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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134: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51 - 여명의 소리, 요한 세례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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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20 ㅣ No.392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34)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1) - 여명의 소리, 요한 세례자 (상)

광야서 외친 ‘회개하여라’… 신약(新約)의 서막을 올리다

 

■ 절규가 찼을 때

요한 세례자! 그는 한 마디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선 경계인이었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조연으로 꼽히는 그는 구약의 종점(終點)이며 신약의 시점(始點)이었다. 그가 맡은 배역의 우뚝함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최고의 인물평이며 최상의 찬사다. 그 장본인 요한 세례자의 존재론적 주가를 드높인 것은 무엇보다도 잔혹했던 400년의 침묵, 곧 정적의 흑야였다.

하느님 예언 말씀의 기근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말라키 이후 그야말로 몰인정했다. 스스로 ‘자비의 하느님’이라 홍보했던 하느님께서 정치·경제적으로 질곡에 빠진 당신 백성을 외면하시고, 장구한 세월이 흐르도록 아예 하늘 문을 닫으시고 소통 길을 끊어 버리시다니!

나라는 페르시아 제국(BC538-), 마케도니아 제국(BC333-), 막간에는 시리아 왕국(BC198-), 그리고 마침내 로마 제국(BC63-)에 의해 차례로 유린당하여 꼴은 말이 아니고, 그나마 위로와 인내의 원천이었던 예언 말씀마저 뚝 끊겼으니, 그 답답함이란 과연 어떠하였을까. 뜬금없이 버림받은 자의 당황, 상상조차 불허하는 낭패의 형국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 대상은 둘 중 하나!

첫째 대상은 당연히 ‘메시아’였다. 과거 숱한 예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날’ 곧 ‘주님의 날’에 ‘반드시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인물, ‘기름부음받은 이’, 우리말로 ‘구원자’를 목 빼어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

둘째 대상은 예언자. 그를 통해서 현실적 수난의 출구에 대한 하느님의 언질, 나아가 메시아 시대의 도래에 대한 하느님의 천기누설을 듣고 싶은 심정 간절했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당신 백성을 이토록 비참 속에 내팽개치실 수 있나! 오신다는 그분은 감감무소식이고, 아직 때가 아니라면 위로의 한마디라도 해 주시면 좋으련만 어째서 예언자는 나오지 않는가?”

그들의 기도는 탄식도, 절망도 아니요, 그저 중얼거림일 따름 아니었을까.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확실한 것은 도처에서 백성들의 절규가 하늘을 찔러댔다는 사실이다.

“아, 하늘을 쪼개고 내려오십시오”(이사 63,19 참조).

이 절규가 필요절대량에 달했을 때, 이윽고 때가 찼다. 그리하여, 저 피 섞인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의 예수님이 보냄 받는다. 해결사요 답이신 예수님이 보내진다. 거의 동시대적으로 그분에 앞서 요한 세례자가 보내진다.


■ 광야에 울린 소리

드디어 침묵을 깨는 음성이 들렸다. 발원지는 불모의 광야. 소리의 우렁참에 소문은 삽시간에 쫘악 퍼졌다.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들더니, 어느새 구름떼 같은 인파를 이뤘다.

가서 보니 시선집중 주인공의 몰골과 행색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 3,4). 눈빛을 보니 형형하다. “아하, 이분은 정말 하늘에서 온 분이 틀림없어”라는 느낌이 팍팍 온다. 그의 말투는 권위에 찬 호통이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회개하여라? 어디다 대고 대뜸 반말인가! 하지만 기분 상하지 않았다. 들려온 것은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하늘 나라’는 물을 것도 없이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를 뜻한다. ‘하느님의 통치’는 하느님께서 몸소 임금이 되어 통치하신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는 직관적으로 다의적인 희망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곧 지긋지긋한 외세의 압제로부터 해방된다는 얘기구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당신 백성으로 삼아주시어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로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희소식이네!”

어쨌든, 반가운 소리다. 지루한 침묵을 깨고 광야를 가르는 소리. 여러 세기 가뭄에 내린 단비다. 그런데, 자꾸만 얼른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되뇌어진다.

“누구지? 예언자인가? 예언자로 치기에는 말발이 센데. 엘리야인가? 모양새로 보면 꼭 엘리야인데. 언젠가 마지막 때에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러 오실 것이라던 엘리야, 바로 그 엘리야인가? 그분도 아니라면, 메시아인가? 우리의 궁극적인 바람인 그 ‘구원자’말야….”

이런 물음들이 속 시원히 답변되지 않은 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몰려왔다. 그리고 그의 강력한 초대를 따라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6).

무엇인가에 홀린 듯 세례를 받았지만,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는 여전히 미궁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빗발치듯 물음이 던져졌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숨김없이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이로써 얼추 궁금증이 풀린 셈이다. 일단 그 자신이 ‘주님’, 곧 ‘하느님 나라’를 통치할 메시아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예언자 아니면 엘리야다! 다음 글에서 밝혀지겠지만 그는 이 ‘둘 다’이면서 ‘둘 다’가 아니다. ‘둘 다’를 포괄하면서 ‘둘 다’를 넘어서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사명이다. 이 사명의 때를 위하여 그는 광야에서 얼마나 자주 무릎을 꿇었을까. 괜시리 그의 곁에서 그의 고독한 기도에 화음을 넣어주고 싶어진다.

저는 소리
당신은 말씀.
저를 이 땅에 보내신 이시여,
미구(未久) 어느 찰나
텅 빈 소리
우렁찬 목청으로
인적 끊긴 광야를 가를 때,
거기
지엄하신 말씀을 태워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천하를 호령하게 하소서.

저는 소리
당신은 말씀.
저를 돌처녀(石女)의 태중에 지으신 이시여,
원시의 소리
메뚜기와 들꿀과 새벽이슬로 고이 빚다가
때가 참에
400년 천형의 침묵을 깰 때,
거기
덩더쿵 복음 말씀 싣고
메시아의 도래를 선포하게 하소서.

저는 소리
당신은 말씀.
저 외칠 때
거기 말씀으로 오시어
당신께선 잠자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고,
저 질러 댈 때
거기 말씀으로 임하시어
당신께선 목석같던 심금을 울리시고,
저 속삭일 때
거기 말씀으로 깃드시어
당신께선 기죽었던 폐부를 어루만져 주소서.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9월 20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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