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사욕/사욕편정(concupiscence, desire, cupidity, covetousness) vs 칠죄종들 중 다섯 개인 과도한(inordinate) 욕망들 792_ 얀센주의

인쇄

. [121.190.18.*]

2021-09-27 ㅣ No.2278

 

즉, 

 

사욕/사욕편정(concupiscence)에는, 다음과 같이, 본성적(natural) 혹은 비본성적(non-natural), 이렇게 원초적인(primal) 것들 둘로 구분된다:

 

(i) 그 대상에 무관하게 속적으로(generically) 지니고 있는, 즉, [본성적], 사욕/사욕편정(natural concupiscence)

  = natural cupidity


(ii)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결과, 죄(sin)의 상태가 아닌integrity의 상실의 상태] 그 종적인(specific) 대상[즉, (a) 피조물 혹은 (b) 창조주]에 따라 수동적으로(passively) 받아들이게 되는 쏠림/기울어짐(tendency)이 동일하지 않은, 즉, [비본성적], 사욕/사욕편정 혹은 욕망([non-natural] concupiscence or desire)(*) 

  = (a) [non-natural] cupidity([비본성적]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 즉, covetousness, 혹은

     (b)[nan-natural] caritas(charity)([비본성적]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

 

-----

(*) 게시지 주:

"desire or concupiscence" "summa theologiae" site:newadvent.org 

"concupiscence or desire" "summa theologiae" site:newadvent.org 

-----

 

 

그리고

 

욕구(appetite) 안에만 오로지 사욕/사욕편정(concupiscence/cupidity/covetousness)이 있을 수 있고,

 

사욕/사욕편정(concupiscence/cupidity/covetousness) 안에만 오로지 사랑(love, amor, love of concupiscence)이 있을 수 있으며,

 

사랑(love, amor, love of concupiscence) 안에만 오로지 욕망(desire or concupiscence/cupidity/covetousness)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욕망(desire or concupiscence/cupidity/covetousness) 안에만 오로지 열정(zeal)이 있을 수 있고,

 

열정(zeal) 안에만 오로지 경쟁(rivalry)이 있을 수 있으며,

 

경쟁(rivalry) 안에만 오로지 시기(jealousy)가 있을 수 있고,

 

시기(jealousy) 안에만 오로지,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또한

 

과도한 욕망(inordinate desire or concupiscence/cupidity/covetousness) 안에만 오로지 과도한 열정(inordinate zeal)이 있을 수 있고,

 

과도한 열정(inordinate zeal) 안에만 오로지 과도한 경쟁(inordinate rivalry)이 있을 수 있으며,

 

과도한 경쟁(inordinate rivalry) 안에만 오로지 과도한 시기(inordinate jealousy)가 있을 수 있고,

 

과도한 시기(inordinate jealousy) 안에만 오로지,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가 있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07.htm <----- 첨부된 유관 "신학 대전" 본문 또한 필독 권고
[제목: Ia IIae q23. 정(情, passions)들의 구분 [신학대전여행]: 초벌 번역일자: 2012년 10월 24일; 게시일자: 2012-12-10] 

(발췌 시작)

23. The Distinction of the Passions


23. 정(情, passions)들의 구분


1. The word passion means an undergoing. When sensitive appetite operates, the body undergoes some modification, some change. Sometimes such change is manifested outwardly, as, for instance, in the bright eye and animated manner of a person speaking of what he loves; or in the flushed face and stammering tongue of a man who is very angry. Passion is a kind of recoil or kick-back of the operation of sentient appetite; it is what a sentient being undergoes because of the functioning of such appetite. There are two kinds of passions, and they take their general names from the appetites they follow; thus we distinguish the concupiscible passions which follow the concupiscible appetites, and the irascible passions which follow the irascible appetites. The concupiscible passions are: love(amor) and hatred; desire and aversion; joy or delight, and sorrow or grief or pain. The irascible passions are: hope and despair; fear (timidity) and courage (daring), and anger.

 

1. 정(情, passion)(*)이라는 단어는 어떤 경험함(an undergoing)을 뜻합니다. 외부의 작인(作因)/동인(動因)(external agents)들에 의하여 흥분하게 될 수 있는 욕구(sensitive appetite)가 작동할(operates) 때에, 몸은 어떤 변경(some modification)을, 어떤 변화(some change)를 경험합니다. 때로는 그러한 변화가, 예를 들어, 자신이 사랑하는 바에 대하여 말하는 어떤 자의 빛나는 눈과 활기에 찬 태도(animated manner)에서, 혹은 매우 분노한 어떤 사람의 홍조를 띄게 된 얼굴과 더듬거리는 말투에서 겉으로 분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정(情, passion)은 감각 인상(sense impressions)에 반응하는 욕구의 작동에 의한 어떤 종류의 되튐(recoil) 혹은 반동(kick-back)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어떤 감각 인상(sense impressions)에 반응하는 있음(a sentient being)이 그러한 욕구의 기능 행위(functioning) 때문에 경험하는(undergoes) 바입니다. 두 종류의 정(情, passions)들이 있으며,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뒤따르는(follow) 욕구들로부터 자신들의 일반적 이름들을 취하며, 그리하여 그 결과 우리는 사욕(私慾, concupiscence)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욕구(the concupiscible appetites)들을 뒤따르는 사욕(私慾, concupiscence)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정(情)(the concupiscible passions)들분발(奮發)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욕구(the irascible appetites)들을 뒤따르는 분발(奮發)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정(情)(the irascible passions)들을 구분합니다.(**) 사욕(私慾, concupiscence)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정(情, passions)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love, amor, 즉, love of concupiscence)증오(hatred), 욕망(desire or concuposcence)혐오(aversion), 기쁨(joy) 혹은 환희(delight), 그리고 후회/뉘우침(sorrow) 혹은 비탄(grief) 혹은 아픔(pain). 분발(奮發)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정(情, passions)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희망(hope)절망(despair), 두려움(fear)[소심(timidity)]과 용기(courage)[대담무쌍(daring)], 그리고 분노(anger).

 

-----
(*) 번역자 주:
(1) 여기서 "정(情)"으로 번역된 "passion" 이라는 용어는 다음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서 "어떤 인간적 욕구의 격렬한 동요(動搖, motion, 움직임)(intense motion of a human appetite)" 라고 설명되고 있다:
http://www.catholicreference.net/index.cfm?id=35430 [주: 옛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5_passion.htm


 (2) "情(정)" 이라는 한자의 의미는 "밖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 욕심()에 연결되는 감정()" 이다:
출처: http://hanja.naver.com/hanja?q=%E6%83%85

(발췌 시작)
: 음()을 나타내는 (청→정)과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이라는 뜻이 합()하여 '정'을 뜻함. (정)은 순수한 타고난 성질대로의 사람의 마음, (청)은 (생)에서 생겨났음. 情(정)도 본디는 (성)과 같은 글자였으나, 나중에 타고난 성질쪽을 (성), 밖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 욕심()에 연결되는 감정()쪽을 (정)이라 하여 구별()하게 되었음
(이상, 발췌 끝) 

(**) 번역자 주: 
(1) (i) "신학대전여행" Ia q59 a4의 설명, 그리고 (ii) 다음의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이들 스콜라 철학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따르면, "concupiscible" 이라는 단어는 '동의할 수 있는, 특히 감각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된 국면 아래에서 선(good)으로 기울어지는 어떤 욕망(a desire)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을 뜻하며, 그리고 이 단어의 의미에 반대되는 단어인 "irascible" 라는 단어는 '어려움 혹은 위험과 함께 오로지 획득되는 바로 그러한 것으로 기울어지는 욕망(desire)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을 뜻한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mw/u_d.htm


concupiscible : 1 : motivated by a desire for good under the aspect of the agreeable especially the sensuously agreeable -- used chiefly by Scholastic philosophers of the appetite and the passions; opposed to irascible


iracible : 2 a : moved by desire for that which is attained only with difficulty or danger b : stirred by combative emotions (as anger, pride, courage, fear) -- opposed to concupiscible 


(2)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번역 용어들로서 이들 두 단어들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나타내는 한자 단어들을 찾을 수 없어, 그리고 이들 두 단어들의 자구적 의미가 설명되고 있지 않은 다음의 자료들을 또한 참고하여, "concupiscible" 는 "사욕(私慾[이기적인 욕심], concupiscence)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으로 번역하였고, "irascible" 는 "분발(奮發)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들 번역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가, 바로 위의 (1) 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각각 '동의할 수 있는, 특히 감각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된 국면 아래에서 선(good)으로 기울어지는 어떤 욕망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concupiscible)' 및 '어려움 혹은 위험과 함께 오로지 획득되는 바로 그러한 것으로 기울어지는 욕망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iracible)' 임을 숙지하도록 하라:


http://www.aquinasonline.com/Topics/sensappt.html 
http://rockywa.hubweb.net/technote/read.cgi?board=robib10&y_number=23&nnew=2
(이재룡, 이동익, 조규만 번역, 신학대전 요약 제2부 제23문)


http://114.108.140.109/~bumhan/s_data/54-7.hwp
(이진남, 지성과의 화해,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욕구 개념, 범한철학회논문집 제54집 2009년 가을)
-----

 

2. The concupiscible passions stand related to good and evil simply. Love(amor) is for good, hatred for evil; desire is for good, aversion for evil; joy is for good, sorrow for evil. But the irascible passions are related to good and evil under the aspect of difficulty. Hope is for a good in some degree difficult to achieve; despair is for an evil too difficult to avoid; fear is for an evil hard to escape; courage is for a good difficult to attain; anger is resentment of an evil difficult to throw off. As they work out, all irascible passions turn into concupiscible passions: hope and courage, once successful, are turned into love(amor) and joy; anger, fear, and despair, when their force is spent, end in sorrow, and sometimes, when they have been mistaken or groundless, they end in joy.

 

2. 사욕(私慾, concupiscence)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정(情)(the concupiscible passions)들은 단제(單體)적으로(simply) 선(good)악(evil)에 관련되어 일어납니다(stand). 사랑(love, amor, 즉, love of concupiscence)은 선(good)에 대하여, 증오(hatred)는 악(evil)에 대하여, 그리고 욕망(desire)은 선에 대하여, 혐오(aversion)는 악(evil)에 대하여, 그리고 기쁨(joy)은 선(good)에 대하여, 후회/뉘우침(sorrow)은 악(evil)에 대하여. 그러나 분발(奮發)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정(情)(the irascible passions)들은 어려움의 국면 아래에서(under the aspect of difficulty) 선(good)악(evil)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희망(hope)은 성취하기(achieve) 힘든 어떤 정도에 있는 어떤 선(a good)에 대한 것이며, 그리고 절망(자포자기, despair)은 너무 힘들어서 회피할 수(avoid) 없는 어떤 악(an evil)에 대한 것이며, 그리고 두려움(fear)은 탈출하기(escape) 힘든 어떤 악에 대한 것이며, 그리고 용기(courage)는 획득하기(attain) 힘든 어떤 선에 대한 것이며, 그리고 분노(anger)는 버리기(throw off) 힘든 어떤 악에 대한 분개(resentment) 입니다. 그들은 어떤 요망되는 혹은 성공적인 방식으로 발전함에 따라, 모든, 분발(奮發)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정(情)(irascible passions)들은 다음과 같이 사욕(私慾, concupiscence)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정(情)(concupiscible passions)들로 바뀝니다: 희망용기는, 일단 성공적이면, 사랑기쁨으로 바뀌게 되며, 그리고 분노, 두려움, 그리고 절망은, 그들의 힘이 지치게 되었을 때에, 후회/뉘우침(sorrow)으로 끝나며,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오해를 받아왔거나 혹은 근거가 없을 때에, 그들은 기쁨(joy)으로 끝납니다.

 

3. Anger is the only passion of the soul which is not paired off with a  contrary passion. For anger stands alone among the passions in having no natural contrary. Serenity might be called a contrary state, but serenity is not a passion.

 

3. 분노(anger)는, 어떤 상반되는 정(情, passion)과 함께 짝지어지지 않는, 영혼의 유일한 정(情)입니다. 이는 분노가, 자연적 정반대를 전혀 가지지 않음에 있어, 정(情)들 중에서 홀로 서 있기(stands) 때문입니다. 침착(serenity)이 어떤 반대의 상태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나, 그러나 침착은 어떤 정(情)이 아닙니다.  

 

4. Some passions are specifically distinct (within their genus as concupiscible or irascible) without being opposed. Thus love(amor) and joy are specifically different passions, but they can exist together with reference to the same object. Nay, one may cause the other, as love(amor) for a good thing attained causes joy in possessing it.

 

4. 일부 정(情, passions)들은 반대됨 없이 [그들의 속(屬, genus)(*) 안쪽에서 사욕(私慾, concupiscence)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것으로서 혹은 분발(奮發)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구분됩니다. 따라서 사랑(love,amor, 즉, love of concupiscence)기쁨(joy)은 구체적으로 다른 정(情)들이나, 그러나 그들은 동일한 대상과 관련하여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nay), 어떤 선한 사물에 대하여 획득된 사랑(love, amor, 즉, love of concupiscence)이 그것을 소유함에 있어서의 기쁨(joy)을 야기하듯이, 하나는 다른 하나를 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 번역자 주: "속(屬, genus)"의 의미 혹은 개념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70.htm
-----

----------
우리말 번역문 출처: http://club.catholic.or.kr/tourofsumma
영어본 원문 출처: http://www.catholictheology.info/summa-theologica/summa-part2A.php?q=221 

(이상, 발췌 끝)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79.htm <----- 첨부된 유관 "신학 대전" 본문 또한 필독 권고
[제목: Ia IIae q24, 정(情, passions)들에 있어 윤리적 선과 악 [신학대전여행]; 초벌 번역일자: 2012년 11월 22일; 게시일자: 2021-09-30]

(발췌 시작)

24. Moral Good and Evil in the Passions


24. 정(情, passions)들에 있어 윤리적 선과 악


1. The passions of the soul as movements of man's sensitive part are outside the scope of moral classification; they are neither morally good nor morally bad. But in so far as these passions are truly of the soul because the will accepts them and renders them voluntary, they have moral goodness or moral evil.

1. 사람의 감각들에 의하여 경험하게 되는 부분(sensitive part)의 움직임(movements)들로서 영혼의 정(情)(the passions of the soul)들은 윤리적 분류(moral classification)의 범위 바깥에 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윤리적으로 선하지도(morally good) 않고 그리고 윤리적으로 악하지도(morally evil)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 정(情, passions)들이, 의지가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그들을 자발적(voluntary)이 되게 하기 때문에, 진실로 영혼에 기인하는(of the soul) 한, 그들은 윤리적 선함(moral goodness) 혹은 윤리적 악(moral evil)을 가지고 있습니다. 


2. When the will permits a disorder, an inordinateness, in the passions they are evil. But passions rightly controlled by reason (that is, the intellectually illuminated will) are the occasions of virtue, not of vice. Thus, for example, love(amor), hope, and desire enhance, and do not defile, the will's drive for good.

2. 의지가 정(情, passions)들에, 어떤 무절제함인, 어떤 무질서를 허락할 때에 그들은 악이 됩니다. 그러나 이성[즉, 지성적으로 교화된(illuminated) 의지]에 의하여 올바르게 통제되는 정(情, passions)들은 덕의 계기(契機)(the occasions of virtue)들이지, 악(evil)의 계기(契機)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사랑(love, amor, 즉, love of concupiscence), 희망(hope), 그리고 욕망(desire or concupiscence)은 선(good)을 향하는 의지의 충동(衝動)(drive for good)을 강화하며(enhance), 그리고 이 충동을 더럽히지(defile) 않습니다.


3. Therefore passions controlled by reason are morally good. A good act performed with feeling as well as with intention is all the better for thus coming more completely from the whole man. But when passions rise suddenly or strongly before the will can choose its act (and they are then called antecedent passions), they obscure the mind's judgment and the will's ready control, and thus they tend to diminish or destroy the goodness of a human act. When passion follows the will-act (and this is consequent passion) it does so either (a) because of the reaction of lower to higher appetites in man, or (b) because the will directly arouses the sentient appetites so as to have their prompt cooperation. In good acts, consequent passion indicates the will's intensity in good; when directly stirred up by the will, consequent passion increases the goodness of the good act. Thus, for instance, a man may directly rouse up courage to help him perform some difficult duty. Here the good act is all the better for having courage joined to good purpose.

3. 그러므로 이성에 의하여 통제되는 정(情, passions)들은 윤리적으로 선(morally good)합니다. 의도(intention)와 함께 뿐만이 아니라 느낌(feeling)(*)과 함께 수행되는 어떤 선한 행위는 그러한 방식으로 전체 사람으로부터 더 완전하게 나오기 때문에 더 낫습니다. 그러나 정(情, passions)들이 의지가 그 행위를 선택하기 전에 갑자기 그리고 강렬하게 일어날 때에 [그리고 그럴 때에 그들은 전건(前件)적 정(antecedent passions)들이라고 불립니다], 그들은 마음의 판단과 의지의 준비된 통제를 가려(obscure), 그리하여 그 결과 그들은 어떤 인간의 행위의 선함을 줄이거나 혹은 파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情, passion)이 의지-행위(will-act)를 뒤따를 때에 [그리고 이것은 후건(後件)적 정(consequent passion)입니다], 그것은 (a) 사람에게 있는 저급에서 고급으로의 욕구(lower to higher appetites)들의 반응(reaction) 때문에, 혹은 (b) 의지가 감각 인상(sense impressions)에 반응하는 욕구들을, 그들의 즉각적 협조를 가지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분기시키기(arouses) 때문에, 이들 둘 중의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선한 행위(good acts)들에 있어, 후건(後件)적 정(情)(consequent passion)은 선(good)에 대한 의지의 강렬함을 나타내며, 그리고 의지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분기될(stirred up) 때에, 후건(後件)적 정(情)(consequent passion)은 이 선한 행위의 선함(goodness)을 증가시킵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떤 어려운 임무를 자신이 수행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용기(courage)를 직접적으로 일어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 선한 행위(the good act)는, 용기를 선한 목적(good purpose)에 합류하게 하기 때문에, 더 낫습니다. 

-----
(*) 번역자 주: "느낌(feeling)" 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5.htm
-----

4. Passions take their own specific good or evil quality from that of the act to which they incline a man.

4. 정(情, passions)들은 그들 고유의 구체적인 선한 혹은 악한 특성(quality)을, 그것을 향하여 그들이 사람을 기울어지게 하는, 행위(the act)의 바로 그 특성으로부터, 취합니다(take).


----------
우리말 번역문 출처: http://club.catholic.or.kr/tourofsumma
영어본 원문 출처: http://www.catholictheology.info/summa-theologica/summa-part2A.php?q=222 

(이상, 발췌 끝) 

 

따라서,

 

11개의 종류들로 구분되는, 동사형 명사인 정(情, passions)들 중의 하나인 욕망(desire)에 포함되는 다음의 다섯 개의 종적(specific) 정(passions)들과 관련하여,

 

(a)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교만(pride, superbia), 즉,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 탁월(excellence) 쪽으로, 수동적으로(passively) 혹은 능동적으로(actively) 응답하는 과정에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되는 과도한[즉, 이성의 통제를 벋어난],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in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한 개의 죄(a sin)임. 

 

따라서,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 탁월(excellence) 쪽으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됨에도 불구하고 과도하지 않은[즉, 이성의 통제 아래에 있는],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은 한 개의 죄(a sin)가 아님.

 

(b)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탐욕(avarice, avaritia),(*1) 즉,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2) 재물(wealth, riches) 쪽으로, 수동적으로(passively) 혹은 능동적으로(actively) 응답하는 과정에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되는 과도한[즉, 이성의 통제를 벋어난],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in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은, 십계명들 중의 6계, 7계, 9계 및 10계를 포함하는한 개의 죄(a sin)임. 

 

-----

(*2) 게시자 주: 예를 들어, 어떤 자가. 본인이 소유하고자 하는 물질적인 그 무엇을 구매하기 위하여, 필요한 돈(money)를 소유하기 위한 한 수단(a means)으로서, 부자인 자 혹은 부자를 부모로 둔 자를 배우자로서 선택하여 결혼하고자 함을 고안하는(devise) 경우에 있어, "본인이 소유하고자 하는 물질적인 그 무엇을 구매하기 위하여"로 서술된 부분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에 해당한다.

 

또다른 예를 들어, 어떤 자가. 본인이 소유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편안한 생활을 획득하기 위하여, 그 획득 과정에 있어 필요한 그 무엇을 소유하기 위한 한 수단(a means)으로서, 의사(medical doctor), 공무원, 교사 등 특정 직업을 선택하여 획득하고자 함을 고안하는(devise) 경우에 있어, "본인이 소유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편안한 생활을 획득하기 위하여"로 서술된 부분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에 해당한다.

 

(*1) 게시자 주: (1)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영어본 "신학 대전"에서 라틴어 "avaritia""covetousness"로 잘못 번역된, 번역 오류들를 확인할 수 있음:

http://www.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Part_IIa/Q72#q72a2ad4 

http://www.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Part_IIa/Q72#q72a6sc

http://www.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Part_IIa/Q72#q72a6co 

 

특히,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에페소서 5,3에서 "covetousness"/"greed"로 번역되는 바는, 칠죄종들에 포함되는 "avarice"를 말함을 확인할 수 있음:

http://www.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Part_IIa/Q72#q72a2arg4 

 

(2)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에서 라틴어, "avaritia"가, 제1866, 2534, 2536, 2541, 그리고 2552항, 이렇게 총 다섯 항들에서, 모두 "covetousness" 대신에, "avarice"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www.intratext.com/IXT/ENG0015/2/N7.HTM 

 

(ii) 그러나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에서, 라틴어 "avaritia"가 제1886항 바로 이 한 개의 항에서만 오로지 "avarice"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www.intratext.com/IXT/FRA0013/_H6.HTM#9GG 

 

그리고 나머지 항들 모두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제2534, 2536, 2541, 그리고 2552항: "cupidité" (즉, cupiditas)

 

(iii)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997년에 초판 발행된 라틴어본 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534, 2536, 2541, 그리고 2552항에서, 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에서처럼, "cupiditas"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vatican.va/archive/catechism_lt/p3s2c2a0_lt.htm#ARTICULUS 10  DECIMUM PRAECEPTUM

 

(iv) 그런데, 라틴어본 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제2534, 2536, 2541, 그리고 2552항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읽어보면,

 

(a) "cupidity"라는 명사가, 이들 항들에서 단독으로 사용된 것이 결코 아니고, 대신에,

(b) 그 의미를 "avarice"로 제한하는 한 개의 용례(usage)를 제시하거나[제2534항의 경우], 

(c) 형용사 "inordinate" 혹은 이에 등가인 형용사가 "cupidity"와 함께 사용되거나[제2536항제2552항의 경우], 혹은

(d) 정관사 "the"를 사용하여 그 의미가 또한 바로 앞의 항(들)에서 사용된 동일한 단어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제2541항의 경우]을,

 

독자들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기술하여, 결국에, 재물에 대한 "inordinate desire"(과도한 욕망), 즉,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처럼 "avarice"(탐욕)의 의미로, 이들 항들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부록(Appendix)에서, 라틴어 "avaritia"가,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및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398항에서처럼 "avarice"로 번역되는 대신에, "covetousness"로 잘못 번역 되었음(번역 오류)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2005cccc.htm

(발췌 시작)

The seven capital sins:

1. Pride
2. Covetousness <----- 번역 오류
3. Lust
4. Anger
5. Gluttony
6. Envy
7. Sloth

(이상, 발췌 끝)

 

(4)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경우에 그 본문에서 "cupidity"라는 영어 단어 자체를, 라틴어 단어 "cupiditas"에 대응하는 한 개의 번역 용어로서,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나 바로 이점은 필자로서는 매우 납득하기 힘들다:

 

출처: http://www.intratext.com/IXT/ENG0015/_FA4.HTM 

(발췌 시작)
    2 cum
   18 cup
    1 cura 

(이상, 발췌 끝)

-----

 

따라서,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 재물(wealth) 쪽으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됨에도 불구하고 과도하지 않은[즉, 이성의 통제 아래에 있는],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은 한 개의 죄(a sin)가 아님.

 

(c)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음욕(lust, luxuria), 즉,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 성적 쾌락(sexual pleasure) 쪽으로, 수동적으로(passively) 혹은 능동적으로(actively) 응답하는 과정에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되는 과도한[즉, 이성의 통제를 벋어난],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in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한 개의 죄(a sin)임. 

 

따라서,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 성적 쾌락(sexual pleasure) 쪽으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됨에도 불구하고 과도하지 않은[즉, 이성의 통제 아래에 있는],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은 한 개의 죄(a sin)가 아님.

 

(d)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분노(anger, ira), 즉,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 보복(報復, revenge) 쪽으로, 수동적으로(passively) 혹은 능동적으로(actively) 응답하는 과정에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되는 과도한[즉, 이성의 통제를 벋어난],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in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한 개의 죄(a sin)임. 

 

따라서,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 보복(報復, revenge) 쪽으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됨에도 불구하고 과도하지 않은[즉, 이성의 통제 아래에 있는],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은 한 개의 죄(a sin)가 아님.

 

(e)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식탐(gluttony, gula), 즉,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 음식(food and drink) 쪽으로, 수동적으로(passively) 혹은 능동적으로(actively) 응답하는 과정에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되는 과도한[즉, 이성의 통제를 벋어난],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in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한 개의 죄(a sin)임. 

 

따라서,

 

어떤 목적인(a final cause) 때문에 음식(food and drink) 쪽으로 자유 의지(free will)의 개입[즉, 견물생심(見物生心)]에 의하여 야기됨에도 불구하고 과도하지 않은[즉, 이성의 통제 아래에 있는], 비원초적인, [비본성적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ordinate, non-primal, [non-natural]cupidity/concupiscence/covetousness), 즉, 행동 중인 사욕[私慾, 이기적인 욕심, 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in action)은 한 개의 죄(a sin)가 아님

 

 

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 덕(Virtue)의 의미" 제목의 글[게시일자: 2010-11-03]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70.htm

(발췌 시작)

Nevertheless, there is a valid sense in which even the theological virtues observe a kind of mean, or better, a center of gravity to which they tend. As far as God is concerned, He can never be believed in, trusted or loved too much. But from our point of view, we should exercise these virtues according to the measure of our condition. Christian faith goes midway between heretical extremes, for instance between Pelagianism which dispenses with divine grace and Jansenism that denies a free will; Christian hope must choose a path among the numerous prospective means of salvation; and Christian charity must find a balance in the myriad opportunities for loving God.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심지어 향주덕들마저도, 그들이 향하고 있는, 중용의 한 종류, 혹은 더 좋게(or better), 중력의 중심(a center of gravity)을 관찰하는(observe), 타당한 의미(a valid sense)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관련된 이상, 당신께서는 너무 많이 믿게 되거나, 신뢰하게 되거나, 혹은 사랑하게 될 수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상태라는 기준(the measure of our condition)에 따라 이들 덕들을 실천하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Christian faith)은, 이단적 극단들 사이에서, 예를 들어 하느님의 은총을 배제하는 펠라지우스주의(Pelagianism)자유 의지(free will)를 부정하는 얀센주의(Jansenism) 사이에서, 중도로 가며(go midway),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희망(Christian hope)은 수많은 원근 화법에 맞는(perspective) 구원을 위한 수단(means of salvation)들 사이에서 하나의 길(path)을 선택하여야만 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Christian charity)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무수한 기회들에 있어 균형을 찾아야(find a balance in)만 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9월 28일]
-----
(*) 게시자 주: 여기서 말하는 "얀센주의"(Jansenism)은, 예수회의 고발에 의하여 이단으로 단죄받은, 소위 말하는, "교의적 얀센주의"(dogmatic Jansenism)를 말할 것이다.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의 졸글/졸고들을 학습할 수 있다:

(발췌 시작)
게시자 주 2-5: (1) 한편으로, 즉, 우리들 쪽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측에서,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을 죄가 있는 분으로 만드시어 모든 이(all)를 위하여 돌아가게 하심으로써(로마 8,32; 2코린토 5,14)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즉, 소위 말하는 "객관적 구속(objective redemption)"을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all)들을 다 하신 까닭이, 하느님께서 모든 이(all)들의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임은 만고불변의 주지의 진실, 즉, 진리인 사실입니다.(*1) 

 

-----

(*1) 게시자 주: 얀센주의자(Jansenists)이 바로 이 교의(dogma)를 거부하다가, 1647년 1월 24일자로, 가톨릭 교회의 교황 교도권에 의하여 이단이다(heretical)라고 단죄되었음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DS 제2005항(덴징거 제2005항)에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dxe.htm#ce4 

-----

 

(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즉, 우리들 쪽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접촉(contact)의 대상인 각 인격(each person)에게 자유 의지(free will)를 주시어(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54-155항), 각 인격이 바로 이 자신의 고유한 자유 의지의 행사를 통하여,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느님과 바로 이 하느님에 기인하는 초자연적인 그 무엇(something supernatural)들을, (i) 영접하거나/받아들이거나(accept), 혹은 (ii) 거부할(refuse) 수 있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97항, 제415항), 자유/자유로움(freedom)을 [그리하여 그 결과, 각자의 윤리적 행실/습성(moral behavior)에 있어, 소위 말하는 "주관적 구속(subjective redemption)"을] 또한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고 또 존중하심(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11항)은 만고불변의 주지의 진실, 즉, 진리인 사실입니다.

 

(3) 그리고 바로 위의 제(1)항제(2)항에저 말씀드린 바는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이 가르쳐 온 전통적 진리들로서, 특히 특정 지역 언어으로의 번역 과정에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없는, 교의(dogmas)들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2)

 

-----

(*2) 게시자 주:  "객관적 구속(objective redemption)"과 "주관적 구속(subjective redemption)"에 대한 안내의 글들인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졸글들의 일부는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2.htm <----- 필독 권고

[제목: 객관적 구속과 주관적 구속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1년 10월 20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7.htm <----- 필독 권고

[제목: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라는 부분이란? - 콜로새 1,24, 게시일자: 2012년 11월 21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4.htm <----- 필독 권고

[제목: 변성(變成)함(becoming)에 있어 연(緣)의 필연성(necessity) 혹은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 게시일자: 2014년 6월 16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89.htm <----- 반드시 필독 권고

[제목: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안에서만 오로지 의화가 가능하다; 게시일자: 2016년 4월 21일]

------

 

(4) 그러나, 각자의 윤리적 행실/습성(moral behavior)에 있어, 사람의 자유/자유로움(man's freedom)이 아담(Adam)과 하와(Eve)가 범한 원죄(original sin)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었다(radically distroyed)고 16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최초로 주장하기 시작한 마르틴 루터(1483-1546년)(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06항 참조)와 그러한 주장의 맹목적 추종자들인 국내의 개신 교회 측의 일부 분파들은, 바로 위의 제(2)항에서 간략하게 말씀드린 각 인간의 자유 의지의 역할/기능에 대한 교의 신학 가르침을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여전히 거부하며, 대신에,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그리스어본 및 영어본 2코린토 5,21; 2코린토 8,9 등에서 "so that ... might ..." 라는 표현으로 서술된 문장에서,(*3) 2코린토 5,21의 우리말 번역과 관련하여 위의 제2-4항 제2-5항(경우 2)(경우 3)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미력한 필력으로나마 구체적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might"가 의미하는 바를 의도적으로/고의적으로/작위적으로 감추는/누락시키는 번역 오류를 자행하였다는 지적을 아니 드릴  수 없습니다.(*4) 

 

-----

(*3)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이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https://biblehub.com/interlinear/2_corinthians/5-21.htm 

https://biblehub.com/2_corinthians/5-21.htm 

 

https://biblehub.com/interlinear/2_corinthians/8-9.htm 

https://biblehub.com/2_corinthians/8-9.htm 

 

(*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이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Parall.php?version=GAE&rdoReadType=1&book=2co&chap=5&sec=21&sec1=1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Parall.php?version=GAE&rdoReadType=1&book=2co&chap=8&sec=9&sec1=1 

-----

 

(5) 교회의 역사 안에서 거의 450여년 전에 발생한 사정이 바로 위의 제(5)항에 지적한 바와 같음을 몰랐기 때문이겠지만, 2005년에 초판 발행된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5,21의 우리말 번역문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국내의 개신 교회 측의 우리말 번역문들과 대동소이함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Parall.php?version=GAE&rdoReadType=1&book=2co&chap=5&sec=21&sec1=1 

 

(6)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각자의 윤리적 행실/습성(moral behavior)에 있어, 사람의 자유/자유로움(man' freedom)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730-1748항들의 가르침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3s1c1a3.htm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657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이상, 게시자 주 2-4 끝)

(이상, 발췌 끝) 


참고 자료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1877-1964_Garrigou-Lagrange/trinity2.htm [주: PC 혹은 노트북에서 접속 후, Shift_F4 누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나타나는 "찿기" 창에 "Jansen"을 입력할 것]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This question is not of minor importance and it arises again when we speak of original sin and its consequences, under the question, "whether all the good of human nature is destroyed by sin."[1029] The Protestants[마르틴 루터 및 그의 추종자들, 즉, 개신교회 측 사람들] and Jansenists[가톨릭교회 내부의 얀센주의자들] said that by original sin man's liberty was destroyed. On the other hand, most of the theologians of the Society of Jesus say that in the state of fallen nature man's powers are no weaker with respect to moral good than in the state of pure nature; the Thomists and Augustinians teach that man's powers are weakened although his freedom is not extinguished.[1030]

(이상, 발췌 끝)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1877-1964_Garrigou-Lagrange/christ2.htm [주: PC 혹은 노트북에서 접속 후, Shift_F4 누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나타나는 "찿기" 창에 "Jansen"을 입력할 것]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State and difficulty of the question. It is certain that the soul of Christ was endowed with free will, which means not only freedom from internal compulsion, but also from external constraint. The Catholic Church defined against Calvin, Luther, and Jansenius, that free will implies these two kinds of freedom. The third condemned proposition of Jansenius reads: "For meriting and demeriting in the state of man's fallen nature, freedom from internal compulsion is not required; it is sufficient to be free from external constraint."[1400] This means that the contradictory proposition is true, namely, for meriting and demeriting in the state of man's fallen nature, not only freedom from external constraint or spontaneity is required, which is found in the irrational animal, but also freedom from internal compulsion, or a dominating indifference of choice, under the direction of free judgment, as St. Thomas explains.[1401] He also says: "The will of Christ, though determined to good, is not determined to this or that good. Hence it pertains to Christ, even as to the blessed, to choose with a free will confirmed in good."[1402]

 

Where there is no command there is no difficulty, and so Christ freely chose Peter as His vicar in preference to John.

 

It is of faith that Christ had free will, because it was defined that there are two inconfused natures in Christ, and that each nature retains its own properties, faculties of understanding and willing, and each its own operations.[1403]

 

The Catholic Church likewise defined that Christ freely merited and satisfied for us.[1404] But, as already stated, against the Jansenists, free will is required for meriting, and freedom from internal compulsion.

 

All Catholic theologians are agreed on these declarations and they reject the teaching of Jansenius, who said that Christ was interiorly compelled to observe the command of His Father, since freedom from external constraint was, in the opinion of Jansenius, sufficient for meriting.

(이상, 발췌 끝)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1877-1964_Garrigou-Lagrange/reality.htm [주: PC 혹은 노트북에서 접속 후, Shift_F4 누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나타나는 "찿기" 창에 "Jansen"을 입력할 것]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1877-1964_Garrigou-Lagrange/grace1.htm [주: PC 혹은 노트북에서 접속 후, Shift_F4 누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나타나는 "찿기" 창에 "Jansen"을 입력할 것]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1877-1964_Garrigou-Lagrange/grace2.htm [주: PC 혹은 노트북에서 접속 후, Shift_F4 누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나타나는 "찿기" 창에 "Jansen"을 입력할 것]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1877-1964_Garrigou-Lagrange/grace4.htm [주: PC 혹은 노트북에서 접속 후, Shift_F4 누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나타나는 "찿기" 창에 "Jansen"을 입력할 것]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1877-1964_Garrigou-Lagrange/grace5.htm [주: PC 혹은 노트북에서 접속 후, Shift_F4 누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나타나는 "찿기" 창에 "Jansen"을 입력할 것]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1877-1964_Garrigou-Lagrange/grace6.htm [주: PC 혹은 노트북에서 접속 후, Shift_F4 누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나타나는 "찿기" 창에 "Jansen"을 입력할 것]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umma/1877-1964_Garrigou-Lagrange/graceappend.htm [주: PC 혹은 노트북에서 접속 후, Shift_F4 누르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나타나는 "찿기" 창에 "Jansen"을 입력할 것] <----- 필독 권고

-----
[이상, 2021년 9월 28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 (1) 다음의 주소들에 점속하면, 얀센주의라고 불리는 이단의 주장을 제시한 "얀센"과 이 장에 동조한 자들을 말하는 "얀센주의자들"에 대한 교황 교도권의 단죄들을 덴징거, 즉, DS로부터 검색하여 읽을 수 있다:

"Jansen" site:clerus.org/bibliaclerusonline/en

"Jansenists" site:clerus.org/bibliaclerusonline/en 

 

(2) 그리고 이들 "얀센""얀센주의자들"의 단죄과 관련된 교황 교도권의 유관 교령에 대한 입문등 등 추가적인 자료들은, "하인리히 덴칭거 -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 선언 편람" [제44판, 원문 대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7년 3월 20일, 제1판1쇄, 책에 실려있다.

 

(3) 그리고 바로 이 덴징거/덴칭거(DS) 책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저술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2017년 7월 4일자로 필자에게 제공되었으며, 실제로 위의 제(1)항에 안내된 영문본 및 라틴어본 DS를 읽고 당시의 교황님들의 가르침들을 더 폭넓고 깊이있게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상, 게시자 주 1 끝)

 



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예수회의 교육 과정 전반에 걸쳐, 교수자들이 지켜야 하는, 1599년에 제정된 지침들에 포함된, 계몽주의자들 중의 한 명인, "에밀"이라는 책의 저자인 [자신의 친자들을 고아원에 모두 입양시킨] 루소가 또한 동의한, "얀센주의자들"의 공교육 철학/지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2-1773_예수회_in_China/1599_예수회_ratio.pdf

(제130쪽에서 발췌 시작)

The values of emulation in education have, of course, been challenged and denied. The Little Schools of Port-Royal (1646-1660) and the Jansenists, who viewed human nature as essentially corrupt, banned every form of competition in the classroom as well as on the playing field. A century later, Rousseau in his Emile, said: “It is very strange that ever since people began to think about education they should have hit upon no other way of guiding children than emulation, jealousy, envy, vanity, greediness, base cowardice, all the most dangerous passions . . . .“ (Everyman’s ed., pp. 55-56).

(이상, 발췌 끝)

 

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사람에게 있는 분노와 질투는 원죄의 결과들" 제목의 글[게시일자: 2012-01-21]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53.htm <----- 꼭 전문 필독 권고

 

4.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창세기 3,22 - 원죄로 상실당한 것들" 제목의 글[게시일자: 2012-04-24]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95.htm

(발췌 시작)

[...]

 

The Reformers, the Baians, and the ]ansenists admitted the reality of original sin, but misunderstood its essence and its operation, since they regarded it as identical with concupiscence which corrupts completely human nature. a: St. Augustine Conf. Art. 2.

 

[...]

 

b) Original Sin does not consist, as the Reformers, the Baians, and the Jansenists taught. in : "The habitual concupiscence, which remains, even in the baptised, a true and proper sin, but is no longer reckoned for punishment." The Council of Trent teaches that through Baptism everything is taken away which is a true and proper sin, and that the concupiscence which remains behind after Baptism for the moral proving is called sin in an improper sense only. D 792. That sin remains in man, even if it is not reckoned for punishment, is irreconcilable with the Pauline teaching of Justification as an inner transformation and renewal. The justified man is saved from the danger of rejection because the ground for the rejection, the sin, is removed. Rom. 8, I: "There is now, therefore, no condemnation to them that are in Christ Jesus." As concupiscence, in consequence of the composition of human nature out of body and spirit would be present, as natural evil, even in the pure state of nature, it cannot be sinful in itself, for God has created everything well. D 428.

 

[...]

(이상, 발췌 끝)

 

5.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Ia IIae q84 다른 죄의 원인으로서 하나의 죄(one sin)" 제목의 글[게시일자: 2016-02-02]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75.htm <----- 전문 필독 권고

(발췌 시작)

-----
(*1)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들을 클릭하면, 신학 대전 본문 중에 "inordinate"라는 단어가 총 306번 사용되고 있고 그리고 "inordinateness"라는 단어가 총 75번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www.intratext.com/IXT/ENG0023/PV.HTM
http://www.intratext.com/IXT/ENG0023/1/TZ.HTM

 

그리고 Merriam-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의 "excessive" 에 주어진 "inordinate"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발췌 시작)
INORDINATE implies an exceeding of limits dictated by [right] reason or good judgment.

 

과도(過度)한(inordinate)은 [올바른(right)] 이성 혹은 선한(good) 판단에 의하여 지령받는 [순서/질서(order)의] 범위(limits)의 어떤 초과 행위를 의미한다.(#)

 

-----
(#) 번역자 주: 이 설명은 다음에 있는 신학 대전에 주어진 설명들이 그 근거/출처라는 생각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21-09-30]

Ia,Iae, q24, a2:

http://www.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Part_IIa/Q24#q24a2co

[이상, 2021-09-30일자 내용 추가 끝]


IIa, IIae, q125, a1: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
Summa-IIb-123-127.htm#q125a1co
 [주: 옛 주소]

http://www.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Part_IIb/Q125#q125a1co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따라서, "ordinate"는 "[어떤, 인간의, 행위(a human act)가] 올바른 이성 혹은 선한 판단에 의하여 지령받는 순서/질서(order)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즉, "within the limits of order dictated by right reason or good judgment(올바른 이성 혹은 선한 판단에 의하여 지령받는 질서/순서(order)의 범위 안쪽에 있는"으로 정의됨(defined)을 알 수 있다.(#1)

 

-----
(#1) 번역자 주: 다음에 있는 용례 검색/분석에 의하면, 라틴어 원문 및 영문본 신학 대전 본문 중에서 "ordinate"가 "inordinate"의 반대말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는데, 그러나 문제는, 세속의 영어 사전에 "ordinate"라는 형용사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은 데에 있다:

"ordinate" "inordinate" "Summa Theologiae" site:logicmuseum.com/authors/aquinas [주: 옛 검색 주소]

"ordinate" "inordinate" "Summa Theologiae" site: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

-----
 

따라서, 부(富)/재물(財物)(riches)들에 대한 과도(過度)하지 않은(즉, [어떤, 인간의, 행위(a human act)가] 올바른 이성 혹은 선한 판단에 의하여 지령받는 순서/질서(order)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즉, 올바른 이성 혹은 선한 판단에 의하여 지령받는 질서/순서(order)의 범위 안쪽에 있는) 욕망(desire or concupiscence)은 결코 한 개의 죄(a sin)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과도한 재물욕망"은 "탐욕(avarice)"이라고 불리는 죄이나,

과도(過度)하지 않은 재물욕망(財物欲望, the desire for riches)은 죄가 아니다.

 

(*2) 번역자 주:

(i) 여기서 라틴어 "cupiditas"가,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 의하여 정의된 그 자구적 어의(literal sense)인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love, amor, 즉, love of concupiscence)", 즉,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지 않는 사랑", 즉, "애덕이 아닌 사랑"(#)을 쉽게 연상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프랑스어본 신학 대전에서처럼, 영어 단어 "cupidity"로 직역 번역되는 대신에, "covetousness"로 번역된 것은, 비록 이 영어 단어의 어원이 라틴어 "cupiditas"임에도 불구하고, 보통 수준의 독자들이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하여 정의된 그 자구적 어의를 연상하는 것을 상당히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영어권에서 이로부터 파생되는 개념적 혼란을 이미 야기해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 번역자 주: 다음의 글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37.htm

 

(ii)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가 자신의 저술인 "신학 대전", Ia, IIae, q30, a3에서, 라틴어 "cupiditas", 즉, "cupidity"의 자구적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 발췌한 것이다:

 

출처: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
Summa-IIa-30-34.htm#q30a3co
 [주: 옛 주소]

http://www.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Part_IIa/Q30#q30a3co
 (발췌 시작)
I answer that, As stated above (Article 1), concupiscence is the craving for pleasurable good. Now a thing is pleasurable in two ways. First, because it is suitable to the nature of the animal; for example, food, drink, and the like: and concupiscence of such pleasurable things is said to be natural. Secondly, a thing is pleasurable because it is apprehended as suitable to the animal: as when one apprehends something as good and suitable, and consequently takes pleasure in it: and concupiscence of such pleasurable things is said to be not natural, and is more wont to be called "cupidity." Accordingly concupiscences of the first kind, or natural concupiscences, are common to men and other animals: because to both is there something suitable and pleasurable according to nature: and in these all men agree; wherefore the Philosopher (Ethic. iii, 11) calls them "common" and "necessary." But concupiscences of the second kind are proper to men, to whom it is proper to devise something as good and suitable, beyond that which nature requires. Hence the Philosopher says (Rhet. i, 11) that the former concupiscences are "irrational," but the latter, "rational." And because different men reason differently, therefore the latter are also called (Ethic. iii, 11) "peculiar and acquired," i.e. in addition to those that are natural.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위에서(제1항) 서술되었듯이,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선(pleasurable good)에 대하여 간청하는/진정(眞正)으로 요청하는/간구하는(seriously demanding) 행위(craving, appetitus)입니다.(#2) 그런데 어떤 사물은, 두 가지 방식들로,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들의] 동물성(動物性, the animal)이라는 본성(nature)에 적합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음식, 음료 등, 그리하여 그러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사물들에 대한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은 본성적(natural)이라고 말해집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물은 즐거움을 줄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한 사람이 어떠한 사물을 선하고(good) 그리고 적합한(suitable) 것으로서 파악하고(apprehends) 그리하여 그 결과 그것에서 즐거움을 취할 때처럼, 그것이 [인간들의] 동물성(動物性, the animal)적합한 것으로서 파악되기(is apprehended as suitable to the animal) 때문이며, 그리하여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사물들에 대한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즉, 이기적인 욕심](concupiscence) 은 본성적이라고 불리지 않으며, 그리고 "cupidity" 라고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3) 그 결과로 첫 번째 종류의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 혹은 본성적 사욕/사욕편정은, 사람들과 다른 동물들에게 공통인데, 왜냐하면 둘 다에게 본성에 따라 적합하고 그리하여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 무엇(somethings)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들에 모든 사람들은 동의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철학자[즉,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Ethic. iii, 11)는 그들을 "공통이고(common)" 그리고 "필요한(necessary)" 것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종류의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은 사람들에게 고유한데(proper), 그들에게는 자연/본성(nature)이 요구하는 바로 그것을 넘어서, 그 무엇(something)을 선하고(good) 적합한(suitable) 것으로서 고안하는/발명하는(devise) 것이 고유합니다(proper). 따라서 이 철학자(Rhet. i, 11)는 전자의 사욕/사욕편정들은 "이성적이 아니고(irrational)", 후자의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들은 "이성적이다(rational)"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왜냐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추론하기/논리적으로 생각하기(reason) 때문에, 그러므로 후자들은 또한 "특유한(peculiar) 그리고 습득된(acquired" 것들이라고, 즉, 본성적인 것들에 추가하여 "특유한(peculiar) 그리고 습득된(acquired" 것들이라고 불립니다(Ethic. iii, 11).

 

-----

(#2) 번역자 주: 그러므로, 원죄(original sin)의 결과로서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유상종(類類相從)에 의하여 야기되는(신학 대전, Ia, IIae, q27, a3사랑(love, amor)[즉, 원초적 사랑(primal love)]"에 의하여 야기되고(caused) 그리고 감각을 수행하는 욕구(sensitive appetite, 감각 욕구) 안에 있는 한 개의 종(種)적 정(情, passion)인(신학 대전, Ia, IIae, q30, a1 & a2), 바로 이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concupiscence), 즉, 욕망(desire)은(신학대전, Ia, IIae, q25, a2), 설사 그 일어남에 있어 그 다음 단계인 욕망 행위(desiring)에 있다고 하더라도, 과도하지(inordinate)[즉, 올바른 이성 혹은 선한 판단에 의하여 지령받는 순서/질서(order)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은를 말하며, 따라서, 죄(sin)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오로지 [예를 들어, 탁월(excellence), 영광(glory), 재물(riches), 명예(honor) 등]과 같은 그 대상(object)인 끝(end)에 대한 과도한 욕망(inordinate desire) 죄가 있기(sinful) 때문이다.

 

(#3) 번역자 주:

(i) 따라서 "cupiditas(cupidity)"의 대상(objects)에는, 예를 들어, "돈(money)""문명의 이기들"의 온갖 종류들이 다 포함됨에 꼭 주목하라.

 

(ii) 또한 이들 두 종류의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들 그 자체들은 결코 죄(sins)들이 아님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발췌 끝) 

 

작성 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7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