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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르 14,1―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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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3-25 ㅣ No.9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르 14,1―15,47)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사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고 한다. (필리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마르 11,1-10)
예수님과 제자들이 1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2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3 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는 거요?’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4 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 5 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6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
7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8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9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10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마르코가 전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이다. (마르 14,1―15,47)
 1  파스카와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2 그러면서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축제 기간에는 안 된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4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5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6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7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1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기려고 그들을 찾아갔다.
11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13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17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셨다.
18 그들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19  그러자 제자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묻기 시작하였다.  “저는 아니겠지요?”
2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다.
21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2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28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29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30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1  베드로가 더욱 힘주어 장담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32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그런 다음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34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35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36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38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39  예수님께서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40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41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아직도 자고 있느냐 ? 아직도 쉬고 있느냐 ?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2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43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44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45 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말하였다.  “스승님!”  그러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
46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47 그때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48 예수님께서 나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50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51 어떤 젊은이가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52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53 그들은 예수님을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두 모여 왔다.
54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55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증언을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56 사실 많은 사람이 그분께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그 증언들이 서로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57 더러는 나서서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58  “우리는 저자가, ‘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59  그들의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60 그러자 대사제가 한가운데로 나서서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6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62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63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64 여러분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다.
65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 다음, 주먹으로 치면서 놀려 대기 시작하였다.  “알아맞혀 보아라.”  시종들도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
66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사제의 하녀 하나가 와서,
67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그를 찬찬히 살피면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
68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  베드로가 바깥뜰로 나가자 닭이 울었다.
69 그 하녀가 베드로를 보면서 곁에 서 있는 이들에게 다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은 그들과 한패예요.”
70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71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말하였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72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다.
15,1 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 끝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2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3  그러자 수석 사제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소하였다.
4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보시오, 저들이 당신을 갖가지로 고소하고 있지 않소?”
5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6 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곤 하였다.
7 마침 바라빠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8 그래서 군중은 올라가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9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10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1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빌라도가 다시 군중에게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13 그러자 군중은 거듭 소리 질렀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14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15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16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17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이렇게 말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18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19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20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21 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22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이다.
23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4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
25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6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27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28)·29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분을 이렇게 모독하였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30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31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32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33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34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이는 번역하면, ‘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35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36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말하였다.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39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40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41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42 이미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으므로,
43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44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벌써 돌아가셨을까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인대장을 불러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느냐고 물었다.
45 빌라도는 백인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요셉에게 시신을 내주었다.
46 요셉은 아마포를 사 가지고 와서, 그분의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47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이사50,4-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6)

 

본절은 주님의 종이 당할 극심한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는 사실을 예언한다. 

그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로 견뎌낸 것은 그 고통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통이요 그 고통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의(義)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인 52장 13절~53장 12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예언되며 그 고난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아픔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굴욕과 치욕감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고난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옷을 벗긴 상태에서 채찍으로 과격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인격을 철저히 무시하는 너무나도 크나큰 굴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신명25,9; 2사무10,4; 느헤 13,25; 예례7,29; 마태26,67; 요한18,22).

그러나 주님의 종은 그 고난을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성취하는 통로로 여기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를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본문에서 '나를 매질하는 자들에게' 해당하는 '레막킴'(lemakim)원형 '나카'(nakah)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53장 4절에서는 그가 맞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께 맞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예언된다. 그러나 그는 무죄하면서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등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실로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의 모진 채찍질을 묵묵히 참음으로써이 예언을 성취하였다(마태26,27; 27,26; 요한19,1).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암몬 임금 하눈은 그의 죽은 아버지께 조의를 표하고자 온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며 턱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린 일이 있었다(2사무10,4). 이것은 극심한 모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 신하들은 다윗의 지시에 따라 턱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예리코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것 즉 장식용이 아니라 남성의 인격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깎는다든지 뽑아 버리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깔아 뭉개버린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형벌(느헤13,25)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치욕적인 일,이처럼 무고한 모독과 형벌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즉 자기 턱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뺨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는 가르침(마태5,39)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모욕'으로 번역된 '켈림무트'(kelimmuth)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통해 주님의 종이 느끼는 인격적 상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26,67).

또한 '수모' 번역된 '로크'(loq)는 구약에서 본문과 욥기 30장 10절 두 곳에서만 사용된 매우 희소한 단어인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침뱉음 뜻하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한다는 것은 턱수염이 뽑히는 것보다 더 드문 일이고 더 굴욕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은 그 굴욕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얼굴을 가리우지 않았다.이것은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7)

앞의 50장 4~6절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주님의 종의 고난과 고난을 받는 중에도 전적으로 참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다. 이제 50장 5~9절 까지는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종이 승리할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노래한다.

먼저 본절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자기를 종으로 세우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을 돕는다는 확신과 그 하느님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 것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극심한 수치와 모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은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감당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절은 원문상 접속사 '와우'(wau; because, for 혹은 but)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앞절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주님의 종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자기 혼자 당하는 것도 아니며, 그 고난 때문에 자신이 절망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본절을 와우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진정한 배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해 주시는 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도와 주시니' 해당하는 '야아자르'(yaazar)의 원형'아자르'(azar)4절에서 주님의 종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하다. 주님의 종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올바른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 하느님을 통해 고난의 때에 도움을 받는다.

여기서 '아자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종의 사명 전반을 지지하며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이에 이어지는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구절은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al ken; therefore)이란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신 결과, 그가 수치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를 앎으로써 고난과 모욕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본문 역시 앞 문장과 같이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시는 결과, 주님의 종이 자기 얼굴을 차돌같이 굳게 한다는 것 나타낸다. 

 

'만든다'에 해당하는 '사므티'(samthi)'두다','되게 하다'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숨'(sum)능동 완료형 1인칭 단수로서 본문의 행동의 주체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는 것이다. 

'차돌'로 번역된 '할라미쉬'(hallamysh; flint)'아주 단단한 물건', '단단한 돌','부싯돌','바위'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매우 단단한 돌 말한다(신명8,15; 시편114,8). 따라서 본문은 낯이 매우 두꺼운 것을 의미한다.

우리 말에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낯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종이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치욕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처지를 전혀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이런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본문은 이중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는 주님의 종이 그런 치욕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결단코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그가 비록 죄인들이 당하는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마지막 날에는 결코 심판에 처해지지 않고, 자신이 의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을 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수치를 당하다' 의미로 번역된 '에보쉬'(ebosh; shall be ashamed)의 중의성 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형'뽀쉬'(bosh)는 수치를 느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창세2,25) 최후 심판에서 단죄되어 치욕스런 상태로 떨어진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창세45,16).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고소를 당해 수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마태26,65). 그러나 그들이 단죄한 그 신성 모독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요한1,1-3; 필리2,6)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단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위치로 끌어 올려 주셨다(필리2,10). 이 사실이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확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마르14,1~15.47)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36)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부르시는 호칭이 '아빠! 아버지' 이다. '아빠'로 음역된 '압바'(Abba)'아버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브'(ab)에서 유래한 아람어이며, 특히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던 단어이다.

유대인들은 불경스럽게 생각되어 하느님을 '압바'로 부르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마태3,17) 그분을 '압바'로 자연스럽게 부르실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친근하게 '압바'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로마8,15; 갈라4,6). 

마태오 복음사가'압바'라는 친근한 용어를 하느님께 대하여 사용하지 않았던 유대의 배경 아래있는 독자들에게 복음서를 써 보냈기 때문에 '압바' 대신에 보다 중후한 용어인 '파테르'(pater)를 기록했을 것이고(마태26,39),  

루카 복음사가는 희랍의 배경 아래 있는 독자들에게 복음서를 써보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태오와 동일하게 '아버지'를 뜻하는 순수한 희랍어 '파테르'(pater)만 기록했을 것이다(루카22,42).

 

한편, '이 잔'에 해당하는 '토 포테리온 투토'(to poterion touto; this cup)하느님의 선성(善性)에 누를 끼치고 성성(聖性)을 모독하며 공의(公義)를 거스르는 죄를 지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인류에게 내려지는 진노의 잔이며, 그러기에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위격의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풀어 드리고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을 말한다.

그리고 '거두어 주십시오'로 번역된 '파레넹케'(parenengke; take away)'가지고 가 버리다', '지나가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 '파라페로'(paraphero)명령형이다.

기도문 중에 사용된 동사가 명령어이므로 그 잔을 옮길 수 있는 권한이 기도의 대상이신 하느님 아버지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고백하고 있음 알 수 있다.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나약한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 인성(人性)으로는 십자가상 죽음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는 그 의로운 분노(진노)의 잔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애걸하듯 간청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이 간절한 간구에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십자가의 고통스럽고도 비참한 죽음만을 피하고 싶었던 예수님의 인간적 바람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원문에는 '그러나'에 해당하는 접속사 '알라'(alla; but)두 번 쓰였는데,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당신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 자세를 효과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으며, 더군다나  두 번이나 쓰임으로써 예수님의 순종적 자세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당신 지상 생애 동안 단 한번도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는 예수님께서는 (요한7,16.28; 10,37.38) 마지막 십자가 앞에서 극심한 심적 고통과 갈등 가운데 흔들렸지만, 비참한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 본능을 이겨내고 겸허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것을 결심하고 계시는 것이다(마태16,24; 필리2,8; 에페2,1.3; 로마5,10; 로마8,14.16참조).



[주님 수난 성지 주일]호산나!(마르 11,1-10)  

 

<예수님을 따르는 길, 십자가의 길>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7-10)”


‘호산나’ 라는 말은 원래는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 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단순히 “만세!” 정도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아놓은 것은,

예수님을 세속의 왕들과 같은 왕으로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겉옷이나 나뭇가지를 길에 깔아놓는 일은

원래는 왕의 즉위식 때 왕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속의 왕국과 같은 당신의 왕국을 세우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이 기도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즉 그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가 지상의 나라들과는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세속에서의 높은 자리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30).”


2) 영원한 생명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만 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그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28-30).”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잘 따라간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 12,7)”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히브 12,11).”

이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일부러 고생시키신다는 뜻은 아니고,

어떤 시련을 만났을 때 그것을 훈련으로 여기고 인내하라는 격려입니다.


베드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5-7).”


하느님은 우리가 시련과 고난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고,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잘 견디어 낼 것이고, 믿음이 없다면 바로 꺾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이 결코 편하고 쉬운 길은 아니지만,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고, 함께하시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3) 과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얻게 될 생명과 구원은

그 힘든 과정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로 대단히 큰 은총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0-22).”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고난은 잠깐이고, 기쁨은 영원합니다.


십자가에서 부활과 생명을 보지 못하고 ‘죽음’만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생을 마치신 분이 아니라,

(그것으로 그냥 그렇게 끝나버린 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부활, 생명, 구원을 향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중간 과정일 뿐입니다.

남들보다 자기의 십자가가 더 크고 무거운 것 같아서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더 큰 십자가에는 더 큰 은총이 함께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결과를 보면, 불공평한 십자가는 없다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나뭇가지는,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나뭇가지를 들고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이 노래는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받들어 모시는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에 회개와 자선의 행위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군중은 자기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고 나귀를 타신 구세주를 환영하였지만,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구세주의 참모습은 십자가의 형벌을 받는 가운데 드러납니다. 구세주께서 매 맞으시며 모욕과 창피를 당하실 때 그분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마음의 공포와 번민이 너무 커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던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고백합니다. 기쁨과 수난이 겹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파스카 신비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주간과 파스카 성삼일 동안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합니다. 백인대장처럼 구세주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고백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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