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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과 성 프란치스코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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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4-06 ㅣ No.88

프란치스코 교황과 성 프란치스코 영성

풍요롭지만 가난한 오늘, 그 해답의 영성



아시시 성 클라라대성당에 걸려 있는 산 다미아노 십자가. 성 프란치스코는 원래 산 다미아노 성당에 걸려 있떤 이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

사람들은 새 교황 이름을 듣는 순간 16세기 아시아 선교의 개척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떠올렸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새 교황과 같은 예수회 출신인데다 그리스도교 선교역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콘클라베에서 일이 좀 위험스럽게 돌아가자(선출이 유력시되자) 옆자리에 있던 후메스 추기경이 나를 껴안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고 말했다.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니 곧바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떠올랐다."(3월 16일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때부터 검소한 생활과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히 마음을 썼던 교황의 과거 행적이 성 프란치스코(1181~1226)의 생애와 겹쳐졌다.


프란치스코 회심, 가장 큰 승리

성 프란치스코는 '제2의 그리스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하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찬미하는 등 모든 게 그리스도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나환우와의 만남에서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 아들로 성장한 그는 여느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그도 부와 명예를 좇고, 나환우병원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역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고 코를 막았다. 그런 그가 어느날 주님 음성을 들었다.

"네가 나의 뜻을 알려면, 지금까지 육적으로 사랑하고 탐하던 것들을 경멸하고 미워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지금까지 피했던 것들은 모두 달고 넘치는 기쁨이 될 것이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나환우와 마주쳤을 때, 그 나환우의 손에 입을 맞추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악취가 단맛과 행복이 되어 그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었다. 20세기 덴마크 문인 요하네스 예르겐센은 저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서 그의 회심에 이런 의미를 부여했다.

"(악취가 단맛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승리 중에서 가장 큰 승리다. 자신을 이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 자신의 노예인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어 다 허물어져 가는 산 다미아노성당에서 또 한번 주님 음성을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다시 세워라. 나의 집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

그는 아버지 재산을 내다 팔아 여러 성당에 건물 보수비로 희사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돈이 떨어지자 아버지 상점에서 옷감 두루마리를 실어다 팔기도 했다. 그러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이 건물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와 동네 주민들 앞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된 유명한 사건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저는 이제부터 나의 아버지는 더 이상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임을 선언합니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 저의 아버지였던 분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 이제 저는 빈 몸으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탁발을 하며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특히 가난을 복음생활의 본질로 보았다. 그래서 수도공동체가 커졌음에도 수도원과 성당을 짓지 않았다. 아시시 포르치운쿨라(작은 몫이라는 뜻) 경당 옆에 나뭇가지를 엮어 움막을 짓고나서 "이게 프란치스칸 집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성 프란치스코 영성을 따르는 작은형제회는 이 경당을 겸손과 가난의 표징으로 지금까지 고이 보존하고 있다.


현대교회 '수리 요청' 기대 쏟아져

교회 역사에서 12세기 탁발 수도회 등장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되는 획기적 사건이다. 독일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인 부르카르트가 "이때, 세계는 늙어갔다. 두 개 교단(작은형제회와 성 도미니코회)이 교회 안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들은 독수리처럼 날쌔게 교회의 젊음을 되찾아 주었다"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프란치스코 이전까지 수도자들은 성 베네딕도 규칙에 따라 수도원에 정주(定住)하며 종교적 이상을 추구했다. 그러는 사이에 세속의 유혹에 빠져들면서 부끄러운 추문의 행태를 보였다. 이 때문에 카타리파와 왈도파 같은 민간신앙운동 조직이 일어나 제도권 교회를 위협했다. 이들은 신앙의 순수성과 가난한 교회를 외쳤다. 교회는 이단 종파들의 위협과 도시 발달로 인한 급격한 세속화로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지처럼 탁발하며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선 작은형제회와 성 도미니코회 같은 수도회가 쇄신의 물꼬를 튼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유일한 영적 무기는 '가난한 삶'이었다.

세계인들이 새 교황의 이름을 듣고 환호하고, 교회 안팎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해달라는 기대가 쏟아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교황에게 쏟아진 기대 중에는 세속주의에 흔들리면서 영적 활기를 잃어가는 교회에 대한 '수리 요청'도 적지 않다. 또 가난의 영성은 과도한 소비문화와 물질만능주의에 둘러싸여 있는 신앙인들과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영성 가운데 세상을 향한 개방적 태도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는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마태 19,21; 루카 9,3)는 말씀대로 형제들을 둘씩 짝지어 세상으로 내보냈다.

교황 자신은 이미 이같은 개방적 자세로 살아왔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장 시절, 교구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보낸 사순시기 편지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늘 성당 문을 열어두십시오. 이것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십시오. 말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활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평화신문, 2013년 4월 7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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