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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 - 신앙 고백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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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12 ㅣ No.133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

제1회 ‘신앙의 해’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최동일 신부(사무처 차장)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2011년 10월 11일 교서 「믿음의 문」(Porta Fidei)을 반포하시면서 ‘신앙의 해’를 제안하셨다. 이 ‘신앙의 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 반포 20주년을 기념하는 2012년 10월 11일을 그 시작으로 하여 2013년 11월 24일에 마치게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유럽의 수많은 성당들은 전례가 거행되고, 교리 교육이 이루어지는 신앙 생활의 중심지로서의 활력을 잃어 버리고, 그저 관광객들이 줄서서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 관광명소나 박물관처럼 되어버렸다. 유럽 교회의 신자들 또한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나, 살아가는 모습은 비그리스도인들과 어떤 차이도 없고 돈이나 명예와 같이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들만이 그들의 관심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서 이런 현상이 꼭 유럽 교회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지역교회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이 문제는 유럽이라는 특정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톨릭 교회 전체의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교황님께서는 이런 현상의 원인이 맹목적인 과학적 사고방식과 개인주의로 인해 신앙이 경시되거나 심지어는 부인되기까지 하는 데에 있다고 판단하시고, 이제 교회는 외적인 성장보다는 교회의 기본이면서도 핵심인 ‘신앙’에 관심을 기울여 근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신앙의 해’ 선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 선포된 ‘신앙의 해’를 맞이해서 신앙의 쇄신을 위한 하나의 길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교육이 권고되고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회의 쇄신을 주제로 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현대 사회 안에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4편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편은 ‘신앙의 고백’으로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들을 담고 있다. 둘째 편은 ‘신앙의 성사들’로 우리가 전례와 성사를 통해 거행해야 할 교리들을 담고 있다. 셋째 편은 ‘신앙 생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교리들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편은 ‘신앙 생활에 따른 기도’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에 대한 교리를 담고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가톨릭 교회가 2000년간 간직해 온 구원의 진리를 과거와 크게 변화된 상황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그에 맞는 새로운 언어와 표현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 주부터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그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톨릭 신앙이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새롭게 알 수 있었으면 한다. 무조건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믿는 대상의 놀라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에 대한 경탄의 마음으로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2013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2)

제1편 - 제1부 - 제1장 :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는 인간


인류는 끊임없이 기술을 혁신시켜 왔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워왔으며, 문화와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런 발전에 만족할 수 있는가? 과연 우리가 그토록 애써서 이루고자 하는 이 모든 성장들은 그 최종 목표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그 사실 자체에 그저 우리는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은 결국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라는 인간 존재 자체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이런 질문들은 우리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한다. 세상의 온갖 복잡한 것들에 마음이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마치 어떤 이가 목적지도 없이 아무 기차나 올라타서 그저 창밖의 풍경에 매료되어 창밖만 바라보다가 결국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왜 왔는지도 모른 채 종착역에 내려서 당황해 하는 것과 같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시작은 인간 존재의 이유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며, 인간은 그 기원도 하느님이요 그 목적지도 하느님이라는 것이 그 답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반드시 하느님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본성을 가리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인간은 종교적 존재’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을 향해 창조된 존재이기에 모든 인간은 어떤 특별한 종교의 가르침을 통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사고 능력으로 하느님에 대해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러한데 이를 이성적으로 알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보면서 그 모든 것들과 그것들을 움직이는 질서를 지워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우리 안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양심을 심어주신 분, 무한한 행복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신 분으로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가 제대로 사고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요소들이 매우 많으며, 하느님에 대한 진리는 우리 인간의 사고 범위를 무한히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의 사고 능력으로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해 보다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이성을 넘어서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느님의 계시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인간은 종교적 존재로서 각자가 타고난 능력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와 종교가 다르거나, 아직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세상 모든 사람들과도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해 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2013년 1월 13일 주님 세례 축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3)

제1편 - 제1부 - 제2장 - 제1절 : 하느님의 계시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인 길 위에 한 사람의 발자국이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이를 보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그 길을 새벽같이 걸어간 어떤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발자국을 좀 더 면밀히 조사하고 연구한다면, 그 발자국의 주인인 사람의 발 크기는 어떤지, 신발의 형태에 따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등등 다양한 사실을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알았다고 해서 과연 우리는 그 발자국의 주인인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 발자국을 아무리 조사해도 그 사람이 왜 그 길을 새벽같이 걸어갔는지, 그 사람은 무슨 꿈을 가지고 사는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등등 그 사람의 가장 본질적이고, 깊은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어떤 식으로든 만남을 가져야 한다. 광물이나 동 · 식물과 같이 비인격적인 물체들은 객관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그 본성을 파악하게 되지만, 인격을 지닌 한 인간을 제대로 알려면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발자국과 같다. 이를 관찰하고 조사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있고, 하느님의 몇 가지 특성을 알 수는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결코 인격을 지니신 하느님의 깊은 본성과 그분의 계획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져야만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 편에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말씀을 건네시고 당신 자신을 열어보여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계시이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서 하느님께 응답하고, 하느님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또 세상과 인간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리고 이런 계시는 말씀과 업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런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여러 업적들이 갖고 있는 의미를 우리에게 밝혀준다. 반면 하느님의 여러 업적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을 증거해준다. 이렇게 역사를 통해 말씀과 업적의 긴밀한 관련 속에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하느님 계시의 완결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말씀하시고, 직접 업적을 행하셨다면 이는 정말 놀라운 계시가 아닌가. 그런 계시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완결되었다. [2013년 1월 27일 연중 제3일(해외 원조 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4)

제1편 - 제1부 - 제2장 - 제2절 : 하느님 계시의 전달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또 당신의 계획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이 계시는 역사를 통해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다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사람이 되신 분이시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요 예수님의 행적은 곧 하느님의 행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듣고 봄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가리움 없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직접 듣고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듣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신앙의 유산을 통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특별히 선발하였고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수많은 말씀과 행적을 하셨다. 이 12명의 제자들은 사도들이라 불리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권한과 소명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사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듣고 목격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 그리고 성령의 영감에 의해 깨달은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에 의해 형성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우리는 ‘사도전승’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도전승은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1) 사도들의 설교나 가르침, 행동의 모범을 통해 전달(성전).
2) 사도들이나 그 측근의 제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글을 통해 전달(성경).

사도전승의 두 가지 전달 방식인 성전과 성경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둘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똑같은 샘에서 기원되며,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하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둘은 모두 같은 성령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긴밀성이 있다. 따라서 이 둘 중 무엇하나가 더 높거나 낮은 것이 아니라,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직접 목격자인 사도들 또한 세상을 떠날 시점이 다가오게 되었다. 이에 사도들은 후계자로 주교들을 두고 자신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전해 받고 성령에 의해 깨달은 진리들을 전해줌으로써 이것이 세상 끝날까지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전해지는 성경과 성전을 두고 수많은 해석과 입장들이 교회 내에 있어왔고 그 중에는 잘못된 해석도 많았다. 그러므로 이런 수많은 목소리들 가운데 무엇이 진정한 계시의 메시지인지를 분별해 내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이 권한을 교황님, 그리고 교황님과 일치하는 주교들에게 주셨고 이를 교도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성전과 성경 그리고 교도권은 그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며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계시의 전달을 이루는 핵심 요소들이다. [2013년 2월 3일 연중 제4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5)

제1편 - 제1부 - 제2장 - 제3절 : 성경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이 되는 책이다. 성경은 비록 인간 저자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그 모든 과정이 성령의 영감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그 가르침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성경 자체는 구원에 관한 진리를 오류 없이 담은 책이지만, 성경을 읽는 우리가 올바로 읽지 않으면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잘못 해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을 읽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성령의 도움을 청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하도록 저자에게 영감을 주신 분이 성령이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역시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오해 없이 그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과 동시에 또한 사람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물론 성령의 영감 속에 성경의 저자는 성경을 기록했지만, 그 과정 중에 성경의 저자가 살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환경이나, 언어, 문화, 문학양식 등 많은 인간적 요소들이 성경에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비평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고려하면서 읽어야 한다.

성경은 어느 날 갑자기 쓰여진 책이 아니라 1000년 이상의 긴 시간에 걸쳐서 전해지고 쓰여져 지금 현재의 성경으로 최종 완성된 책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서들이 저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면서 등장했다. 이에 교회는 성경이라 주장하는 수많은 문서들 중에 진실된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참성경과 거짓된 문서들을 구별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는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의 유산을 순수하게 지키고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전승을 기초로 하여 어떤 문서들이 성경의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지를 판단했고, 이렇게 하여 확정된 목록을 성경의 ‘정경’이라 부른다. 이 정경의 목록에는 구약성경에 46권과 신약성경에 27권이 들어있다.

구약성경은 세상창조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바가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결코 둘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를 이룬다. 왜냐하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둘 다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구원이라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 안에 숨겨져 있으며,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2013년 2월 10일 설(연중 제5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6)

제1편 - 제1부 - 제3장 :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신앙1)


한 인격과 한 인격의 만남이 참된 만남이 되려면 한쪽 편만의 의지로는 불충분하며, 상호간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인격을 지닌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 역시 한 인격을 지닌 인간 편에서의 적절한 응답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 응답이 신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께 신앙의 응답을 해야 할까? 신앙의 응답은 무엇보다도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전적인 순종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머리로는 이해하고 믿으면서 행동으로는 이와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면 이는 전적인 순종이 아니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과 의지 모두를 전적으로 하느님께 순종시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응답이다.

또한 신앙의 응답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진리를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참되다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그 모든 것을 우리의 머리로 다 깨닫고 이해했기 때문은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머리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하느님의 계시를 참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계시의 주체이신 하느님이 진리 자체이시므로 결코 오류를 범하실 수도, 우리를 속이실 수도 없고, 따라서 그분의 계시 역시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데 그 근거를 둔다. 즉, 하느님의 권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분의 계시 또한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이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고, 성령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신앙의 응답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혹자는 ‘나에게 신앙이 없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에게는 신앙이라는 은총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니 내게는 아무런 탓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잘못 이해한데서 생긴 오해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똑같은 태양을 매일 주신다. 비록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문화에 따라 경우에 따라, 그 은총이 우리 눈에 분명히 드러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신앙의 은총 역시 모든 이들에게 차별 없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이는 하느님의 은총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 편에서의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자유로운 동의 및 협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아무리 빛이 환해도 우리가 눈을 감아버리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인 동시에 인간의 자유롭고 책임 있는 선택이기도 하다. [2013년 2월 24일 사순 제2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7)

제1편 - 제1부 - 제3장 :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신앙2)


믿는 것과 아는 것, 즉 신앙과 이성은 인간을 진리이신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두 가지의 중요한 힘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란 비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을 사용할 능력이 부족한 유치한 사람들이나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사실 신앙에 받아들이는 계시의 내용들이 많은 경우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신앙이 비이성적이고 유치한 믿음이어서가 아니라, 무한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담은 계시를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모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을 넘어서는 신앙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성이 인간의 사고 능력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면 신앙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가 이성으로 받아들이는 진리보다 더욱 더 확실한 진리임에 틀림없다. 어린아이가 어려운 수학문제를 자기 혼자의 힘으로 낑낑대며 풀어서 답을 구하는 것과 수학의 전문가인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답을 구하는 것과 어느 것이 정답에 가까이 가는 길일까? 구원을 얻기 위해 반드시 얻어야 할 진리를 구할 때 그 진리를 우리의 유한한 이성에만 의지해서 구하는 것과 구원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대로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그 진리에 가까이 가는 길일까? 당연히 신앙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편이 진리에 가까이 가는 길이다. 따라서 신앙은 결코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그렇다면 신앙이 이렇게 높은 경지의 것이니, 이성을 통해 이것저것 탐구하고 해답을 구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일까? 이 역시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다. 이성 또한 신앙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앙을 통해 받아들인 계시의 내용을 우리는 이성을 통해 탐구하면서 그 신앙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또 신앙의 내용을 다른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해야 하고 이 때에도 우리는 이성을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신앙과 이성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 아니라 둘 다 중요하며 반드시 필요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에서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며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고 말한다. 두 날개 중 어느 한 날개라도 없거나 다친다면 새가 제대로 하늘을 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이성과 신앙이라는 두 날개 모두를 건강히 활용할 때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2013년 3월 3일 사순 제3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8)

제1편 - 제2부 - 제1장 - 제1절 - 제1단락 : ‘성부’ - 삼위일체


이번 주부터 살펴보게 될 가톨릭교회 교리서 1권 2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알려주신 계시의 진리들을 하나하나씩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직접 밝혀주신 사실들이므로 우리는 이를 의심하지 말고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가 믿어야 할 하느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내용이다. 또한 하느님의 다른 모든 신비들이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냈거나 다른 어떤 것에서 단서를 얻어 추리해낸 것이 아니다. 이 신비는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알게 되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한 분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존재는 알았어도 그 하느님이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시는 모습과 이런 예수님의 모든 업적들 안에 함께 활동하시는 성령의 모습을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즉,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홀로 계신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서로 구분되는 위격들이 서로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되는 일치의 관계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매우 어렵고 추상적인 교리로만 여기고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데, 사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론적인 교리라기보다는 우리의 삶과 직접 관련된 신비이다. 하느님의 깊은 내적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다 보니 다소 전문적이고 추상적인 용어들이 사용되어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삼위일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사랑의 신비이다.

사랑을 한 마디 말로 정의하려 한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체험으로 알고 있다. 사랑을 한 번도 받지도, 주지도 못한 이는 없지 않은가! 사 랑하는 이들을 보면 분명히 서로 다른 인격체이지만, 사랑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주고 점차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랑의 내어줌을 통해 서로 다른 위격인 성부, 성자, 성령이 일치하여 한 분의 하느님을 이루시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므로 어렵고 딱딱한 교리가 아니라, 삶으로 살아야 하는 구체적인 신비인 것이다. [2013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9)

제1편 - 제2부 - 제1장 - 제1절 - 제4단락 : 창조주


성경은 창세기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 고도로 발전된 과학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는 빅뱅 이론이니, 진화론이니 하는 이론으로 세상의 기원과 발전을 설명한다. 이런 과학이론들과 성경의 창조론은 과연 서로 대치되는 것일까?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특별히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이런 구원체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과 만물이 하느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것과 하느님의 이러한 힘은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라는 사실에서 나온다는 신앙으로 이끌었다. 바로 이 신앙을 전하는 것이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이처럼 창조신앙은 세상이 언제, 어떻게 기원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구원자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생겨난 것이다. 창조신앙의 이러한 의미를 명확히 안다면 성경의 창조이야기가 결코 과학이론들과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론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께 전적으로 속해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여러 현상들이 진행되어 가는 원리나 형태는 성경의 창조론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라 과학이 전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성경의 창조론과 세상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이론들은 그 관점 자체가 서로 전혀 다르다. 따라서 성경의 창조론과 과학의 이론들을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기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둘을 적절히 섞어서 어떤 하나의 기이한 이론으로 만들어내려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과학도 종교도 그것이 진정으로 참되다면 결코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이라는 과학이론의 발전으로 인해서 우리는 세상 만물이 덜 완전한 것에서 더 완전한 것으로 끊임없이 진화되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과학의 발견은 이런 모든 움직임을 주관하는 절대적인 초월자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세상의 기원에 대한 창조론과 과학이론의 설명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이 결코 서로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해야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의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데에 있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2013년 3월 17일 사순 제5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0)

제1편 - 제2부 - 제1장 - 제1절 - 제7단락 : 타락


수년 전 동남아시아에 발생했던 쓰나미와 같은 어마어마한 자연재해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이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악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하루에도 수차례씩 일어나는 온갖 범죄들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간과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도대체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당신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어주시는 계약을 맺으신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늘 이 계약에 충실하신 반면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이 너무도 쉽게 하느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다른 이방민족의 신을 숭배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됨을 체험한다. 이런 체험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악을 극복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가 본래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이는 조상 대대로 그러하였다고 깨닫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체험한 죄에 대한 성찰은 곧 인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이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가 성립된 배경이다. 즉,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축복하시고 그가 하느님께 자유롭게 순명함으로써 태초의 축복 안에서 하느님과의 사랑을 누리게 하셨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을 거스르는 원죄를 저질렀고, 이 원죄 이후에 수많은 죄들이 인류의 역사 안에 퍼져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죄에도 불구하고 늘 인간들의 곁에 계시며 구원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창세기가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그 이후의 자손들의 범죄의 이야기를 통해 악의 기원에 대해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다른 이들과 어떤 유대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본인의 탓과는 무관하게 죄에 물들어 있는 세상 안에서 그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사실만으로 이미 죄의 강력한 지배하에 놓여 있으며 우리의 힘만으로는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우리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원죄’라는 개념인 것이다.

이처럼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의 운명은 어찌될까? 인간은 참으로 가련한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죄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이보다 훨씬 더 큰 힘이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2013년 3월 2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1)

제1편 - 제2부 - 제2장 - 제2절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시던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예수님을 한 명의 훌륭한 스승이요 예언자로 보기도 하고, 사회혁명가로 보기도 한다. 혹은 신비주의자나 명상가로 보기도 한다. 이외에도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색채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덧칠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했을까? 우리는 예수님께 붙여진 두 가지 중요한 호칭들을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라는 호칭이다. 그 뜻을 직역하면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메시아’라는 히브리어 명칭을 희랍어로 번역한 명칭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메시아’라는 호칭은 주로 왕들에게 붙여졌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권한을 지닌다는 의미로 기름으로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 왕이고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가문에 대대로 왕권을 물려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외세에 의해 지배를 받는 시기에도 다윗 가문의 후손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새롭게 재건할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스스로에게 붙이는데 조심스러워 하셨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하게 만들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리스도’는 우리를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는 구원자라는 참뜻이 밝혀졌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신자들의 고백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고유한 이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주님’이라는 호칭이다. 구약 성경에서 ‘주님’은 하느님을 지칭할 때 고유하게 쓰
이는 용어이다. 그런데 아람어를 사용하던 팔레스티나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이미 ‘주님’이라는 용어가 예수님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1코린 16,22). 또 그리스어를 쓰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1코린 12,3: 로마 10,9)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이 누리시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주권과 똑같은 그 주권이 예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기도 중에 우리가 자주 부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매우 짧지만 그 안에 “예수님은 나를 주관하는 주님이요, 나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교회의 오랜 신앙이 담겨 있는 매우 중요한 호칭이다. [2013년 3월 31일 예수 부활 대축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2)

제1편 - 제2부 - 제2장 - 제3절 :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셨다.”


원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죄의 경향에 기울어져 있고 그 결과로 죽음이라는 결말을 앞두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우리 삶의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야만 우리에게 죽음을 뛰어넘을 구원의 희망이 생긴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직 예수님께로부터 나온다. 역사를 뛰어넘어 영원히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2격이신 성자께서 역사 속의 한 구체적인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분이 바로 나자렛 예수님이시다. 이 사건을 우리는 ‘강생’이라 부르는데,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 사건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낮추시어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높여져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강생의 사건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 자신을 직접 주신 사건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강생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당신께로 영원히 불러 모으는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결코 죄의 나락에 떨어져 영원히 어둠에 머물 존재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끌려 그분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존재임이 강생 사건에서 드러난 것이다. 하느님이신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인간들과 긴밀히 하나가 되셨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저 단순히 세상에 던져진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긴밀히 하나가 될 존재라는 고귀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참된 하느님이요 또한 참된 사람이시기도 하다. 많은 이단들이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고 인성을 등한시하거나, 반대로 인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신성을 등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경우라도 결국은 하느님을 인간의 역사로부터 멀리 떼어냄으로써 구원이 지니는 참 의미를 상실시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결합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일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이의 중개자가 필요하고 그 중개자는 하느님과도 인간과도 완전하게 일치해 있어야만 하느님과 인간을 서로 완전히 일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중개자인 예수님은 완전한 하느님이요 완전한 인간이라는 이 중요한 진리를 교회는 그 초기부터 공의회 등을 통하여 소중하게 지켜왔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서로 사랑하여 하나를 이루는 것이 삼위일체의 핵심 의미라면 이러한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과 하나를 이루신 신비가 바로 ‘강생’의 신비가 아닌가 한다. 이처럼 사랑은 늘 내어줌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2013년 4월 7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3)

제1편 - 제2부 - 제2장 - 제4절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다”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의 고발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죽음이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주었던 충격은 매우 컸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 믿고 모든 희망을 걸었던 분이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어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끝난 듯이 보이는 이 죽음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시면서 본인 스스로를 ‘하느님의 고통 받는 종’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셨다. 여기서 ‘하느님의 고통 받는 종’은 이사야 예언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하느님께 대한 충실한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예언자이다. 그는 모든 이의 죄를 끌어안고 이로 인해 고통 받지만, 그 덕분에 모든 이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인물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하는 것은 모든 이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하는 것임을 미리 밝혀주셨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인 이들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땅의 특정 인물들이지만, 그 죽음의 원인은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죄에 속박되어 있는 모든 이에게 있다.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니 결국 모든 세대, 모든 이가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시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만찬을 하셨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는데 특별히 빵은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는 당신의 피로 내어 주심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또한 이 죽음은 당신이 피하지 못해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로 선택하는 죽음이라는 것 또한 밝혀 주셨다. 그리고 이 저녁 식사를 기억하여 행하라고 명하심으로써 당신의 희생을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결코 실패나 끝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신비요 선물임을 알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을까? 죄의 결과인 죽음이, 그것도 가장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의 가장 큰 은총이요 사랑의 징표가 되다니 말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은 가장 약하고,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는데, 여전히 우리는 희망을 힘있고 약삭빠른 이들이 모여 있는 저 크고 화려한 궁전에 두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2013년 4월 14일 부활 제3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4)

제1편 - 제2부 - 제2장 - 제5절 : “고성소에 내리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큰 사랑을 실천했던 인물이었으며, 정의를 부르짖고 약한 이들의 권익을 대변한 한 명의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인정하고 공경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까지 모두가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한 순교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구원자는 될 수 없다. 따라서 구원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그저 헛된 망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죽음이 여전히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무덤이 비어져 있었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며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숨어 있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돌변하여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군중들 앞에 나서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체험이 아니고서는 과연 그 무엇으로 제자들의 이러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부활은 그저 제자들의 헛된 바램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히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직접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부활이 분명히 역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부활 자체는 역사나 자연 법칙을 뛰어 넘어 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건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 다시 살아나심은 죽기 이전에 지녔던 지상에서의 생명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차원인지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면 여기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 그런데 여기서 이 꽃은 그 아름다움의 차원이 씨앗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경지에 있다. 아무리 씨앗을 이리저리 살펴봐도 꽃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지만, 분명 그 씨앗에서 아름다운 꽃이 핀다. 이처럼 지금 이 지상에서의 생명이 씨앗과 같다면, 부활 후에 누리게 될 생명은 이 씨앗에서 피어날 아름다운 꽃과 같다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역시 당신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하느님 안에서 참된 생명을 누릴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엄청나서 실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며, 이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꿋꿋이 신앙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4월 21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5)

제1편 - 제2부 - 제3장 - 제8절 : “성령을 믿나이다”


성경은 그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세상의 창조 때에 모든 것들은 성령을 통해서 생겨났다. 예언자들을 일깨우고 일으키는 분도 성령이고,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이도 성령이며, 죽은 이를 다시 일으키시는 분도 성령이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축성되도록 도유하시는 분도 성령이셨다. 게다가 예수님의 사명과 성령의 사명은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서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성령의 활동이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대해 생소하게 느끼고 잘 알지 못할까?

예수님과 성령의 사명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공적인 부분의 사명을 행하시는 반면 성령은 그 사명이 이루어지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힘을 주는 등 내적인 부분의 사명을 행하신다. 마치 한 가정에서 아버지는 집 밖에서 여러 가지 외적인 활동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반면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고 남편의 내조를 하며 자녀들을 양육하는 내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렇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어머니의 역할이 아버지의 역할에 비해 결코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과 성령의 역할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처럼 성령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자체를 겉으로 보고 확인함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그 결과를 보고 성령의 존재를 알고 확신할 수 있다.

성령은 어떤 신적인 에너지같은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스스로 활동하시면서 자신의 사명을 이루시는 한 위격이요 성부, 성자와 똑같은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을 두고 “다른 협조자”(paraclito)라는 용어로 부르시면서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위격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주신다. 성령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랑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은 그 힘으로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안에서 충만한 완성을 이루도록 해주신다. 반대로 성령이 없다면 모든 것은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생기 없는 죽은 존재가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에게 성령이 없다면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예수님은 그저 과거의 한 인물일 뿐이며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할 것이고 교회는 단순한 조직일 뿐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라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이며 복음은 생명의 힘이 되고 교회는 삼위일체적인 친교의 표지가 된다.

이처럼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고 생기 있게 하시는 성령은 성경에서 바람에 비유되듯이 성부와 성자의 현존을 드러내며 모든 곳에 도달하신다. 그러나 특별히 교회야말로 히뽈리토 교부의 표현처럼 “성령께서 꽃 피우시는 곳”이다. 따라서 다음 회에는 교회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2013년 4월 28일 부활 제5주일(이민의 날) 대전주보 4면]


[신앙의 해 특집] 가톨릭 교리 해설 (16)

제1편 - 제2부 - 제3장 - 제9절 :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나이다”


근래에 실시된 전 국민 대상 통계조사에 의하면 주요 종교들 대부분의 경우 그 신자들이 어느 정도씩 감소되었으나 가톨릭만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가톨릭이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 자선활동이나 봉사활동, 교육, 의료 사업 등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사회 안에서 좋은 이미지를 쌓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톨릭교회가 직면하는 커다란 도전 또한 존재한다. 바로 종교적 개인주의이다. 애써 교회에 소속되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기도와 선행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를 위해서는 좋은 것이나, 개인의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닌 것으로 여긴다.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교회는 어느 순간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마음 안에 영원으로부터 이미 교회를 계획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심으로서 장차 모든 민족들로 이루어질 교회에 대한 징표가 되게 하셨으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서 교회는 실현되었다. 또 성령강림 때 성령의 내리심에 의해 교회는 세상에 널리 드러나고 공표되었으며, 마침내는 종말의 때에 그 완성을 이룰 것이다. 이처럼 교회 자체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에 교회를 따로 떼어놓고는 결코 구원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의 한 조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신비이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눈으로 보이는 현실 안에 성령께서 존재하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레네오 교부는 “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또한 계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계신 곳에 교회와 온갖 은총이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나며 성령에 의해 이끌려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성령의 은총은 교회로 하여금 설립자라 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해 단순히 기억을 간직하고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현재에도 끊임없이 예수님과 생생한 만남을 이루며, 거기서 빛을 얻게끔 한다.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구원의 중재자이시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은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 안에 속한 우리들은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하고 훌륭한 배에 탄 것과 같다. 그러나 이로써 끝이 아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에게는 이 교회 밖의 다른 이들을 교회로 이끌어 올 선교의 사명이 있다. 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재촉되며, 성령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진리로 알고 구원되기까지 끊임없이 선교할 것이며, 여기서 교회의 정체성이 드러날 것이다. [2013년 5월 5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대전주보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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