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갈매못 성지 다녀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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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애 [sophia1008] 쪽지 캡슐

2005-05-31 ㅣ No.3469

 

 

 

 

 

 

 

 

 

레지오에서 아침 일찍 신부님의 강복을 받고
버스 4대로 갈매못 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수녀님도 같이 동행하게되어 기뻤다.
여러가지 민간요법도 일러 주셨다.
묵주기도와 까떼나를 바치고 성가도 부르면서 갔다.

 

도착하자마자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의 강론이 머리에 쏘옥 들어왔다.
신부님이 처음 오셔서 6개월 동안 신자가 한분도 없었다는데.........
이곳 성지 근처의 사람들은
조상들이 말하기를
"천주교는 믿으면 죽임을 당한다" 이런 식이었단다.
많은 사람들이 죽는것을 본 경험이 있기에........
이제 겨우 37명의 신자수를 유지한다고 했다.
신부님의 바램은 이곳을 떠날때까지
신자수 103명이 되게하는 것이라했다.
열심히 하면 이루어주실것을 믿는다 하셨다.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위해 치명하신 일이 마음에 와 닿았다.
너무나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것이 죄스런 마음까지 들었다.
좀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있기를 기도 드렸다.
미사가 끝나고
저마다 준비해간 식사를 정답게 나누어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걸어 보았다.
우리의 신앙을 다짐해보면서 걸었다.
많은 단원들이 갔지만 모두
서울까지 무사히 즐겁게 올라왔다.
주님이 함께 하신 순례의 길이었다.

 

그 옛날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느라 피흘렸다는 이곳 성지....
지금은 아주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성지 바로 앞 바닷가에서는
향긋한 파래내음이 싱그럽게 느껴졌다.

 

 

이곳의 내력은 이러하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해변에 있는 조선후기의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인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장주기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오천은 충청도 수영(水營)이 있던 곳으로 박해기에 국사범으로 체포된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수영이 있던 곳에서 바닷가로 더 나가면 갈매못이 있다. 

   1845년 입국한 다블뤼 신부는 조선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의 순교로 1866년 3월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어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3월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와 함께 내포지방에서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보령수영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1866년 3월 30일 5명은 갈매못에서 처형되었다. 5인의 순교자 중 황석두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네 명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됐다가 홍산으로 옮겨졌고,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되었다가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성 시복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됐다.

   그 뒤에도 병인양요와 오페르트도굴사건에 관련된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는데, 《치명일기》에는 1866년 6명, 1868년 3명, 1871년 1명 등 10명이 처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령시 향토지 《내고장 보령》에는 한양부근에서 잡힌 신자들이 배에 태워져 서해를 거쳐 항구 밖 해변가 자갈밭에서 참수되었는데, 500여명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갈매못은 1975년 대천 성당의 정응택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병인박해시 순교한 5명의 약력과 순교사실을 기록한 순교복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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