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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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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18 ㅣ No.14

[교리 해설]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하성호 요한(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어떻게 뭉게구름을 타고 하늘 나라로 올라가실 수가 있었을까?’ 따뜻한 여름날 소한테 꼴을 먹이던 한 꼬마가 하늘에 피어난 뭉게구름을 호기심에 찬 눈망울로 바라보며 자주 생각하던 궁금증이었다. 어디 요즘 아이들이야 그런 동심을 품으리요만. “엄마 그땐 비디오도 없었어?” 빛 바랜 동심의 밑바닥만 혼란스럽게 드러낼 뿐이다
 
 
하늘에 올라
 
마냥 신비롭게만 생각하던 하늘 위로 비행기가 떠다니고 우주선이 왔다 갔다 한다. ‘달나라의 토끼’는 도망친 지 몇 십 년이 되었고 ‘계수나무’도 죽은 지 벌써 오래다. 신화 속에 갇혀 있던 인간의 생각은 그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와 자꾸만 과학을 절대화하고 과학 앞에서만 무릎을 꿇으려 한다. 옛 소련의 한 우주 비행사는 지구의 궤도를 벗어나 “하늘에 신은 없다.”는 말을 지구로 보내 왔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해서 하늘의 신비로움이 모두 사라진 걸까?
 
성서에 근거한 사도 신경이 말하는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적인 우주관의 태도로 바라본 하늘이 아니다. 옛사람들이 생각하던 하늘은 근동 지방의 사람들이 생각하던 우주관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위에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걸려 있는 창공이 있고, 그 창공 위에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한 우주관에 근거해서 생각해 본다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은 하느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는 그분이 지상에 파견된 자신의 일을 끝마치시고, 원래 자신이 계셨던 그곳에 영광된 모습으로 되돌아가신다는 사실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그리스도론적인 신앙 고백이다.
 
원래 그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시고(그리스도의 자기 비하)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과 더불어 사셨고 마지막엔 살아 있는 인간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내려가셨다. 인간이 사는 지상 위에 창공이 있고 그 위에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듯이, 지상 아래엔 죽음의 세계인 고성소가 있다고 여겼다.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막장인 고성소에 내려가신 그분의 철저한 자기 비움은 이미 그분을 가득 채울 영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성소에 내리시어”라는 신조를 고백할 때, 우린 “하늘에 올라’라는 신조를 이미 준비했던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고성소에 내려갈 수가 있지만, 그 고성소에서 다시 “하늘에” 오를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여기서 우린 하늘이란 표상을 다시 생각해야겠다. 하늘은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하늘에 올라”라는 표현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초월하는 세계, 곧 하느님의 세계에 들어가셨다는 표현이고, 이는 바로 부활의 신비를 심도 있게 확장시켜 주고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예수 승천의 신비는 예수님을 둘러싼 구원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아야지, 결코 승천을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의 같은 파스카 사건을 여러 측면으로 나누어서 전례적으로 거행하는 것은 그 신비의 의미가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가 전하는 예수 승천
 
어떤 복음서는 직접 예수 승천을 보고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복음서는 간접으로 승천을 보고한다. 간접적인 경우는 요한 복음 20장 17절을 들 수가 있겠다. ‘나를 만지지 마시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르코와 루가는 직접 승천 기사를 다루는데, 사도 행전과 차이가 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빈 무덤이 발견되고, 예수께서 그날 제자들에게 발현하셨으며 저녁에 승천하신 것으로 보고한다. “예수께서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 당신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그들로부터 떠나가시었다. 그리고 하늘로 이끌리어 올라가셨다”(루가 24,50-51). 사도 행전 1장 3절은 “예수께서는 고난을 당하신 뒤에 여러 가지 증거로써 그들에게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고 전한다.
 
여기서 우린 루가와는 달리 사도 행전이 전하고 있는 ‘사십’이라는 숫자를, 손꼽아 헤아린 역사적인 숫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성서적인 숫자의 의미로 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성서에 보면 노아의 홍수가 사십 주야에 걸쳐 일어났고,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을 광야에서 살았으며, 모세가 하느님의 산에 올라가 사십 주야를 지냈다. 그러한 성서적 의미에서 사십이란 숫자는 사방을 가득 채우는 충만함, 그릇이란 그릇은 모조리 다 채우고도 남는 충분함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에서도 사십이란 숫자는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예수께서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며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듯이, 사십 주야에 걸쳐 부활의 영광된 모습으로 발현하신 것이다. 여기서 사십은 충분했던 예수 비하에 대조시켜 부활 영광의 충만함을 표현하고 있다.
 
승천 장소에 관한 보고도 다르다. 마르코 복음에선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승천하셨다고 한다(16,7). 갈릴래아는 예수께서 전도를 시작하신(1,14) 곳이다. 그러니까 시작과 마침이 결합되어 있다. 루가 복음은 베다니아에서(24,50), 사도 행전은 올리브산에서(1,12) 승천하신 것으로 보고한다. 올리브산은 예수께서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기도하신 곳이다. 그곳에서 이제 그분은 영광된 모습으로 들어 높여지셔서 성부의 품에 드셨다. 사도 행전은 이렇게 예수 비하의 사건과 들어 높여진 사건을 대조시키고 있다.
 
예수 부활 사건에 관한 기사가 복음서마다 다르게 표현된 그 점에서 우린 부활 사건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있는,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암시하듯이, 승천 기사의 그러한 차이는 이 세상에 속한 시간과 공간적인 제한이 담지 못할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서가 말하는 승천의 신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건이고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속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결국 성서가 전하는 승천 기사는 부활을 충만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치 부활하신 분의 발현이 빈 무덤을 더 잘 이해하게 하고 믿게 하였듯이, 승천은 부활하신 그분을 영광스럽게 들어 높임으로써 발현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 준다. 그래서 승천은 부활의 시작인 무덤으로부터 일어남과 부활의 완결인 성령 강림 사이를 이어 준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고,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고, 성령께서 오시는 등 이러한 일련의 주제들은 하나의 사건인 파스카 신비의 여러 측면이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이제 우리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라는 신조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오른편에 앉다’는 표현은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누구이신가를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신원’과 ‘직위’와 ‘기능’을 말해 준다. 고대 근동인의 생각에 따라 임금님의 오른편 자리는 임금님의 전권을 행사하는 이를 위한 자리였다. 그래서 하느님의 오른편 자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권을 행사하는 이를 위한 자리라고 생각했었다. 사도 신경은 승천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심을 그러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 신적인 위엄과 전능의 권한을 행사하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즉위하시는 모습이다.
 
우선 그러한 표현과 사상의 틀은 성서에서 주어진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구약의 메시아 시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승천을 전한다. “그리하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하늘로 맞아들여져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떠나가서 사방에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며 표징들이 따르게 하심으로써 말씀을 굳건히 뒷받침하셨다”(마르 16,19-20). 마르코가 인용한 메시아 시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야훼께서 내 주께 선언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시편 110,1). 마르코의 승천 기사와 시편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다”라는 표현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에 참여하심을 고백한다. 이미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이를 반증하셨다. “어떻게 율사들이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윗 자신이 성령에 힘입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도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잡아) 놓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하였습니다.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습니까?”(12,35-37). 이 내용을 루가 복음에선 예수께서 재판받으실 때 하신 말씀으로 전한다. “지금부터 인자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입니다”(루가 22,69). 그분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까지 구원 역사를 주관하시는 당신의 권능을 펼치실 것이다.
 
결론으로 보아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라는 신조의 고백 내용은 예수께서 가지신 새로운 존재 양식을 의미한다. 사도 신경이 전하는 내용은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이해에 관한 내용이고, 더 이상 인간 차원에서가 아니라 신적 차원에서 그분은 위엄과 영광과 권능을 지니신 존재이심을 드러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 그분은 인간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추억의 인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새로운 차원의 존재 양식을 택하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영원 안으로 초대해 주시고,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와 함께 영구히 살아 계시는 우리의 주님으로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전능하시기에 우리네 인생살이 구석구석까지 찾아오셔서 늘 함께해 주시는 분, 사라져 버린 당신이 아니라 멀리하기엔 너무나 괴로운 늘 다가오시는 임마누엘이시다.
 
[경향잡지, 199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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