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4주일] 예언자 (마르 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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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일] 예언자 (마르 6,1-6)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그를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셨다고 한다. (에제 2,2-5)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힘이 그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기쁘게 그의 약점을 자랑한다고 한다. (2코린12,7ㄴ-10)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마르 6,1-6)
연중 제14주일 복음(마르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4)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자주 사용했던 격언으로 보이는 말씀으로서 그들이 당신을 배척한 이유를 밝히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친숙한 사람에게서 특별한 것이 발견되면 잘 수용하지 않는다는 격언을 통해 당시 나자렛 사람들의 닫혀진 마음을 질타하셨다. 여기서 '예언자'로 번역된 '프로페테스'(prophetes; a prophet)는 '앞에'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pro)와 '보여 주다',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페미'(phemi)의 합성어로서 '앞에서 말하는 자', '미리 말하는 자'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문으로는 '미리 예'(豫)자가 아니고 '맡길 예'(預)자를 사용한다. 하느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한다. 그러니까 예언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미래의 일을 미리 앞당겨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자신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자신들의 잘못과 죄를 들추어내고 비판하는 등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데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강한 거부 반응을 나타냈던 것이다. 여기서 '존경받지 못한다'로 번역된 '아티모스'(atimos; without honor)는 부정 접두어 '아'(a)와 '위엄', '존경'을 뜻하는 '티메'(time)의 합성어로서 '덜 귀하게 여기는'이라는 뜻 뿐만 아니라 '비천한'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표현은 단지 존경받지 못하는 소극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고향 사람들로부터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취급받음을 의미한다.
마르코 복음 6장 4절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친숙한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지 않으신다. 마르코 복음 6장 5절은 구원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불신하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일어날 수 없음을 계시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 6장 6절의 '믿지 않는 것'으로 번역된 '아피스티안'(apistian; unbelif; lack of faith)의 원형 '아피스티아'(apistia)는 부정 접두어 '아'(a)와 '믿을 만한', '신실한'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 '피스토스'(pistos)의 합성어로서 '불신앙', '불충실', '불성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믿지 않는 것'의 의미는 단지 온전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대한 충실과 성실함이 결핍된 것까지를 포함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반응에 대해 놀라셨는데, 여기서 '놀라셨다'로 번역된 '에타우마젠'(ethaumazen; he was amazed at; he marvelled)의 원형 '타우마조'(thaumazo)는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여 당황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일반적인 기대치하고는 다른 반응을 보임에 대한 심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그의 공생활을 통해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온갖 멸시와 모욕을 당하시고, 결국 동족의 고발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몸 안에 가시를 안고 그 고통을 없애 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한 바오로 사도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누구나 자신을 괴롭히는 약점과 남에게 보이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단점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이 오히려 자만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믿었기에,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숙명처럼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셨듯이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숙명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언자 자신은 반대받는 표적이 될지언정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에제키엘 예언자는, 어떤 처지에서든 이스라엘의 회개를 선포하는 소명을 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일수록 현실을 비판하고 되돌아볼 것을 외치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피하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좋겠습니다. 겸손하게 나를 낮추면 오히려 하느님께서 나의 약함을 통해 나를 성장시켜 주시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