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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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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준 [bopark] 쪽지 캡슐

2000-09-25 ㅣ No.1797

때로는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죽음을 잊고 살다보면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살며 우리의 삶이 보잘 것 없는 뜬구름임을 느끼기 위하여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어느날 왔다가 세상의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다가 갑자기 떠나가는 우리들이기에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명예와 재산,교만과 아집에 따라 살다가 "그날"에는 삶에 지친 육신하나만 달랑 가지고 가지만 이 것 마저도 모두 버려두고 가고 싶습니다.

 

주머니 없는 거친 베옷 한벌 입고 떠나는게 마지막 우리네 모습....

빈손으로 왔으니 갈 때도 빈손으로 가라고 주머니도 달아주지 않는 수의.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그날"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 입니다.

 

잘 죽는 일은 잘 사는 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삶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그날"을 떳떳하게 맞이할 자신이 없습니다.

 

때때로 "그날"을 떠올리며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그래야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똑바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모든 것을 내 놓으시고 두 팔을 쫙 벌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빚을 졌기에 무언가 내놓을 것이 없는가 생각하고 궁리한 끝에 얼마 전에 한마음 한몸 운동본부에 시신 및 장기기증을 하였습니다.

(시신기증등록번호:20001509. 장기기증등록번호:012464)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 맞는 장사 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벌은 건졌잖소" 라는 어느 유행가 가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남은 자에게는 부담을 주기 싫고, 구더기의 밥이 되느니 차라리 의료발전에 보탬이 되라고 미리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이 후일에 "그날"이 다가오면 저의 가족들이 저의 뜻을 거스리지 않도록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미에서 입니다.

가족들은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의한 것이지 절대 강박이 없었음을 밝혀 둡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반대했었지만 저의 강한 의지에 기가 질렸는지 보증인란에 지장을 찍었고, 큰 아들놈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지라 보증인란에 손도장을 찍으라고 하자 "아빠! 왜 손도장을 찍는거지?" 라며 의아하게 생각하고 물어보기에 "이 다음에 더 크면 이야기해 주겠다"고 얼버무렸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지 "알았어" 하면서 손도장을 찍어주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지요.

 

애비의 깊은 뜻을 이해할 날이 있으리라고 굳게 확신해 보면서 혹시 그날이 왔을 때 저를 아시는 분들이 저의 가족들에게 번복할 수 없도록 두 눈을 부릎뜨시고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몇년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지만 이 번에 세바스티아노신부님을 통하여 실행에 옮기고 나니 속이 후련합니다.

 

세상이 밝게 보입니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를 더욱더 겸손하고 값진 봉사를하며 살 수 있도록 다짐해 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장24절)를 묵상하면서 저의 증인이 되어 주실 여러분들께 기쁘고도 정성된 마음으로 이 글을 바칩니다.

 

비오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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