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동성당 게시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연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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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우 [sparrow98] 쪽지 캡슐

2000-06-02 ㅣ No.504

그 여자는 어제 대학 동창들과 만나서 송년모임을 가졌습니다.

대학 동창들. 한참 바쁘게 일할 나이들이어서 모이기도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반가운 얼굴들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는 회의를 마치자마자 급히 달려갔습니다.

대개 다 결혼해서 아이가 하나 둘씩은 있었고,

자신처럼 공부가 늦어지거나 혹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신이 된 사람들만이 혼자 삼십대의 허리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가면 언제나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결혼 언제 할거냐’는 소리도 이제는 웃으면서 들어줄 수 있는 여유도 생겼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요.

한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청년들이 이제는 소심한 가장들이 되어서, 실직의 위기를 넘겨가는 어려움과 자식 걱정 세상

걱정들을 늘어놓으면서 밤이 깊었습니다.

3차를 호기있게 외치던 친구들이 작년만 해도 여럿이었는데,

 올해는 별로 취하는 친구도 없었고 3차를 가자고 떼쓰는 친구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악수를 나누면서 ‘잘들 견디어보자’고 서로 등을 두드려 주면서 헤어졌지요.

‘저들도 세상의 풍파를 헤쳐나가느라고 힘들었구나’ 그 여자는 가장의 짐을 진 친구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여자도 여러 친구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차를 가지고 그 여자 앞에 왔습니다.

가끔 만나서 저녁을 먹기도 하는 남자 친구였지요.

그 여자의 집 앞까지 차로 바래다 준 친구는 그 여자가 내릴 무렵 수첩의 어느 한 면을 찢어서 그 여자에게 내밀었습니다.

“연하장이야. 수첩 한 장 찢어주는 게 무슨 연하장이냐고 생각하면 우습겠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하나뿐인 연하장이야.”

그가 내민 그 수첩 한 면에는 ‘아름답게 나이를 먹는 친구가 되자’고 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차량 번호들이 빽뺵하게 적혀있었습니다.

“뒷면에 이 숫자들은 뭐야?”

그 여자가 묻자 친구가 대답했지요.

“헤어져서 갈 때마다 네가 탔던 택시 번호들이야. 그냥 걱정돼서 적어두었던 번호들이야.”

 

그 친구는 떠났고 그리고 그 여자는 가슴이 찡한 채로 그렇게 거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받은 어떤 연하장보다도 아름다운 연하장,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름다움 연하장을 들고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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