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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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pious] 쪽지 캡슐

1999-12-10 ㅣ No.884

책을 읽다가 감동적인 부분이 있어서 발췌해 올립니다. 헨리 뉴엔 신부님의 "이 잔을 들겠느냐"라는 책이고 바오로딸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삶의 잔의 신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해졌다.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친구들이 왔다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고, 사랑과 배신, 관심과 무관심, 관대함과 인색함도 경험해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하고, 소망을 이루고 만족스러워하는 순간에도 이루지 못한 일들이 떠오르기도 하며,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편안함을 느끼다가도 갑자기 외로움이 엄습하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 우리는 세상에 구속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갈망하고 추구하게 된다.

슬픔과 기쁨으로 가득찬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사명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완전한 자유와 구원을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추어진 삶의 잔을 마셨다. 그분은 인간들의 존경과 아첨도 받아보았고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했고 조롱을 받기도 했으며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호산나’라고 외치며 환호하던 사람들이 얼마 안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예수께서는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영웅이 아니라, 세상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노력한 인간이요, 자신의 잔을 받아 마신 분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받은 잔을 비워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잔을 마심으로써 완전한 자유와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고, 세상의 속박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과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머리로써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 알고 있었다.

이렇게 예수께서 기꺼이 비웠던 바로 그 잔이 구원의 잔이 된 것이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는 두려움 속에서도 시편 저자처럼 "사람은 다 믿을 수 없다. 구원의 잔을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고 마음속으로 외치셨다. 구원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슬픔과 기쁨의 잔을 비우고 하느님께서 그 잔을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 채우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인가? 이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냥꾼의 덫에 걸린 토끼처럼 죄와 죽음의 덫에 걸려 고통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술과 마약, 음식과 도박, 그리고 섹스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덫에 걸려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세상에는 지나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방을 나가기 전에 깨끗이 치워놓고 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화내실 거야."라든가 "그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손부터 씻는 습관이 있다."라는 말에서도 알수 있듯이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어떤 생각, 계획, 혹은 취미에 집착해서 그것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중독증세와 강박관념, 집착성향은 죄의 덫에 갇혀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증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비좁고 제약이 많은 세상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죄는 우리에게 주어진 잔을 외면하고 욕구와 바람에 따라 살아가도록 유혹할 뿐만 아니라 제멋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꼬득인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육정이 빚어내는 일은 명백합니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사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입니다."(갈라5,18-21)

죄뿐만 아니라 죽음도 우리를 구속하고 있다. 우리는 늘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살고 있다. 핵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고, 국가간의 전쟁이나 내전, 혹은 민족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있으며, 기아와 무관심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낙태나 안락사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에이즈나 암을 비롯한 갖가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음 앞에 무릎을 굻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도망을 가더라도 죽음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닌다.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우리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고 죽음의 덫에 대해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이와 같이 죄와 죽음은 우리를 구속하고 잇다. 이 구속을 벗아나는 길은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앞에 놓인 잔을 마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어렵고 고통스러워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은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잔을 비우지 않는 한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잔을 완전히 비운 다음에, 즉 우리가 죽은 다음에 얻어지는 자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루하루를 살면서 조금씩 잔을 들어 마실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자유를 의미한다.

구원이란 내세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내가 아담 옆에 앉아 식사하는 것을 도와줄 때, 빌과 함께 다음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수잔과 커피를 마실 때, 데이비드와 아침식사를 함께할 때, 미카엘을 안아 줄 때, 패시의 뺨에 입을 맞출 때, 혹은 고디와 함게 기도할 때 구원은 바로 내 곁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대 앞에 모여 앉은 형제 자매들에게 포도주가 가득한 유리잔을 내밀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이 잔은 구원의 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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