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동성당 게시판

국화가 어울리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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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bkkim] 쪽지 캡슐

2000-08-23 ㅣ No.432

내가 자주 들르는 꽃가게는 지하철 5호선의 환승역의 한쪽에 있다. 처음 그 꽃가게가 세워지고 갖가지 꽃들로 채워져 탁하게만 느껴지는 공기를 조금은 희석시켜 주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반가왔다. 봄에는 후리지아와 카네이션 여름에는 장미와 백합이 바구니 가득하더니 얼마전부터 가을색이 짙은 국화가 종류별로 늘어서 있다. 캠프를 다녀오느라 서울을 비웠던 사이 가을이 부쩍 다가온 느낌이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추위도, 꺾이지 않을 듯한 더위도 때가 되면 기우니 그 섭리가 그저 신기할 뿐이다. 어제는 노란 소국을 한 단 샀다. 코끝에 대자 풍겨나는 향기가 엊그제 물기 머금은 산길을 걸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핑계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엄마를 맞는 반가움의 표시와 부쩍 꽃을 반가와 하시는 아빠와 축일을 자축하는 의미까지 서너가지지만 그냥 샀더라도 아까울 것 없이 충분히 아름다운 자태였다. 마루 장식장 위에 놓아둔 꽃을 지나칠 때마다 향기를 맡는 것이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데 그렇게 끌어다 앞에 두지 않으면 자연을 느끼는 것조차 힘들어진 생활이니 말이다. 새벽에 서둘러 일어나 공항에 가는 길은 더욱 가을이 완연했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서야 엄마를 만났지만 출근 시간에 쫓겨 동생과 차에 오르는 모습만 보고 걸음을 재촉해서 지하철을 탔다. 따지고 보면 수면시간으로는 그리 손해볼 것도 없는데 새벽잠 많은 게으름보라서 커피를 거푸 마시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래도 뭐하러 이른 시간에 마중을 나왔느냐고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치시는 엄마 얼굴을 보고 나오니 마음은 뿌듯하다. 물론 강박증이라고 불릴 만큼 부담스럽던 짐을 덜어서 좋기도 하지만 늦은 귀가를 들킬까 조마조마 하다. 집에 가면 다른 핑계들 모두 쏙 빼고 엄마를 위해서 꽃을 사다 놓았다고 아양부터 떨어야겠다. 치사하게 이르기 없기로 손가락이라도 걸어 둘 것을... 후회 막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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