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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4 와 성모 찬송 기도문 [성경용어_슬픔의골짜기] [성경용어_슬픔의계곡] [성모찬송] [바카계곡] [초막절] jan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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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ㅣ No.1308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글에서(바쁘지 않은 분들께 필독 권고), 우리는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에 포함되는 "성무일도"에서 끝 기도로서 바쳐지고 있는 "성모 찬송(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기도문"의 독특한 표현이며, 그리고 "후회/뉘우침의 이 세상/세속의 삶"을 그 자구적 의미로 가지고 있는, "슬픔의 계곡(vale of tears)" 이라는 표현의 성경 근거가 시편 84,6-7에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번의 글에서는, 시편 84의 유래와 그 내용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1-1. 다음은 시편 84 전문입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bible/bbl_read_sori.asp?gubun=old2&code=123&JangNo=84

(발췌 시작)
1  [지휘자에게. 기팃에 맞추어. 코라의 자손들. 시편] 
만군의 주님 당신의 거처가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주님의 앞뜰을 그리워하며 이 몸은 여위어 갑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제 마음과 제 몸이 환성을 지릅니다. 
4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당신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마련하고 제비도 제 둥지가 있어 그곳에 새끼들을 칩니다.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늘 당신을 찬양하리니. 셀라 
행복합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7  그들은 바카 계곡을 지나며 샘물을 솟게 하고 봄비는 축복으로 덮어 줍니다. 
8  그들은 더욱더 힘차게 나아가 시온의 하느님 앞에 나섭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느님, 귀를 기울여 주소서. 셀라 
10  하느님, 저희의 방패를 보소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11  정녕 당신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습니다. 저의 하느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습니다. 
12  정녕 주 하느님은 태양이고 방패이시며 주님께서는 은총과 영광을 베푸십니다. 흠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13  만군의 주님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상, 발췌 끝).

1-2.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성가정 축일 화답송 전문입니다.

이 축일의 복음 말씀으로 발췌 되는 루카 복음서 2,41-52에,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 순례가 의무인 파스카 축제 때의 순례 과정에서 발생하였던 바를 전해 주고 있기에, 시편 84의 일부가 이 축일의 화답송으로 발췌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missaid=5371&gomonth=2012-12-30

(발췌 시작)

시편 84(83),2-3.5-6.9-10(◎ 5ㄱ 참조)

◎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

○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 떠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

○ 주 만군의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느님, 귀를 기울이소서.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당신 메시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

(이상, 발췌 끝).

2.
2-1.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of Hippe)시편 84에 대한 해설은 다음의 출처에 있습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fathers/1801084.htm

게시자 주:
(1) 성 아우구스티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본 성경인 Clementine Vulgate 의 시편 84[83],1에서 또한 언급되고 있는, "포도즙 짜는 기구들(the winepresses)" 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이 시편을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1 In finem, pro torcularibus filiis Core. Psalmus).

(2) 그리고 이 표현은,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개정된 Nova Vulgata 의 시편 84[83],1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며(1 Magistro chori. Secundum " Torcularia ". Filiorum Core. PSALMUS.),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영어본인 Douay-Rheims Bible 시편 84,1에서도 그대로 언급되고 있다(Unto the end, for the winepresses, a psalm for the sons of Core).

(3) 그런데 문제는, 이 표현이, 예를 들어, NAB(New American Bible)과 "새 번역 성경" 시편 84,1에서는 더 이상 언급되고 있지 않는 데에 있다. 

(4) 이로부터, 우리는 시편 84에 대한 해석이, 그리스도교측에, 적어도 두 개 이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다.

(5) 다른 한편으로,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시편 84에 대한 해석이 최근에 주어졌으므로, 이 글에서는, 이 해석의 범주에 속하는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전달해 드리기로 한다.

2-2. 다음은 시편 84에 대한 NAB 주석 전문입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psalms/psalm84.htm

(발췌 시작)
[Psalm 84] Israelites celebrated three pilgrimage feasts in Jerusalem annually. The psalm expresses the sentiments of the pilgrims eager to enjoy the divine presence.

[시편 84]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예루살렘에서 세 개의 순례 축제들을 경축하였다.(*) 이 시편은 하느님의 현존을 향유하고자 열망하는 순례자들의 (말 자체에 대해 그 이면의) 의미/감회(sentiments)들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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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7] Baca valley: Hebrew obscure; probably a valley on the way to Jerusalem.

[7] 바카 골짜기: 모호한 히브리 단어; 아마도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있는 어떤 골짜기일 것이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3. 다음은 시편 84에 대한 성요셉출판사 발행의 주석 성서 주석 전문입니다:

(발체 시작)
이 시편은 양식과 내용면에서 42편이나 43편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연중 축제에 성전으로 여행하면서 부른 "순례자의 노래" 중 그 하나인 것 같다. 시편 작가는 하느님의 성전을 찾아 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표현하면서(2-4절) 언제나 그곳에 살거나, 적어도 순례자로서 그곳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5-8절)행복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이 순례가 곧 자신의 것이 되었으면 하고 기도한다(9-13절).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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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어떤 물질적 인 것들에 만족하는 행복이 아니라, "영적인 행복"을 말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편을 노래하는 자들이, 내면적으로, 절망(despair) 대신에 희망(hope)을 향하여 나아가는, 슬픔(sorrow) 대신에 기쁨(joy)을 향하여 나아가는, 증오(hatred) 대신에 사랑(love)을 향하여 나아가는,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행복"을 노래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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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음은 시편 84에 대하여, "주석 성경"의 시편 입문(제1481쪽)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입니다:

(발췌 시작)
'시온의 노래' 들은 예루살렘과 거기에 있는 성전을 기린다(46; 48; 76; 84; 87편. 그리고 24;68; 1342편 참조). 시온은 '다윗 왕조의 도읍', '종교 중심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처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곳', '하느님의 도성', '대왕님의 도읍' 등 여러 가지 화려한 명칭들을 지니고 있다. 시온에 대한 이러한 찬양은 결국 시온 산을 당신의 거처와 당신의 안식처로 선택하신 주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 전례는 선취한다. 전례는 오늘의 예배 안에서 이미 내일의 번역을 경축한다. 예루살렘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이사 2,2-4; 60; 미카 4,1-3; 즈카 8 참조).


     동일한 영감 속에 이른바 '순례 시편' 들도 등장한다(120-134편).(*) 일반적으로 이 시편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르면서(84편; 이사 2,3; 예레 31,6 참조), 특히 이스라엘의 삼대 축일(**)(탈출 23,14-17) 때 성전으로 순례하면서 불렀으리라고 생각된다. ...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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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3년 5월 17일]

(*) 게시자 주: 유다교의 초막절/추수절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 성전의 제대를 일곱 번 돌때에 외쳤다는 "예리코(Jericho)의 함락(여호수아 6,1-21)을 기념하여 호산나!" 라는 환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새 번역 성경"에서 "순례의 노래"로 소제목이 붙여진, 시편 120-134의 사용 예에 대한 글은 다음의 글의 제2-2항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78.htm

[이상, 내용 추가 끝].

(**) 게시자 주: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클릭하십시오)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가-I, 나-I, 다-I, 성탄 전야(12월 25일 전야) 제1독서(이사야62,1-5) 제1절 해설에 주어진 각주입니다:

(발췌 시작)
초막절(추수절)오순절(수확절)무교절(파스카)과 함께 12살 이상의 모든 유다인 남자들이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에 위치한 성전을 참배할 것이 예상되는 구약 성경의 세 개의 의무 축일들이다. 초막절(Tabernacles, 추수절)의 시기는 티쉬리(Tishri, 9-10월)달 15일(추분일에 가까운 보름달)부터 1주간이며,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모세를 통하여 율법이라는 계시를 받았던 기간 동안 이들이 시나이 산에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관습적으로 무교절의 첫 날인 과월절(파스카)에 예루살렘 성지의 방문을 제외한 두 개의 의무 축일에 대하여서는 너무 먼 곳에 있을 경우에는 성지 방문 의무가 면제되기도 하였다. 
  
출처: 탈출기 23,14; 신명기 16,16, 본 해설서 시리즈의 성령 강림 대축일 전야 입문, 다해-I 성가정 축일 복음 말씀 해설 및 가해-I 부활 제3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2,14.22-33) 입문을 참고하라. 또한 가해-II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 말씀(마태오 복음서 17,1-9)의 해설에 있는 초막절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라.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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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다음은,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에 속하는 성무일도에서, 매월 제3주간 월요일 아침기도로 바쳐지는 시편 84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해설 전문입니다.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재임 말기인 2001년 3월 28일에 시간경(성무일도) 중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시편들 및 찬가들에 대한 해석을 시작하셨으나 끝내지를 못하셨는데, 이것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2007년 10월 5일에 마무리해주셨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psalter/jp2_b16_commentaries.htm

(발췌 시작)

Heaven's peace and life is our destination
Psalm 83 [84]

1. We continue our journey through the Psalms of the Liturgy of Lauds. We heard now Psalm 83 [84], which the Jewish tradition attributes to the "sons of Korah", a family of priests who were in charge of the liturgical service and guarded the threshold of the tent of the Ark of the Covenant (cf. I Chr 9,19).

1. 우리는 아침 기도 전례(the Liturgy of Lauds) 중의 시편들을 통과하는 우리의 여행을 계속합니다. 우리는 시편 83 [84]를 이제 들었는데, 이 시편을 유다교 전통은, 전례 봉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그리고 계약의 궤의 성막의 문턱을 지켰던(1역대 9,19 참조) 사제들의 가문인, "코라의 자손들"의 작품으로 생각합니다.

 

This is a most charming song, pervaded by mystical longing for the God of life, repeatedly celebrated (cf. Ps 83 [84],2.4.9.13) with the name:  "Lord of the Armies", that is, Lord of the heavenly hosts, hence of the cosmos. Moreover, this title had a special connection with the ark preserved in the temple that was known as 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of hosts, who is enthroned upon the cherubim" (I Sm 4,4; cf. Ps 79[80],2). Indeed, it was regarded as the sign of divine protection in times of danger and war (cf. I Sm 4,3-5; II Sm 11,11).

이 시편은, "만군의 주님", 즉, 천상의 무리들의 주님, 따라서 우주의 주님이라는 이름과 함께 반복적으로 경축되는(시편 83[84],2.4.9.13 참조), 생명의 하느님에 대한 신비적 갈망(mystical longing)에 의하여 널리 퍼지게 되는, 한 개의 가장 매력적인 노래입니다. 더구나, 바로 이러한 칭호(title)는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주님의 계약 궤" (1사무엘 4,4; 시편 79[80], 2 참조)으로서 알려진 성전에 보존되어 있는 계약 궤(the ark)(*)와 어떤 특별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이 궤는 위험과 전쟁의 시기들에 있어 하느님의 보호에 대한 표징(sign)으로서 간주되었습니다 (1사무엘 4,3-5; 2사무엘 11,11 참조).

 

The background of the whole Psalm is represented by the temple toward which the pilgrimage of the faithful is directed. The season seems to be autumn, for the Psalmist mentions the "early rain" that placates the scorching heat of summer (cf. Ps 83[84], 7). This could therefore remind us of the pilgrimage to Zion for the third principal feast of the Hebrew year, the Feast of Tabernacles, which commemorates the Israelites' pilgrimage in the desert.

이 시편 전체의 배경은 거기를 향하여 열심 신자들의 순례가 향하게 되는 [예루살렘] 성전에 의하여 나타내어지고 있습니다. 계절은 가을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시편 작가가, 여름의 시들게 하는 열을 진정시키는 "이른 비(early rain)"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시편 84,7 참조).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들에게,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순례를 경축하는, 히브리 전례력에 있어서의 세 번째 주된 축제인 초막절(the Feast of Tabernacles)(*)을 위한, 시온(Zion, 즉 예루살렘)을 향하는 순례를 상기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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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새 하와(New Eve)"동정 마리아"새 아담(New Adam), 즉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계신 "새 계약 궤(New ark)"이며 그리고 "성체"를 모셔둔 곳인 "감실(龕室)"을 나타내는 단어가 또한 "Tabernacle"임을 상기하라. "감실"에 대한 "전례사전"의 설명은 다음의 주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6509&keyword=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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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temple is present in all its fascination at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Psalm. It opens with the wonderful and delicate imagery of birds who have built their nests in the sanctuary (cf. vv. 2-4), an enviable privilege.

2. [예루살렘의] 성전은 이 시편의 시작과 끝에 그것의 매력 모두 안에서 존재합니다. 이 시편은, 어떤, 소유하거나 혹은 닮고자 하는 질투 혹은 욕망을 끌어 당기는, 특권(an enviable privilege)인, [예루살렘의 성전 내에 있는] 성소(the sanctuary)에 자신들의 둥지들을 이미 마련한 새들에 대한 경이로운 그리고 섬세한 비유적 묘사(imagery)와 함께 시작합니다(제2-4절 참조).

 

It is a representation of the happiness of all who - like the priests of the temple - dwell permanently in God's House, enjoying its intimacy and peace. In fact, the whole of the believer's being is stretched out to the Lord, impelled by an almost physical and instinctive desire for him:  "My soul yearns and pines for the courts of the Lord; my heart and flesh sing for joy to the living God" (v. 3). Then the temple reappears at the end of the Psalm (cf. vv. 11-13). The pilgrim expresses his great happiness at spending some time in the courts of the house of God and compares this spiritual happiness with the idolatrous illusion that pushes a person towards "the tents of wickedness", that is, the infamous temples of injustice and perversion.

이 시편은 성전의 사제들처럼, 그러한 행복의 친밀과 평화를 향유하는, 하느님의 집 안에 항구히 거주하는 자들 모두의 행복에 대한 한 표현입니다. 사실, 믿는 자의 있음(being) 전체가, 당신에 대한 어떤, 거의 신체적 그리고 본능적, 욕망에 의하여 재촉되어, 주님에게까지 다음과 같이 내뻗쳐집니다: "주님의 앞뜰을 그리우하며 이 몸은 여위어 갑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제 마음(heart, 심장/본심)과 제 몸이 환성을 지릅니다" (제3절). 그러고 나서 이 시편의 끝에서 성전이 다시 등장합니다(제11-13절 참조). 이 순례자는 하느님의 뜰(courts)들 안에서 다소의 시간을 보냄에 자신의 커다란 행복을 표현하며 그리고 바로 이러한 영적 행복(spiritual happiness)을, 어떤 인격(a person)을 "사악의 거처(the tents of wickedness)"를, 즉, 불의(injustice)와 왜곡(perversion)의 악명높은 신전들을, 향하여 밀어 내는 우상을 숭배하는 환상(idolatrous illusion)과 비교합니다(제11절)

3. There is light, life and joy only in the sanctuary of the living God and "blessed are those" who "trust" in the Lord, choosing the path of righteousness (cf. vv. 12-13). The image of the way takes us to the heart of the Psalm (cf. vv. 5-9) where another, more important pilgrimage is made. Blessed are those who dwell in the temple in a stable way and even more blessed are those who decide to undertake a journey of faith to Jerusalem.

3.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성소 안에는 오로지 빛, 생명 그리고 기쁨(joy)만이 있으며 그리고, 의로움의 길(the path of righteousness)을 선택함으로써, 주님에 대하여 "신뢰하는 자들은 복을 받습니다(are blessed)" (제12-13절). 이 길에 대한 묘사는 우리들을 이 시편의 심장(heart, 본심)으로 데려가는데 (제5-9절 참조), 거기에서 또다른, 더 중요한 순례가 행하여집니다. 안정된 방식으로 성전 안에 거주하는 자들은 복을 받으며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믿음의 어떤 여행(a journey of faith)에 착수하는 자들은 심지어 더 복을 받습니다.

 

In their comments on Psalm 83, the Fathers of the Church give v. 6 a special prominence: "Blessed is he who finds his strength in you, whose heart is set upon the holy pilgrimage". The early translations of the Psalter spoke of the decision to complete the "ascensions" to the Holy City. Therefore, for the Fathers the pilgrimage to Zion became the symbol of the continuous progress of the righteous toward the "eternal tents" where God receives his friends into full joy (cf. Lk 16,9).


Let us reflect for a moment on this mystical "ascent" that finds in the earthly pilgrimage an image and a sign. We will do so through the words of a seventh-century Christian writer who was abbot of the monastery on Sinai.

교회의 교부들은, 시편 83(84)에 대한 자신들의 주석들에서, 다음과 같은 제6절에 특별한 두드러짐(prominence)을 제시합니다: "자신의 굳셈(strength, 용기, 용덕)을 당신 안에서 발견하고, 이 거룩한 순례를 열망하게 된 자는 복되도다." 이 시편집(Psalter)의 초기 번역본들은 이 거룩한 도성(Holy City)으로 "올라감(ascensions)들"을 달성하기 위한 결심(decision)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부들에게 있어 시온(Zion)을 향하는 이 순례는, 거기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친구들을 충만한 기쁨 안쪽으로 맞아 들이는(루카 복음서 16,9 참조), "영원한 거처(eternal tents)"를 향하는 의로운 자들의 지속적인 나아감에 대한 상징(symbol)이 되었습니다.

 

잠깐 동안, 이 땅에서의 순례 안에서 어떤 모습(an image)과 어떤 표징(a sign)을 발견하는, 바로 이 신비적(mystical) "오름(ascent)"에 대하여 숙고합시다(reflect). 우리는, 시나이(Sinai)에 있는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이었던, 7세기의 그리스도교 저술가의 표현들을 통하여 이것을 행할 것입니다.

 

4. This is John Climacus who dedicated an entire treatise - The Ladder of Divine Ascent - to illustrating the countless steps by which the spiritual life ascends. At the end of his work, he gives the last word to charity itself, which he sets at the top of the ladder of spiritual progress.

4. 이 분은, 그것에 의하여 영적 생명(the spiritual life)이 올라가는 셀 수 없는 계단들을 예증함(illustrating)에 대한 어떤 전체적 취급 - 하느님에 의한 오름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 낙원의 사다리)- 에 헌신하였던, 요한 클리마코(John Climacus, 7세기)입니다. 자신의 일의 끝에다, 그는 애덕(charity, 사랑) 자체에 마지막 표현(word)을 제시하는데, 이 표현을 그는 영적 나아감의 사다리(the ladder of spiritual progress)의 꼭대기에 놓습니다.

 

It is charity that invites and exhorts us, proposing sentiments and attitudes already suggested by our Psalm: "Ascend, my brothers, ascend eagerly. Let your hearts' resolve be to climb. Listen to the voice of the one who says:  "Come let us go up to the mountain of the Lord, to the house of our God" (Is 2,3), Who makes our feet to be like the feet of the deer, "Who sets us on the high places, that we may be triumphant on his road" (Hb 3,19). Run, I beg you, run with him who said, "let us hurry until we all arrive at the unity of faith and of the knowledge of God, at mature manhood, at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Christ's fullness" (cf. Eph 4,13). (La Scala del Paradiso, Rome 1989, p. 355. In English, The Ladder of Divine Ascent, Paulist Press, Ramsey, N.J. 1982, p. 291).

우리의 시편에 의하여 이미 넌지시 암시되고 있는(suggested) 감회(sentiments)들과 태도(attitudes)들을 제안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우리를 초대하고 그리고 간곡히 타이르는 것은 바로 애덕(charity, 사랑)입니다: "오르도록 하라, 나의 형제들이여, 열망하여 오르도록 하라. 그대의 심장의 결심(resolve)이 오르는 것이 되도록 하라.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우리의 하느님의 집으로!" (이사야 2,3), 그분께서는 우리의 발들을 사슴의 발들처럼 만드시고,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길 위에서 의기양양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축여 높은 장소들로 치닫게 하신다" (하바쿡 3,19). 내가 그대에게 간청하니, "우리 모두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일치 그리고 지식의 일치에, 성숙한 사람다움에,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라는 수준의 치수에, 도달할 때까지 서두르도록 합시다" (에페소 4,13 참조) 라고 말하였던 그자과 함께 달리도록 하라, 달리도록 하라." [La Scala del Paradiso, Rome 1989, p. 355. 영어로, The Ladder of Divine Ascent, Paulist Press, Ramsey, N.J. 1982, p. 291].

 

5. The Psalmist thinks first of all the concrete pilgrimage that leads to Zion from various places in the Holy Land. The rain that falls seems to be for him a foretaste of the joyful blessings that will envelop him like a mantle (cf. Ps 83[84],7) when he comes face to face with the Lord in the temple (cf. v. 8). The gruelling journey through "the valley of tears" (cf. v. 7) is transfigured by the certainty that God who gives strength is the conclusion (cf. v. 8), that he hears the prayer of the faithful (cf. v. 9) and becomes the "shield" that protects him (cf. v. 10).

5. 이 시편작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거룩한 땅(Holy Land, 즉 이스라엘)에 있는 다양한 장소들로부터 시온(Zion, 즉 예루살렘)으로 이르게 하는 구체적인 순례(concrete pilgrimage)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내리는 비는 그의 경우에, 그가 성전에서 주님과 직접 대면하여 만날 때에(시편 84,8 참조) 한 벌의 외투(a mantle)처럼 그를 덮어쌀 기쁨의 축복들(joyful blessings)에 대한 어떤 미리 조금 맛봄(a foretaste)인 것으로 생각됩니다(시편 83[84],7 참조). "슬픔의 골짜기(the valley of tears)"를 통과하는 엄벌하는 여행(gruelling journey), 굳셈(strength, 용기, 용덕)을 제공하시는 하느님이 결론이라는 확신에 의하여(시편 84,8 참조), 당신께서 열심 신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리하여 그를 보호하는(사편 84,10 참조) "방패(shield)"가 되신다는(시편 84,9 참조) 확신에 의하여, 거룩하게 변화됩니다.

 

The concrete pilgrimage is transformed in this light - as the Fathers intuited - and becomes a parable of the whole of life, set between distance from and intimacy with God, between the mystery of God and his revelation. Even in the desert of daily life, the six workdays are made fruitful, illuminated and sanctified by the meeting with God on the seventh day, through the liturgy and prayer of our ecclesial gathering on Sunday.

이 구체적인 순례는, 교부들이 직관하였듯이(intuited), 바로 이 빛 안에서 일변(一變)되며(is transformed) 그리하여, 하느님으로부터의 거리와 하느님과의 친밀 사이에 있는, 즉 하느님의 신비(mystery)와 당신의 계시(revelation) 사이에 있는, 삶 전체에 대한 한 개의 비유(a parable)가 됩니다. 심지어 일상의 삶으로 이루어진 광야(desert)에서도, 주일(Sunday)에 우리의 교회 모임(ecclesial gathering)에 있어서의 전례(liturgy)와 기도(prayer)(*)를 통하여, 일곱 번째 날에 하느님과의 만남에 의하여 교화되고(illuminated) 그리하여 성화되어(sanctified), 여섯 근무일(the six workdays)들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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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전례와 기도"에는, 전례인 "성무일도"의 끝 기도이며 그리고 기도인 "묵주기도"의 끝 기도에 결합된,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성모 찬송(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기도가 포함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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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us walk then, when we are in the "valley of tears", keeping our eyes fixed on the bright goal of peace and communion. Let us repeat in our hearts the final beatitude, which is like an antiphon that seals the Psalm:  "O Lord of hosts, blessed is the man who trusts in you!"(v. 13).

그래서, 우리가 "눈물의 골짜기(valley of tears)" [즉, 후회/뉘우침의 이 세상/세속의 삶(주: 위의 제3-2-1항 에서 다루고 있는 이 표현의 자구적 어미(literal sense) 참조)] 안에 있을 때에, 평화와 하나 됨(친교, 통공, communion)이라는 빛나는 목표에 우리의 눈들을 고정시키면서, 걸어가도록 합시다. 이 시편을 봉인하는(seals) 한 개의 후렴(an antiphon) 비슷한, 다음과 같은 최후의 참 행복(final beatitude)을 우리의 심장(hearts, 본심)들 안에서 되풀이하여 말하도록 합시다: "만군의 주님 당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시편 84,13).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번역자 주:
(1)
위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석을 잘 읽어 보면, 특히 위의 해설 중의 제5항이,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성모 찬송(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기도문에서 "the vale of tears" 표현이 등장하는 문장, 즉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의 첫 부분, 즉 "슬픔의 골짜기" 에 대한 해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이 구절에서 "슬픔"으로 번역되는 표현은 영어로 "tears" 혹은 "weeping"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 표현은 그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에 있어, "기쁨(joy)"과 상반되는 정(情, passion)인, "후회/뉘우침(sorrow)"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성경의 본문에서 "슬픔/후회/뉘우침(sorrow)"이 언급되고 있는 다음의 구절들 중의 몇 개의 구절들과 관련지어 묵상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55 sorrow    
    6 sorrowful
    1 sorrowfully
    1 sorrowing
    4 so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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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6. 이상 살펴본 바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다교 시절에, "계약의 궤"가 다윗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2사무엘 6,12-19), 그 아들인 솔로몬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주님의 집)이 지어지고(1열왕 6,1-18),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 안의 다윗 성에 모셔져 있었던 "계약의 궤"를 성전(주님의 집)으로 모시고, 그리고 성전을 하느님께 봉헌한(1열왕 8,1-66) 이후부터, 거룩한 땅에 살고 있는 12살 이상의 유다인 남자들은 매년 세 번은, 즉 매년 무교절(파스카), 수확절(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추수절)에, 예루살렘에 위치한 성전(주님의 집)을 의무적으로 순례하여 바로 이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바쳐야 하였는데,(*) 시편 84, 이들 예루살렘 성전으로의 순례자들이 "슬픔의 골짜기"로 단적으로 표현되는 순례라는 어려운 여정 속에서도, 당시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현존하고 계신다고 믿고 있었던하느님을 순례의 종착지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뵈올 것이라는 영적인 기쁨(spiritual joy)을 예상하면서 불렀던 "경건한 순례자들의 노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하느님께서도 진실로 기뻐하실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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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예루살렘의 성전(주님의 집)이 하느님께 봉헌된 이후부터, 유다인들이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는, 유다교의 모세 율법에 따라(탈출기 23,14-19; 신명기 16,1-16; 1열왕 8,10-11; 1열왕 9,3), 자신의 집 근처의 회당 혹은 높은 산 위에 위치한 산당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뿐이었음을 꼭 상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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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1. 바빌론 제국의 임금인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이후에 있었던 세 번째 바빌론 유배 이후에, 이 바빌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리고 팔레스티나 지역을 차지하였던 페르시아 제국의 임금인 키루스의 칙령에 의하여 재건되었던 예루살렘의 성전은, 기원후 70년에 로마 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그리하여 그 결과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지 않은 유다인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주님의 집)에서 더 이상 하느님께 제사를 바칠 수가 없게 되었으며, 그리고 무려 2천년 정도가 경과한 지금까지도, 이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7-2. (질문 1) 기원후 70년에 발생하였던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 이후에, 성전의 파괴 이전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던 유다인들의 제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질문 1에 대한 답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던 유다인들의 제사는,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전례 안쪽으로 계승되었고 그리고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히브리서를 잘 읽도록 하십시오.

7-3. (질문 2)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순례자들의 노래"인 시편 84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다교의 전례를 계승한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서, 유다교에서처럼, 온전하게 노래되어 왔을까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유다교의 전례를 충실하게 계승한 그리스도교 전례 안쪽에서 당연히 노래되어 왔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인 1969년에 개정된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력을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i) 시편 84는.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다해 성가정 축일의 화답송(시편 84,2-3.5-6.9-10)으로 노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제16주간 토요일, 제17주간 목요일, 제23주간 금요일, 제34주간 금요일의 화답송들로 그 일부가 발췌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클릭하면 확보할 수 있습니다.

(ii) 시편 84는,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에 속하는 "성무일도"에서, 매월 제3주간 월요일 아침기도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iii) 더 나아가,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770항에서 그 일부가 본문 중에 발췌 인용되고 있는 "순례자들의 노래"시편 84는, 그리스도교 초기 교회 시절인 2세기쯤에, 창세기 3,15의 원복음 말씀에 대한 그리스도교측 고유의 해석 및 에페소서 1,10에 근거하는, 리옹의 성 이레네오에 의하여 도입된, "총괄복귀/총귀/수렴" 개념에 근거하여, 드디어 12세기쯤"성모 찬송(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기도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생각이며, 이어서 가톨릭 교회의 공적 기도/예배인 성무일도의 마침 기도들 중의 한 개로서, 유다교 전례를 충실하게 계승한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즉, 시편 84에 담긴 "순례자들의 희망/소망"은,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에 포함되는, 성무일도 안의 "성모 찬송(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기도로 발전하여, 이 "성모 찬송(살베 레지나; Salve, Regina)"는 지상에서의 순례 여정에 있는 우리들 사이에서, 묵주기도의 끝기도로서 뿐만이 아니라,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특히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 및 수도자들 사이에서 성무일도의 끝기도로서, 바쳐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끝으로,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New_Eve.htm (필독 권유)

피조물인 동정 마리아께서 "새 하와(New Eve)"로 불림과 함께 그리스도교측에서 시작하게 되는, 성모 공경의 그리스도교 신학적 근거인 리옹의 성 이레네오"recapitulation[총괄복귀(總括復歸)/총귀(總歸)/수렴]" 개념에 대한 필자의 글들 중의 일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성모 찬송(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기도는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공적 기도/예배) 안의 기도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1월 2일]


이에 반하여,

게시자 주: "성모 찬송(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기도문의 유래/역사 등에 관한 글들은 또한 다음의 주소들에 있는데:

(1) http://www.newadvent.org/cathen/13409a.htm
(2) http://www.newadvent.org/cathen/01575b.htm
(3) http://en.wikipedia.org/wiki/Salve_Regina

특히 바로 위의 (1)에는 이 기도문의 역사가 상당히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바로 위의 (1)에는, "성모 찬송(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기도에 대한 16세기에 처음 나타난 개신교측 17세기의 얀센주의 이단자들의 반발들이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언급되고 있다:

(발췌 시작)
Luther complained that the anthem was sung everywhere throughout the world, that the great bells of the churches were rung in its honour, etc. He objected especially to the words "Queen of mercy, our life, our sweetness, our hope"; but the language of devotion is not that of dogma, and some Protestants, unwilling that it should disappear from Lutheran churches, reconstructed it "evangelically" (e.g., a version in use at Erfurt in 1525: "Salve Rex aeternae misericordiae".) The Jansenists found a like difficulty, and sought to change the expression into "the sweetness and hope of our life" (Beissel, I, 126).


마르틴 루터(Luther)는 이 찬미가(ahthem)가 세상 전체에 걸쳐 어디에서든 노래되고 있다, 교회들의 커다란 종들이 이 찬송가에 경의를 표하여 종이 울려진다는 등으로 불평하였습니다. 그는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Queen of mercy, our life, our sweetness, our hope)" 라는 표현에 대하여 특히 반대하였으나, 그러나 신심(devotion)의 언어는 교의(dogma)의 언어가 아니며, 그리고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루터파 교회들로부터 이 찬미가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이것을 "복음적으로(evangelically)" [예를 들어, 1525년에 Erfurt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다음과 같은 한 개의 개작(a version)으로: "Salve Rex aeternae misericordiae(자비의 영원한 왕이시여"] 재구성하였습니다(reconstructed). 얀센주의자(the Jansenists)들도 어떤 비슷한 어려움을 발견하였으며, 그리하여 이 표현을 "the sweetness and hope of our life(우리의 삶의 기쁨과 희망이시여)" 으로 바꾸는 것을 시도하였습니다(Beissel, I, 126).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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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1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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