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성당 게시판

수박 백 통

인쇄

김정이 [pear] 쪽지 캡슐

2002-07-04 ㅣ No.5457

 

매주 금요일에 내 차는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본부의 물류 운반 차량이 된다.

 

아침 아홉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양평동 물류쎈터로 가서, 전국의 가톨릭 농민회에서 생산하는 농산물과 가공식품들을 차에 가득 싣고 오전 미사를 마치는 시간에 맞춰 본당으로 돌아온다.

 

유정란, 두부, 콩나물, 상추, 오이, 고추, 양파, 오리쌀, 잡곡, 미숫가루, 쌀라면, 우리밀라면 등등을 한 차 가득 싣고 본당으로 돌아와 물건들을 펼쳐 놓으면 그야말로 차떼기 일일 장날을 세우는 장사꾼 아줌마가 된다.

 

지난 주 금요일에도 물류쎈터로 가서 이러 저러한 먹거리들을 차에 싣고 있는데 물류국장님이

" 한강 성당 수박 차떼기 한 번 하세요" 하셨다.

 

충북 음성 가톨릭 농민회가 생산한 수박을 빠른 시일 내에 소비해 줘야 하는데 소비가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본당으로 돌아와 보좌 신부님께 여쭙고 보좌신부님은 다시 주임신부님께 허락을 받고 주일 미사 신자들에게 수박 백통을 팔아 보기로 했다. 왜 이렇게 일을 갑작스럽게 벌이느냐고 주임신부님께 한 말씀 들었다고 보좌신부님이 머쓱해 하신다.

 

말이 수박 백통이지 수박 한 덩어리 무게만도 만만치 않은데 막상 팔겠다고 배달주문을 하고서도 그 무거운 수박을 성당에서 집까지 들고 갈 신자들 사정이 어떨지 막막해서 남대문 시장에 수박끈을 사러 나갔는데 구할 수가 없어서 커다란 비닐 봉지를 사가지고 왔다..

 

토요일 오후에 산지 농민이 직접 트럭을 몰고 와서 수박을 내려 놓는데

’ 어휴..저 많은 수박을 어찌 다 팔아야할까? 저장성이 있는 식품도 아니고 이 더운 날 하루만 묵혀도 안 될 수박을 어쩌자고 팔아주겠다고 나섰는지...’

 

우리농 운동을 하면서 생산지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거였지만 실로 제초제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은 수확물들은 그야말로 농부들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였다.

 

그런 농산물들이 제대로 가격 책정도 받지 못하고 이리 저리 채일 생각을 하면 가슴이 못내 쓰려왔었다. 내가 이런데 당사자들 심정이야 오죽할까?

 

농촌에서는 땅과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지어주면, 도시 소비자들이 그 생산물들을 바로 바로 소비해줘야 하는데, 비싸다고 외면당하고, 불신으로 의심받으며 유기농을 하지 않는 옆 농가 사람들에게도 함께 유기농을 하자고 권하기는커녕 판로 개척의 어려움으로 비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란 거였다.

 

소비자 확보가 급선무겠구나라는 사명감에 무작정 매장도 없는 본당에 일주일에 한번씩 소란스러운 장터가 열리기 시작했던 거다.

 

몸바쳐 시간바쳐 기름값들여가며 함께 일하는 회원들 밥 먹여가며 종종걸음치다보면 좋은 일한다면서 어깨까지 도닥여주는 분들이 더 많지만 때론 형편없는 장사치취급을 받아야 하는 서러움을 감수하기도 해야한다.

 

그런데 이번엔 수박 백 덩어리가 내 앞에 주어져 버렸다.

 

 

 

성모회원들과 그 남편들인 청년분과위원들과 함께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신자들에게

" 수박 사세요. 무농약 수박입니다 " 를 외쳤다.

 

’어휴 저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가’ 하면서 발길을 돌리는 사람에게

 

자진해서 " 배달도 해 드립니다." 라며 밉지 않은 눈흘김을 하는 남편들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휴...’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오래전부터 환경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언제나 말로만 하는 탁상공론 같아서 맘이 늘 께림직했었다.

 

그러던 것이 농촌 유기농 생산자와 도시 소비자 중간을 이어주는 이 일이야 말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가장 보람되고 꼭 해야할 일이라며 자부심을 갖고 있는 터였지만 수박 파는 아줌마인 내 모습은 어째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지난 해에 세례를 받으신 내동생의 시어머니가 우리 동네에 사시는데 미사에 오셨다가 이런 내 모습과 마주칠 때마다 서로가 계면쩍어 몸둘 바를 몰라한다. 그 분은 그분대로 나는 나대로.......

 

결코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도 아닐 건데 세상의 많은 가치들이 제대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까?

 

 

 

배달을 해주기로 한 수박을 다시 차에 싣고  토마스씨와 엘리야와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어떤 아파트에선 경비아저씨가 수박 장사인 우리를 타박하신다.

 

일년 내내 농사지어놓고도 그 가치만큼으로 절대 환산되지 않는 자신의 생산물들을 어렵게 어렵게 팔아야 하는 농부들의 심정이 가슴에 깊이 못 박혀 왔다.

 

함께 수박을 판 친구들과 함께 그래도 수박 백통을 다 팔았다고, 덜덜 떨리는 팔로 냉면을 먹으며 행복했던 일요일 오후,

 

사람의 땀으로 이루어지는 농산물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마음에 품어본다.

 

 



80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