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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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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18 ㅣ No.13

[교리 해설]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성호 요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어린 시절 찰흙을 가져다 고사리 손으로 인형이나 동물을 만들곤 했다. 그때 그 인형이 제발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그 인형은 말은커녕 햇볕에 말라 몸에 금이 생겨 부서지는 가여움만 남겨 주었다.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희망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선포되고 있는데도 여러분 가운데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실상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1고린 15,12-14). 이러한 믿음의 현장은 바오로 사도가 활동하던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오래 살고 싶어하고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것이야 비슷하겠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정도는 예전보다 지금이 더한 듯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부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이해시킬 수가 있을까?
 
 
빈 무덤의 보고
 
성서는 한결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전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주는 성서의 말씀은 한 군데도 없다. 아마포로 염을 해서 돌무덤에 장사지낸 예수님의 시신이 부활하는 장면에 관한 묘사는 없다. 가장 먼저 보고하는 것은 시신을 묻었던 곳이 비어 있더라는 빈 무덤에 대한 얘기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그 여자들은 무덤에서 돌이 굴러나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주 예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루가 24,1-3).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사도들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 말들이 헛소리처럼 여겨져 믿지 않았다?”(루가 24,11).
 
요한 복음에 보면 여인들의 보고 내용이 다르다. “사람들이 무덤에서 주님을 빼돌렸습니다. 그분을 어디에다 옮겨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이러한 보고를 받은 두 제자(베드로와 요한)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간다. 무덤 안에서 염포와 머리를 덮었던 수건이 개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이러한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위에서 인용한 복음서의 말씀대로 ‘헛소리’라고 일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의 추종자들이 부활 신앙을 조작하기 위해 시신을 다른 곳으로 남몰래 치웠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두 제자가 무덤에 가서 현장 검증을 하였다 해도 예수의 시신이 부활했다는 단서는 찾지 못하지 않았는가. 염포가 개켜져 있었다 해도 이는 다른 추종자들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부활을 확인시켜 주려는 빈 무덤 얘기는 우리에게 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빈 무덤 얘기에서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는 없다. 도대체 예수님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예수님의 발현
 
“예수님의 시신은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에, 예수님의 시신은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바로 여기 이렇게 있노라.”고 해답을 제시하는 복음서의 부분이 ‘발현’에 관한 대목이다.
 
“그들이 그런 말(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을 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그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질겁하여 겁먹은 나머지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시오. 바로 나입니다. 나를 만지고 살펴보시오.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습니다.’ …… ‘여기에 무엇 좀 먹을 것이 있습니까? 하고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래서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더니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가 24,36-43).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그 모여 있던 곳의 문들을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시어 한가운데 서서 ‘여러분에게 평화!’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한 20,19-20).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그는 ‘내가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눈으로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한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20,24-25).
 
복음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리의 관심사는 “그분의 시체는 어디로 증발했단 말인가?”이다. 그러한 물음에 “여기 있소.”라고 답하는 것이 발현이다. 그 다음 생각해야 할 것은 제자들이 문들을 잠가 놓고 겁에 질려 방에 숨어 있었는데 느닷없이 방안에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전하신다. 놀란 토끼 새끼 모양 제자들의 간은 아마도 콩알만해졌을 것이다. 방문이 잠겨 있는데 들어왔으니 말이다. 우리에게 그런 일이 만일 일어난다면 졸도하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육체를 지닌 인간이 문이 잠겨 있는 방안에 어찌 들어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 다음엔 자연히 “그렇다면 유령인가?” 하는 의혹이 생기게 마련이다. 도깨비나 귀신이 아니냐는 물음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상흔을 보여주고 못 믿겠거든 만져 보라고 하신다. 이렇게 살과 뼈를 가지고 있는데 유령이란 말인가. 게다가 음식을 잡수시면서 당신이 부활하신 분이심을 확인시켜 준다.
 
이런 대목들이 분명히 중요한 ‘그 무엇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낀다. 언뜻 보아 부활에 대한 상세한 보고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빈 무덤과 발현 내용이 복음서마다 다르다. 상당한 차이점을 발견하였으면서도 왜 초대 교회는 수정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가? 하나의 역사 사실은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혹시 같은 부활 사건을 놓고 이렇게 복음서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는 거기에 부활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들어 있지 않은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부활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회당장이었던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일(마태 9,18 이하; 루가 8,49 이하)과, 나인이라는 고을의 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일(루가 7,11 이하), 라자로의 소생(요한 11)에 관한 기적 이야기를 전한다. 이들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은 죽음 이전의 생명, 즉 언젠가는 또다시 죽어야 하는 생명이었다. 영원한 생명이 아닌 죽음의 운명에 부쳐진 생명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러한 소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 부활에 관해 복음서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이 시체 소생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부활 사건 자체를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고, 어느 복음도 그것을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부활의 사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적인 것에 속하지 않는다. 생물학 연구 분야에 속하는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의 영원성 안에 일어난 사건이라 어떤 지상적인 비유나 설명도 부활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신약성서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부활은 바로 이러한 새 삶을 열어 주는 새 시대의 삶으로서, 이 지상의 생물학적인 생명을 초월하는 생명임을 말해 준다.
 
그렇지만 부활을 희망하고 부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하느님의 몸 안에 들어간 이들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그렇다면 비록 예수님의 부활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는 사건이라 해도, 복음서가 우리 인간에게 부활을 전하기 위해선 인간의 경험 세계에 속하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결국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다는 사실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새로운 차원, 즉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셨다는 믿음이다.
 
죽으시고 묻히시고 고성소에 내려가심으로 한 인간으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갱도의 막장까지 내려가신 분, 참인간이셨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마다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받아들이신 그분이셨다. 인간으로서 끝까지 내려가셨던 그분은 이제 참하느님으로서 영광스레 부활하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새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며,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켜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실 때 십자가의 상흔을 보여 주셨다. 이는 그분이 비록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속하신 분이시지만, 이 지상의 것을 포기하신 분이 아니시라 이젠 부활로써 이룩하신 새로운 세계와 관계를 맺어 주신다. 그럼으로써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새로운 관계에 참여하게 된다. 이 새로운 관계는 바로 죄의 죽음에 대한 승리이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 부활하신 그분의 새 생명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은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엄청난 일을 감당해 내기엔 우리 인간의 그릇이 너무나 초라한가 보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겪는 인간 경험의 상황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뿐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루가 복음 24장 13절 이하를 잘 묵상해 보자. 평소에 예수님을 믿고 추종하던 두 제자였지만, 자기들과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왜일까? 그 두 제자는 아직도 자신들의 논리에 철저히 갇혀 있었고,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새 세상에 들어가신 그분을 고정된 헌 세상의 사고 방식으로 어찌 이해할 수가 있었겠는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결국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을 때였다. 성서의 말씀을 설명해 주셨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셨을 때 그들은 주님을 알아 보았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신앙이란 그 자체가 이 세상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이 세상을 무시하고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뛰어넘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은총 속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그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활의 이해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경향잡지, 199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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