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가을단상3 (흐린가을하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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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주 [pjohn] 쪽지 캡슐

2001-10-10 ㅣ No.4370

비가 내리면

나를 둘러싸는 시간의 숨결이 떨쳐질까

비가 내리면  

내가 간직하는 서글픈 상념이 잊혀질까

비가 내리면

나를 유혹하는 안일한 만족이 떨쳐질까

바람이 불면

내가 알고 있는 허위의 길들이 잊혀질까

 

난 책을 접어 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김광석의 "흐린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오늘 날씨에 딱 맞는 노래이지요.

흐린 가을 하늘에 쓰는 편지의 수취인은 내 자신입니다.

"너 그렇게 살지마"라는 질책. "좀 열심히 살아봐"라는 격려입니다.

 

몇 주 전에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이름 모를 여인으로부터... 푸하하

매일 간행물이나 공문만 받다가 개인 편지를 받으니 두근두근

알고 보니 주일학교 학생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아이는 초등학생이었는데,

하루는 성당에서 오더니 투덜거리더랍니다.

이유인즉

"커서 신부님과 결혼하려 했는데 신부님과 동성동본이라 못하게 되었다"

는 사실이 억울했던 것입니다.

한참 동안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참 따뜻해 졌습니다.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 친구에게 몇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편지를 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었던 편지였는데, 당시에는 사자성어를 찾아가며 온갖 멋은 다 부리며 작성한 편지였습니다. 그런데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내 포기해 버렸지요. 저로서는 굉장한 용기를 내서 썼던 편지였는데, 실망도 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편지를 여자 친구의 어머니가 먼저 보시고 폐기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편지는 읽혀지지 않은 편지가 되고 말았지요. (그 편지만 읽혀졌더라도 나의 인생은......) 그 이후 편지는 좀처럼 쓰지 않게 되더군요.

 

요사이는 이메일이 있어서 편지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습니다. 편지가 신속함이나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그렇게 둔탁한 방법이 더 정감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또 많은 시간을 기다리는 가운데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정형화된 컴퓨터의 글씨보다 손으로 쓴 필체 속에 묻어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심혈을 기울여 누구에겐가 편지를 한 통 써 보내면 어떨까요. 우선 흐린 가을 하늘에 자신에게 편지를 쓰고 그 마음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겁니다.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은 따뜻함을 느껴 풍요롭고, 또 답장을 기다리는 나의 마음 역시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무척 상투적인 멘트같죠?)

잊혀졌던 누구에겐가 보내는 편지, 받는 편지 생각만해도 설레이지 않으세요?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았습니다. 그냥 편지에 관한 그야말로 단상(짧은 생각)을 주절거렸습니다.  다른 분들도 단상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더욱 좋을텐데.

 

머털이 박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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