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촌동성당 게시판

성사 후 : 사는게 다 죄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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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영 [mela1004] 쪽지 캡슐

1999-12-19 ㅣ No.219

제가 가끔 들춰보는 어떤 신부님이 쓰신 책 중에 이런 일화가 들어있어요.

제가 가끔 들춰보는 어떤 신부님이 쓰신 책 중에 이런 일화가 들어있어요.

신부님께서 고해 성사를 주시는데, 고해소에 한 할머니가 들어오셔서는

고백은 안 하시고, 신부님 수단 밑으로 원비인가를 밀어주셨대요.

놀라신 신부님께서 고백을 재촉하시자, 그 할머니께서는 그냥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사는게 뭐 다 죄지, 알아서 주셔!"

 

어제, 아니 이제는 그제가 되었군요,..

고해소에서 제 고해를 들으시다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꾸 생각나네요.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말을 듣고 고백소를 나오는데 문득 그 할머니의 말씀이 떠오르더라구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인 까닭에서 그러는 건지,

알면서 또 모르면서 죄를 지어버린 내 모습을 만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좀 더 새로운 사람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매 번 그 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여간하지 않으면 정말 산다는 거 자체가

죄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할머니의 나이가 아닌 지금 저에게 드는 건 알면서도 죄지은 저에 대한 자괴감 같은 거 때문이겠죠...

 

지금 전 생각합니다.

고해소 안에서 전 제가 만났어야 했던 일상에서의 "사랑이신 주님"

만난거라구요.

제가 제 안에 있는 자신을 만나는 중에 들은

"주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말은

어쩌면 이미 저를 용서하고 계신,

아니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그 죄를 아시고

그 죄와 함께 있는 저를 용서해 주시고,

심지어 그 죄 안에서까지 저와 함께 해주셨을

그 분을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한

깨우침의 말씀으로 다가왔다고나 할까요....

이처럼 죄 많은 제 옆에 제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도

함께 있어주시기에,

그래도 제가 오늘을 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거든요.

 

오늘 중고등부 교사회를 하면서 썼던 교안을 펼쳐보았습니다.

작년 순교자 성월 즈음인가

"언제나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시는 주님과 나의 사랑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났거든요...

거기에는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 적혀 있더라구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싶다

혼자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나는 불완전한 외눈박이 물고기일거예요.

불완전한 외눈박이 물고기인 내가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보기 위해선

내 옆에 빈 외눈박이 물고기의 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외눈박이 물고기가 필요한 그런 존재 말이예요.

그 자리의 주인은 부모님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때로는 또 다른 나일 수도...

그리고 나 아닌 이세상의 모든 사람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런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순간,

슬프지만 이 세상에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

그리고 때로 나 자신도 싫어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까지도

나와 같이 있어주시는 분은 그 분이시겠죠.

그 분을 받아들이고,

그 분과 늘 함께 할 자신의 자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바라면서,

그 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하기를 바라면서

학생들 앞에서 서 있었던 것 같은데....

부끄럽고, 쓸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성사를 보고 나서, 그 교안을 덮고나서 더욱

부끄럽고, 쓸쓸하다는 느낌을 떨추지 못하고 있는 건

저와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 주실 분이

그 분임을 알면서도, 얘기하면서도

그 죄를 짓는 동안까지도 함께 해 주셨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래서 제 자신이 혼자였음을 제 자신에게 들켰다는 것 때문이겠죠...

아니, 혼자 있는 순간에도 혼자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던,
아니 혼자있다는게 어떤건지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제 모습에 대한 실망같은 거랄까.....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항상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어쨋든 이제 전 그들처럼 사랑하며 살기위해,

사랑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항상 그 분의 눈으로 한 번 더 나를, 주변을 보기를 다시 바래봅니다.

그러면 정말 사는 게 다 죄일지도 모르는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게 인간의 삶이라 해도,

내 자신이 혼자가 아님에 든든함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조금만 더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만으로 부족한 제가

주님의 눈과 제 눈이 항상 함께 하도록 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버리는 그들.

그들이 부럽네요.

서로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해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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