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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 시성 청원자 [주문모 야고보신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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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나 [sanghoo] 쪽지 캡슐

2003-09-29 ㅣ No.3987

 

 

 

2. 주문모 야고보 신부

 

(중국 소주출생, 새남터 1801년 5월 31일 49세) 군문효수

 

 

 

중국 강남성 소주 곤산 사람인 주문모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가 삯바느질을 하며 그를 키웠다.

 

주문모는 결혼을 하였는데 3년 후 아이도 없이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주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결혼의 경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때 윤유일이 조선교회의 밀사로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1791년에 도스레메디오스 라는 마카오출신 오 요한신부를

 

조선에 파견 하였지만 진산사건(윤지충,권상현의 제사를 거부한 사건)의

 

여파로 안내자를 만나지 못하여 입국이 좌절되었다.

 

다시 1794년 초에 조선에 파견할 주문모 신부를 선발하여 국경에서

 

지황을 만났지만 압록강에 얼음이 녹아 입국을 포기하고 만주 교회를

 

순방하다가다시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는 사실을 이벽의

 

동생 이석에게 진사 한영익이 밀고했다.

 

이석은 우의정 채제공에게 알렸고, 채제공은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정조 임금은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다행히 주 신부는 피할 수 있었지만, 주 신부를 모셔오고

 

늘 함께 보필하던 윤유일과 최인길 그리고 지황이 신부를 대신하여

 

체포되어 18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났고, 최인길 집에서 극적으로 피신한

 

주 신부는 창동, 석정동, 북창동, 양근, 충청도 연산까지 피신했다가

 

일년만에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돌아와서 그녀의 도움으로

 

사목활동을 계속하였다.

 

 

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어 신부의 행방과

 

은신처를 추궁하며 잔혹한 형벌을 받으면서 주문모 신부의 안전을

 

위하여 신부의 행적에 대해서는 모두 함구하였다.

 

주 신부는 신자들의 안전을 위하여 잠시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황해도

 

황주까지 갔다가 착한 목자로서 자기 양떼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당신이 자수하면 신자들의 고통도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4월 28일(음력3/11) 서울에 올라와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주 신부는 문초 중에 "내가 조선에 온 것은 참된 종교를 전하고,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었소." 라고 대답하면서 신자들에게 불리한 대답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문모신부는 49세로 1801년 5월 3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주 신부의 사형집행을 준비하는 동안에 청명하던 하늘에 갑자기 어두운

 

구름이 짙게 깔리더니 광풍이 불며 모래와 자갈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한치의 앞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비와 바람이 그치고 해가 나타나면서

 

영롱한 무지개가 서고 3일 동안 찬란한 빛이 시신 위에 나타났다고 한다.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권 377, 386, 476, 481)

 

(순교는 믿음의 씨앗이되고..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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