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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소공동체 20년] (5) ‘소공동체 가능성과 한계’ 지상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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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동성당 [chang4] 쪽지 캡슐

2012-02-12 ㅣ No.5203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233176

[한국교회 소공동체 20년] (5) ‘소공동체 가능성과 한계’ 지상토론

“한국사회에 사랑·평등 문화 토착화하는 소중한 장”
“한국형 소공동체, 평신도 중심의 상향식 발전 부족”
공동체 발전에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
사제·수도자·평신도 함께 ‘협력’하며
지도력 성장·상하 경직된 문화 변화
의무 부과식 소공동체는 문제 … 자발성 중요
기존 신심단체 도태되지 않게 노력하는 등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구현 위해 고민해야
발행일 : 2012-02-12 [제2782호, 12면]

“삼천년기 한국교회의 비전”, “교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설명과 함께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론의 반영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위에서부터의 무리한 접목으로 오히려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비판도 제기되는 소공동체.

도입 20년을 맞고 있는 현 시점까지도 한국교회에서 소공동체는 아직도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신년기획으로 ‘한국교회 소공동체 20주년’을 연재하고 있는 본지는 이러한 교회 안의 찬성적?비판적 견해를 함께 들어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구체적인 사목 현장에서 경험한 소공동체의 결실은 무엇이고 당위성은 무엇인지, 또 직면하고 있는 가능성과 한계는 어떠한 것인지 정월기 신부(서울대교구 창5동본당 주임·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 위원)와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가 각각 그 의견을 밝혔다.



① 소공동체와 함께 발전하는 평신도 지도력·한국사회 - 정월기 신부(서울 창5동본당 주임·주교회의 소공동체소위원회 위원)

 ▲ 정월기 신부
소공동체 모임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어서 질문으로 시작했다.

“소공동체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 대답을 했다.

“안 된다”, “어렵다.”

본당에서 소공동체 사목을 추진하다 보면 ‘잘 안 된다’나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소공동체 모임에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고, 구역장·반장 등의 봉사자로 지원하려 하지 않고, 모임 장소를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공동체의 장점이나 결실은 무엇인가?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어서 좋다. 이웃 사촌의 소중함을 발견한다. 모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성경에 비추어 삶을 바라보고 삶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평신도들이 소공동체를 꾸려가면서 평신도 사도직과 지도력이 성숙되고 있다. 마음과 생각과 지혜를 나누면서 배우는 것이 많다.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우정을 맺고 어려울 때에 도움을 준다. 형제자매처럼 만나니 눈치 볼 것 없이 편안하다. 작은 사람이나 약한 사람도 구역장·반장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도 주체의식을 갖고 교회에 봉사한다. 소공동체는 지역의 문제나 어려움에 참여하면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이 된다.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연대하고 지역 환경보호나 정의로운 활동에 참여한다.

가정 공동체든 소공동체든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체처럼 어떤 규칙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명만 해내면 되는 것도 아니다.

소공동체는 교회처럼 다양한 모임과 활동이 이루어진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내고 자신의 기호에 따라서 참여한다. 2~4명이 살아가는 가정 공동체도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가! 그러나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정 공동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보다 나은 가정 공동체를 위해서 어떤 노력이든지 시도하게 된다.

사회학적으로 인간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가족처럼 얼굴을 맞대고 관계를 맺고 친밀하게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인격성장과 공동선을 이룬다. 인간은 친밀감이 없이는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없다. 인간은 고유한 인격체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며 이런 친교 활동을 통해서 자신을 실현하고 공동체에 기여를 하며 의미와 보람을 체험한다. 소공동체는 가정처럼 이런 친교를 이루는 장이다.

교회는 친교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제도적인 모습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친교를 드러내는 공동체를 향한 노력을 초대교회에서부터 꾸준히 기울여왔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교회를 준비하셨다. 12사도 공동체에서 출발하여 초대교회 공동체(사도 2, 44~47 4, 32~35 참조)를 향한 노력이 이어졌다.

교회는 수도 공동체를 통해서 제도적이고 위계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고 친교적이고 수평적인 모습의 교회를 이루어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랑하고 친교를 맺는 교회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교회론은 ‘친교’라는 것을 1985년 특별 주교 대의원회의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소공동체는 친교의 공동체가 되는 데 좋은 대안으로 인식되어 여러 대륙에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다. 특히 소공동체는 평신도들의 사도직 활동과 신앙과 삶에 필수적인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제는 본당 사목도 구역과 반소공동체 없이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소공동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 교도권에서 지속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교회 교도권과 소공동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친교 교회론을 토착화하고자하는 노력은 먼저 라틴아메리카 기초 교회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 50~60년대에 기초 교회 공동체를 경험한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1968년 콜롬비아 메델린에서 총회를 열고 메델린 문헌을 선포하였다. 이 문헌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가 정식으로 교회 교도권 문헌에 등장하게 된다.

메델린 문헌 15장 ‘연대사목’ 제10항을 보면 그리스도교 바닥 공동체가 나온다. 여기서 주교들은 바닥 공동체를 “친교를 체험하고 발견하는 곳이며 본당 중심의 교회에서 한걸음 나아가 삶의 현장에 있는 교회 기초 조직”으로 이해하고 있다.

197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 58항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는 교회적이고 인간적인 유대를 더 강화하고자 하는 데에서 발생한 새로운 교회 형태”라고 지적하면서 소공동체가 교도권과 일치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1976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렸던 동아프리카 주교위원회는 기초 교회 공동체를 교회가 가장 “지역적으로 육화”한 형태로 보고 기초 교회 공동체를 사목의 우선에 두고 있다.

1979년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열렸던 제3차 라틴아메리카 주교 총회에서 주교들은 기초 교회 공동체가 교회 구조의 중추가 되어 공동체로 엮어진 본당 공동체가 되길 희망했다. 여기에서 기초 교회 공동체의 교회론은, 교회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하느님의 가족, 하나의 백성으로 강조한다(239, 240, 261항). 이 문헌은 기초 교회 공동체를 가장 심도있게 다루고 있으며, 기초 교회 공동체는 “중대한 교회적 실재이며 특히 우리들의 것이며 교회의 희망이다(629항)”고 선언한다.

아시아 주교들은 1990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제5차 총회에서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공동체들의 친교(communion of communities)”를 아시아 안에서의 “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a new way of being Church in Asia)”으로 선언하였다. 아시아 주교들과 연대하여, 90년대 초에 한국교회도 서울교구를 시작으로 소공동체 사목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9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회칙인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소공동체를 “그리스도교 교육과 선교 추진의 좋은 중심터”로 인정하면서 소공동체를 교회 활력의 표지이며 신자 양성과 복음화의 도구이며 ‘사랑의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모든 지체의 능동적인 참여로 복음적인 공동체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10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후속 문헌인 주님의 말씀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73항에서 성서 사목 활동이 작은 공동체들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이 공동체들을 다른 교회 운동들과 연결 지으면서 양성과 기도와 성서 지식을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2011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아프리카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인 “아프리카의 헌신(Africa’s Commitment)” 121항에서 “소공동체는 … 평신도들의 세례 열정을 촉발시키는 기초 조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133항에서 “그리스도 제자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나누는 공동체이며, 이것을 본당과 가정과 소공동체에서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 교도권은 한결같이 소공동체가 교회 사목 구조 안에서 중요한 장임을 인정하고, 지역 주교와 일치하고 다른 단체들과 함께 발전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한국의 소공동체와 그 운영

한국교회는 90년대부터 소공동체를 추진하고 있다. 구역과 반소공동체가 지난 20년간 본당 사목과 복음화에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소공동체가 사목과 복음화에 필요한 장이라면 활성화를 해야 한다. 소공동체를 활성화하려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소공동체는 누구 한 사람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팀을 구성해서 팀을 활성화하고 그 팀이 공동체의 필요에 적절히 응답하도록 하며, 이 팀이 자발성과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자치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현재 몇몇 본당에서 구역 단위 자치회를 두고 자치회가 스스로 운영되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공동체 운영팀은 본당팀과 구역팀으로 정할 수 있다. 본당팀은 주임신부와 소공동체 담당 수녀와 사목회장과 총구역장단이 되겠다.

팀을 구성했으면 그 팀을 운영하는 협력 사목이 소공동체 영성을 드러내야 하겠다. 사목의 현장에서 ‘협력’한다는 것은 사목의 모든 사항을 공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의사소통을 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협력은 선교사명을 위하여 모든 은사들을 드러내고 통합하는 것이다. 협력은 각자 안에 있는 은사를 잘 조화하고 통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있다.



소공동체와 협력 지도력

소공동체 사목을 하려면 변화시켜야 할 것이 많다.

먼저 본당 사목 구조도 소공동체 사목을 지원하는 형태로 바꾸어가야 하고 지도력도 소공동체 팀 지도력이라야 한다. 본당의 구역·반 소공동체가 활성화되는 데 가장 절실한 것은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 봉사자들의 지도력이다. 이들이 팀으로 활동하게 되면 그 과정에서 공동체를 체험하게 된다. 소공동체가 자발성과 생명력이 자라나 활성화 되도록 하기 위해서 본당신부의 영성과 의지와 태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본당신부의 영성과 지도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소공동체를 추진하면서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다. 백성과 우정을 맺고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면서 각 공동체에 적절한 지도력을 익혀가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팀 지도력이 발전하고 공동체가 발전하게 된다.

본당신부가 명령하고 지시하기보다는 섬기고 함께하는 모습을 드러내면 그런 지도력이 그대로 수도자나 신자들에게 전달된다. 논의하고 결정하고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함께하는 모습을 드러내면(교회헌장 30항 참조) 일선의 구역?반 소공동체 봉사자들도 그런 지도력을 드러낸다.

본당신부가 지배하는 지도력이 아니라 섬기고 함께하는 지도력을 드러내면 신자들은 그 안에서 예수님의 지도력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15:15)”고 하시면서 제자들과 우정을 맺으며 ‘벗 지도력’을 드러냈다. 하느님 안에서 지배적인 상하 관계가 아니고 수평관계의 우정의 지도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본당 주임신부는 일차로는 소공동체 담당 수도자와 함께하고 다음으로는 본당 소공동체 담당 지도자들과 함께하면서 지도력을 익혀간다. 팀 지도력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지배적인 사목 형태를 변화시켜갈 수 있다. 소공동체는 지배적인 지도력에서 함께하는 지도력으로의 변화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 뿌리 깊이 스며있는 위계적인 상하 인간관계를 역전시켜 평등하고 친교가 살아있는 사랑의 문화를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당신부와 수도자와의 협력

소공동체를 운영하는 반장과 구역장이 지배하는 모습이 아니라 섬기고 협력하는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데 모델을 어디서 찾을까? 아무래도 본당에서 소공동체를 촉진하는 주임신부가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떤 지도력을 드러내는가를 보고 배울 것이다. 주임신부와 소공동체 담당 수녀가 함께 드러내는 지도력은 모델이 되기도 한다.

한국교회의 소공동체는 대부분 여성 구역장 반장들이 중심역할을 하게 되고, 이 여성 봉사자들은 자신들의 지도력 형태를 수도자에게서 배우게 된다. 수도자가 명령하거나 지배적이지 않고 섬기고 함께하면 평신도들도 그런 지도력을 드러낼 것이다.

나와 함께하는 수도자는 소공동체를 추진하면서 행복할까?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 상하 위계질서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문화에서 성장하고 가톨릭의 위계적인 제도 안에서 성직계에 속한 나로서는 사목 현장의 수도자와 수평관계를 맺으며 함께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함께하는 상대방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함께한다고 하지만 수도자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할까? 본당 사목을 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수도자들은 주임신부로부터 존중 받기를 원하고 일방적인 관계보다는 상호 협력관계를 맺으며 사목의 동반자가 되길 원한다. 본당신부로서 나는 수도자와 함께한다고 하는데 수도자는 나와 함께하는 것에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나는 수평관계로 다가간다고 하지만 상대방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일방적인 함께함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공동체 담당 수도자에게 물었다. 나는 함께한다고 하는데 수녀님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보람이 있는지? 소공동체나 본당 사목의 중요한 사안을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고 추진한다고 하는데 수녀님도 그렇다고 인정하는지? 한마디로 말하면 소공동체 사목을 함께하면서 행복한지?

나의 이런 질문에 수녀님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지난날 여러 본당에서 본당 주임신부와의 수평관계와 수직관계 경험을 이야기하며, 나와는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며 편안하게 소통하면서 행복한 사도직을 하고 있다고 답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도 행복해짐을 느꼈고, 소공동체는 억지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행복해지는 것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임을 발견했다.

협력사목은 각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탈렌트)을 피워내며 공유된 사목 비전과 방향을 향해서 서로 함께가는 여정이다. 수도자가 소공동체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받은 선물을 잘 드러내고 활용하면서 주임신부와 편안하게 협력하고 있다면 소공동체 지도력의 중요한 초석이 놓인 것이다. 상하 위계적인 한국사회에서 주임신부와 수도자가 수평관계로 발전해가면서 협력하고, 이런 수평관계가 점점 소공동체 안에서 자리잡아 하느님 안에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형성하는데 소공동체는 소중한 장이 되어주고 있다.

한국사람은 둘만 모이면 나이를 따진다. 상하 인간관계가 깊이 침투되어 있다. 이런 상하 지배적인 인간관계를 평등하고 우정을 맺는 복음적인 인간관계로 바꾸고자하는 것이 소공동체이다.

상하 지배관계에서는 사람들은 다른 지배자들이 설명하는 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진다. 한편, 함께하고 우정을 맺는 관계는 상생(相生)과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평등의 방법으로 작용한다. 소공동체는 상하 위계적이고 지배적인 문화를 복음의 사랑과 평등 사상으로 역전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 공동체로 대표되는 사랑의 문화를 한국문화에 토착화시키고 있다. 소공동체는 “사랑의 문화에 뿌리를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이다(교회선교사명 51항).”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23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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