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2동성당 게시판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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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은영 [key61] 쪽지 캡슐

2000-04-18 ㅣ No.178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흐렸군요.

우아한 목련과 화사한 벚꽃이 지겠지만 정말 비가 그립습니다.

 

몇 일전 성당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파트 담장 아래에서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 분이 호미를 들고 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내고 계신 모습이 눈에 띄였습니다.

잡초밭 사이에 조그만 돌들로 가지런히 경계를 지어 놓은 것을 보니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그 곳이 바로 텃밭이었어요.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 보니 제가 아는 것은,

음..., 대파, 열무(?), 그리고 무슨 조그만 싹이 잡초들 사이에서 잡초처럼 같이 살고 있더라구요.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수다를 떨며 알아낸 사실,할머니께서  잡초를 뽑아내며 조심스레 남겨놓으신 <조그만 싹> 그게 글쎄 제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상추>라는데 생소하더군요.

(걔가 상추처럼 안생겼거든요.)

언제 씨를 뿌리셨냐니까, 지난 가을에 뿌리셨답니다.

정말 놀라왔어요.

그곳은 겨울엔 정말 추운 곳이거든요. 항상 매서운 바람이 이는 장소였단 말입니다.

그곳에서 긴 겨울을 지내고 다시 싹을 틔우다니.

갑자기 가슴이 환해 지면서 주책스럽게 눈물이 나려는거 있지요.

잡초 같은 걔가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나 장하다는 느낌과 생명의 그 놀라운 힘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기뻤어요. 또 감사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말대로 나풀거리며 걸었습니다.

 

 

 다음날,

그곳에 들렀습니다.

이제는 잡초들이 다 뽑혀졌고 돌담(?)들도 정비가 되어 누가 보아도 텃밭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잠깐동안이지만 걔네들 하고 인사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또 다른 생각이 일었습니다.

<내가 뿌린 씨앗>

알게 모르게 나에게서 나간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도록 오래도록 숨죽이고 있다가 어느 땐가 드러나지 않을까?

격식과 예의를 갖추고 대하게 되는 타인들에 비해 내 가족,특히 내 자녀들에게 얼마나 많은 <잡초 씨앗>을 뿌렸을까?

금방은 아무런 해가 없는 듯, 아무 영향이 없는 듯 보일지라도 내 기준으로 내 욕심으로 아이들을 묶지는 않았는지.

내가 나무라는 아이들이 모습이 바로 내가 뿌린 씨앗의 결과라는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리고는 책임을 아이들에게 묻고 있는 한심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전엔, 나는  예수님을 못박을 만한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왜 예수님이 날 위해, 내 죄의 사함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더이상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떼 쓰지 않으렵니다.

오로지 주님의 자비만을 바랍니다.

 

 "주님, 제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자비를 믿습니다.

긴 겨울 조그만 씨앗을 덮어주었던 흙, 솜처럼 포근한 눈, 따뜻한 햇볕, ...

조그만 씨앗에서 싹을 틔워 주시는 그 자비를 바랍니다.

제가 상처 준 그 마음들을 낫게 하여 주시고 당신이 심으신 아름다운 씨앗을 틔워 주십시오.

잡초를 뽑던 노인의 거칠고 주름진 손처럼 저도 제 자신과 이웃에 뿌려서 키웠던 잡초를 뽑도록 애쓰겠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ps> "아참, 주님, 봄비 좀 내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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