는 바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좋은 일을 탄생시키며,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죽은 것이다. 일만으로 우리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일함으로 정당화한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우린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간다. 신경이 윤리 계명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믿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올바르게 알아듣는다면, 말 안에서 믿는다는 것은 또한 행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신앙은 인격적이다
 
Credo(“나는 믿는다”)라는 말의 어원을 “자신의 마음을 주다.”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찾는 신학자도 있다. 나의 마음을 준다는 것은 바로 신뢰이고 또 사랑이다. 신뢰하고 사랑하는 이런 신앙은 추리적 결론보다는 혼인 계약에 더 가깝다. 혼인 약속의 제의에 동의를 하는 응답이나 신앙의 제의에 동의를 하는 응답은 같다. 예를 들어 “나와 함께 혼인하겠소?” 하는 제의나 “나를 따르겠소?”라는 예수님의 제의는 같은 것이며, 이런 요청에 “아니오”라고 응답할 수 있는 길은 많지만,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다.
 
여기에서 본다면 믿는다는 것은 인격적임을 알 수 있다. 혼인 계약에 유비해 생각해 본다면, 한 인격체인 인간과 다른 한 인격체인 하느님의 만남이 곧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의 만남은 나의 인격을 온전히 ‘너’에게 맡기는 것에서 성립되므로, 참된 신앙이란 ‘너’에 대한 나의 온전한 자아 봉헌이라 하겠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께 전적으로 내맡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자기를 온전히 내어 주시는 그 하느님께 신앙을 통하여 기대지 않는다면, 그분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입증할 길이란 없다. 이를 위해 묵은 자신을 포기하고 새로운 만남을 향해 도약하는 행위가 요구된다.
 
 
6. 신앙의 종말적 특징
 
또한 혼인 약속의 특징이 일생을 두고 서약하듯이, 신앙도 ‘신뢰 - 지속성’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고 시작하는 히브리서 11장은 신앙의 모델이 되는 구약의 인물들을 소개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극한 한계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께 신뢰를 둠으로써 새로운 삶의 행진을 한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삶의 십자가 아래 정지해 버리는 신앙이 아니라 부활의 약속을 향해 방향을 잡는 종말적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러기에 나의 삶 안에서 끊임없는 탈출, 출애굽의 행진을 계속해야 한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이사 7,9).
 
하여튼 우린 믿기 위해 먼저 믿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물음을 던질 때 그 물음의 방향은 실제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존재 안에 하느님께서 부여해주신 물음에 응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우리 스스로가 결코 우리 자신의 존재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며, 우리는 하느님을 떠난 독립되고 완전한 절대적인 출발점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199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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