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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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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17 ㅣ No.136

[저는 믿나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김혁태


사람이 되신 하느님

교회의 신앙이 나자렛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다음 그분의 신성을 길게 선포하는 부분을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신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 ‘사도신경’에는 없습니다. ‘사도신경’은 초창기 로마교회에서 생성된 신경이기 때문이지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이 대목은 바로 교회가 수백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피를 흘려 확립한 신앙의 진리입니다.

그렇지만 나자렛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고백도 결국은 성경의 계시진리와 사도들의 신앙에 근거합니다. 요한 복음은 사도들의 신앙 안에서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곧 여기서, 말씀을 하느님과 구별하면서도, 말씀을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나자렛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그리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확고부동하게 선포한 다음에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강생의 신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이처럼 엄청난 고백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아니 이처럼 엄청난 고백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요?

유다인들의 신앙에, 하느님은 여러 모양 여러 방법으로 당신 백성에게 말을 건네시고 가까이하시지만, 거기에도 분명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바르게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곧 어느 누가 하느님의 영광을 아무리 크게 받았을지라도(모세, 예언자 등), 하느님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하느님은 만물의 근원이시지만,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 속에 자신을 낮추시는 것은 하느님다움에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혐오스러울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그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그 어리석음을 오롯이 고수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사이에서 30여 년의 인생을 사셨다고, 나자렛 예수님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를 신학용어로는 ‘강생’ 또는 ‘육화’라고 부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육신’이란 말을 쓰기도 하지요. 아무튼 인간 예수님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표현대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저 하느님과 비슷하다거나, 하느님의 대변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아니 그분만이 “임마누엘”(마태 1,23)이십니다.

강생의 신비는 따라서 예수님께서 어느 한 순간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생명체는 무엇이든 시작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그 시작은 ‘탄생’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인간으로서 탄생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영원으로부터 계신 분, 따라서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성자께서 유한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그처럼 영원하신 성자께서 왜 사람이 되셨을까요?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다시 말해, 그것은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나 현명한 사람들에게 모욕적이고 경멸스러운 일인데…!

그 이유를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457-460항 참조).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한마디로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사실 하느님의 모든 계시는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또 ‘신학’에서 어려운 용어와 개념들을 사용하며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은 다 우리 인간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모든 게 도무지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말씀을 건네시고 행동하시고, 그러고는 마침내 몸소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나자렛 예수님으로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까지 파격적으로 자신을 낮추시는 것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마음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우리를 위하심’이 어느 극한에까지 이르는지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를 위하여”라는 말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가운데 예수님의 수난 대목에서 다시 한번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죽음과 부활을 통한 ‘인간의 구원’은 물론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된 세계의 구원이 인간의 구원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마침내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1). 하지만 만물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하느님께서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새로운 시작

인간을 하느님과 같아지게 하시려고, 아쉬움도 부족함도 하나 없으신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셨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60항 참조). 인간과 만물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러나 인간 없이 이 ‘새로운 시작’을 감행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자의 강생은 구원역사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홀로 영원하시지만, 창조 이래로 언제나 인간의 협력을 기대하십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작에서도 한 여인을 선택하셨습니다. 마치 시초에 한 여인 (하와)이 있었듯이, 새 역사의 시작에 인류의 대표주자로서 시골뜨기 처녀 마리아가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오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만일 마리아가 대답하지 않았다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내미시는 손길을 마리아가 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마리아는 “예.” 하고 응답했습니다(루카 1,38 참조). 그 반대의 경우를 상상했을 때, 이 응답이 인류 구원의 새로운 시작에 또한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전무후무한 방식에 그 어느 누가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내맡기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과 도무지 가당치 않은 일로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것, 선택은 이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점에서도 마리아는 신앙의 완전한 모범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성령으로 인한 동정 잉태와 동정 출산이었음을 신화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전하는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의 말씀들도 학자들에게는 역사비평의 대상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98항 참조).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당신의 뜻을 어떻게든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주시지 않았을 리가 만무합니다(복음서에서는 천사의 전갈과 꿈을 통해). 이를 통해 마리아와 요셉이 알고 있던 사실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본적으로는,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게 하느님의 뜻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신도 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일을 다른 누구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마리아도 이 기본적인 사실을 강생의 신비로 알아듣는 데에 신앙이 필요했고, 인내와 숙고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신앙은 의혹과 몰이해가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과 그에따른 사건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그리고 신앙은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성령으로 인하여

성자의 강생과 동정 마리아에게서의 탄생은, ‘결정적으로’ “성령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전 존재와 본질은 ‘성령 충만’입니다.

언제나 죄의 사슬에서 태어나는 인간과 인류가(시편 51,7 참조) 그 사슬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하려면, 죄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한 인간이 필요했습니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 죄 말고는 우리와 똑같으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십니다. 바로 성령으로 인한 잉태와 동정 출산, 그리고 성령 충만이 새로운 인간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보증합니다.

김혁태 베드로 - 전주교구 신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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