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르 14,1―1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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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르 14,1―15,47)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사 50,4-7)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고 한다. (필리 2,6-11) 예수님과 제자들이 1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2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8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마르코가 전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이다. (마르 14,1―15,47) 52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2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7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이렇게 말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이사50,4-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6)
본절은 주님의 종이 당할 극심한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는 사실을 예언한다. 그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로 견뎌낸 것은 그 고통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통이요 그 고통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의(義)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인 52장 13절~53장 12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예언되며 그 고난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아픔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굴욕과 치욕감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고난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옷을 벗긴 상태에서 채찍으로 과격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인격을 철저히 무시하는 너무나도 크나큰 굴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신명25,9; 2사무10,4; 느헤 13,25; 예례7,29; 마태26,67; 요한18,22). 그러나 주님의 종은 그 고난을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성취하는 통로로 여기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를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본문에서 '나를 매질하는 자들에게'에 해당하는 '레막킴'(lemakim)의 원형 '나카'(nakah)는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53장 4절에서는 그가 맞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께 맞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예언된다. 그러나 그는 무죄하면서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등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실로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의 모진 채찍질을 묵묵히 참음으로써이 예언을 성취하였다(마태26,27; 27,26; 요한19,1).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암몬 임금 하눈은 그의 죽은 아버지께 조의를 표하고자 온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며 턱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린 일이 있었다(2사무10,4). 이것은 극심한 모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 신하들은 다윗의 지시에 따라 턱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예리코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것 즉 장식용이 아니라 남성의 인격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깎는다든지 뽑아 버리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깔아 뭉개버린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형벌(느헤13,25)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치욕적인 일,이처럼 무고한 모독과 형벌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즉 자기 턱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뺨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는 가르침(마태5,39)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모욕'으로 번역된 '켈림무트'(kelimmuth)는 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통해 주님의 종이 느끼는 인격적 상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26,67). 또한 '수모'로 번역된 '로크'(loq)는 구약에서 본문과 욥기 30장 10절 두 곳에서만 사용된 매우 희소한 단어인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침뱉음을 뜻하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한다는 것은 턱수염이 뽑히는 것보다 더 드문 일이고 더 굴욕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은 그 굴욕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얼굴을 가리우지 않았다.이것은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7) 앞의 50장 4~6절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주님의 종의 고난과 고난을 받는 중에도 전적으로 참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다. 이제 50장 5~9절 까지는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종이 승리할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노래한다. 먼저 본절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자기를 종으로 세우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을 돕는다는 확신과 그 하느님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 것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극심한 수치와 모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은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감당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절은 원문상 접속사 '와우'(wau; because, for 혹은 but)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앞절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주님의 종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자기 혼자 당하는 것도 아니며, 그 고난 때문에 자신이 절망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본절을 와우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진정한 배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해 주시는 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도와 주시니'에 해당하는 '야아자르'(yaazar)의 원형'아자르'(azar)는 4절에서 주님의 종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하다. 주님의 종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올바른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 하느님을 통해 고난의 때에 도움을 받는다. 여기서 '아자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종의 사명 전반을 지지하며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이에 이어지는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구절은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al ken; therefore)이란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신 결과, 그가 수치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를 앎으로써 고난과 모욕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본문 역시 앞 문장과 같이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시는 결과, 주님의 종이 자기 얼굴을 차돌같이 굳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든다'에 해당하는 '사므티'(samthi)는 '두다','되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숨'(sum)의 능동 완료형 1인칭 단수로서 본문의 행동의 주체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는 것이다. '차돌'로 번역된 '할라미쉬'(hallamysh; flint)는 '아주 단단한 물건', '단단한 돌','부싯돌','바위'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매우 단단한 돌을 말한다(신명8,15; 시편114,8). 따라서 본문은 낯이 매우 두꺼운 것을 의미한다. 우리 말에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낯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종이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치욕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처지를 전혀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이런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본문은 이중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는 주님의 종이 그런 치욕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결단코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그가 비록 죄인들이 당하는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마지막 날에는 결코 심판에 처해지지 않고, 자신이 의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을 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수치를 당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보쉬'(ebosh; shall be ashamed)의 중의성 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형'뽀쉬'(bosh)는 수치를 느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창세2,25) 최후 심판에서 단죄되어 치욕스런 상태로 떨어진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창세45,16).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고소를 당해 수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마태26,65). 그러나 그들이 단죄한 그 신성 모독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요한1,1-3; 필리2,6)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단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위치로 끌어 올려 주셨다(필리2,10). 이 사실이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확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마르14,1~15.47)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36)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부르시는 호칭이 '아빠! 아버지' 이다. '아빠'로 음역된 '압바'(Abba)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브'(ab)에서 유래한 아람어이며, 특히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던 단어이다. 유대인들은 불경스럽게 생각되어 하느님을 '압바'로 부르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마태3,17) 그분을 '압바'로 자연스럽게 부르실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친근하게 '압바'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로마8,15; 갈라4,6). 마태오 복음사가는 '압바'라는 친근한 용어를 하느님께 대하여 사용하지 않았던 유대의 배경 아래있는 독자들에게 복음서를 써 보냈기 때문에 '압바' 대신에 보다 중후한 용어인 '파테르'(pater)를 기록했을 것이고(마태26,39), 루카 복음사가는 희랍의 배경 아래 있는 독자들에게 복음서를 써보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태오와 동일하게 '아버지'를 뜻하는 순수한 희랍어 '파테르'(pater)만 기록했을 것이다(루카22,42).
한편, '이 잔'에 해당하는 '토 포테리온 투토'(to poterion touto; this cup)는 하느님의 선성(善性)에 누를 끼치고 성성(聖性)을 모독하며 공의(公義)를 거스르는 죄를 지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인류에게 내려지는 진노의 잔이며, 그러기에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위격의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풀어 드리고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을 말한다. 그리고 '거두어 주십시오'로 번역된 '파레넹케'(parenengke; take away)는 '가지고 가 버리다', '지나가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 '파라페로'(paraphero)의 명령형이다. 기도문 중에 사용된 동사가 명령어이므로 그 잔을 옮길 수 있는 권한이 기도의 대상이신 하느님 아버지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나약한 인성(人性)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 인성(人性)으로는 십자가상 죽음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는 그 의로운 분노(진노)의 잔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애걸하듯 간청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이 간절한 간구에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십자가의 고통스럽고도 비참한 죽음만을 피하고 싶었던 예수님의 인간적 바람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원문에는 '그러나'에 해당하는 접속사 '알라'(alla; but)가 두 번 쓰였는데,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당신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 자세를 효과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으며, 더군다나 두 번이나 쓰임으로써 예수님의 순종적 자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당신 지상 생애 동안 단 한번도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는 예수님께서는 (요한7,16.28; 10,37.38) 마지막 십자가 앞에서 극심한 심적 고통과 갈등 가운데 흔들렸지만, 비참한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 본능을 이겨내고 겸허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것을 결심하고 계시는 것이다(마태16,24; 필리2,8; 에페2,1.3; 로마5,10; 로마8,14.16참조). [주님 수난 성지 주일]호산나!(마르 11,1-10)
<예수님을 따르는 길, 십자가의 길> “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 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르 11,7-10)” ‘호산나’ 라는 말은 원래는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 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단순히 “만세!” 정도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아놓은 것은, 예수님을 세속의 왕들과 같은 왕으로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겉옷이나 나뭇가지를 길에 깔아놓는 일은 원래는 왕의 즉위식 때 왕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속의 왕국과 같은 당신의 왕국을 세우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이 기도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는, 즉 그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가 지상의 나라들과는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세속에서의 높은 자리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30).” 2) 영원한 생명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만 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그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28-30).” 고난과 시련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잘 따라간 사람만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 12,7)”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히브 12,11).” 이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일부러 고생시키신다는 뜻은 아니고, 어떤 시련을 만났을 때 그것을 훈련으로 여기고 인내하라는 격려입니다. 베드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5-7).” 하느님은 우리가 시련과 고난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고,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잘 견디어 낼 것이고, 믿음이 없다면 바로 꺾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이 결코 편하고 쉬운 길은 아니지만,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고, 함께하시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3) 과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얻게 될 생명과 구원은 그 힘든 과정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로 대단히 큰 은총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0-22).”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고난은 잠깐이고, 기쁨은 영원합니다. 십자가에서 부활과 생명을 보지 못하고 ‘죽음’만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생을 마치신 분이 아니라, (그것으로 그냥 그렇게 끝나버린 분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부활, 생명, 구원을 향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중간 과정일 뿐입니다. 남들보다 자기의 십자가가 더 크고 무거운 것 같아서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더 큰 십자가에는 더 큰 은총이 함께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결과를 보면, 불공평한 십자가는 없다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나뭇가지는, 파스카의 신비를 완성하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나뭇가지를 들고 노래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