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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극自序 [교리용어_사욕편정] [과자연적선물] [_칠극자서] 792_ 869_tran KH_err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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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3 ㅣ No.1343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1.
필자가 상당히 어렵게 마련한 "천학초함" pdf  파일에 포함되어 있는,

七克[大全]의 원저자인 예수회 소속 D. Pantoja(중국 이름: 龐迪我,1571∼1618년) 신부님의 서문은

다음의 주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천학초함/칠극/칠극自序.pdf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8월 15일]

1-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소위 말하는, 상해본 "칠극"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학초함에 포함되어 있는 위의 제1-1항의 "칠극자서"의 본문의 글자들 중에서 깨어져 읽고 이해하는 것이 힘든 글자들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상해본 "칠극"의 본문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칠극/칠극_龐迪我.pdf
[이상, 2013년 8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5월 18일]

1-3. 더 나아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i) 필자가 상당히 어렵게 마련한 "천학초함" pdf  파일에 포함되어 있는, 七克[大全] 전문,

(ii) 그리고 1931년판(8판) 상해본 "칠극" 전문, 그리고

(iii) 간체자본 칠극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칠극/contents.htm 


게시자 주 1-3: 그리고 이들은, 다음의 주소에 이미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 [주: 가톨릭 문서선교회 홈페이지]

[이상, 2022년 5월 18일자 내용 추가 끝]


게시자 주:
(1) 위의 제1-1항에 있는 주소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한문과 아래에 있는, 우리말 번역문을 비교/검토하면서 읽도록 하십시오.

(2) 사실 "칠극"의 원저자인 스페인 출신의 판토하 신부(D. Pantoja, 중국 이름: 龐迪我,1571∼1618년)는 트리엔트 공의회(Trent Council, 1545-1563년) 이후에 신품 성사를 받았을 것이며, 따라서 사제 양성 기간 중에 트리엔트 교리서(즉, 로마 교리서)와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윤리 신학(Moral Theology)을 집대성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an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등을 학습하였을 것이 분명하므로, "칠극"에서 사용되고 있는 차용된 한자 번역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s)들과 그리고, 이들 번역 용어들에 대응하는, 번역 이전의 라틴어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들은, 모두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 대전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s)들동일하였다(identical)는 생각입니다.

(3) 다른 한편으로, 이익(李瀷, 1681∼1763년)의 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에 기록된 "칠극"에 대한 소개의 글은

여기를 클릭하면 <----- 필독 권고

읽을 수 있습니다. 클릭한 후에 제5항게시자 주 iv-1게시자 주 iv-2 를 읽도록 하십시오.

(4) 따라서, 아래에 발췌되어 있는 "칠극자서" 번역문의 본문에 있어, 필요시 필자가 해당 한자와 영어 용어를 괄호 안에 병기하였으며, 그리고 극기 드물기는 하나, 영어본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들에서 사용 중인 번역 용어들과 일치하지 않는 번역 용어들의 경우를 포함하여, 일부 번역 오류들은 필자가 바로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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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칠극자서 본문 전문)

칠극자서(七克自序)

사람이 태어나서 하는 모든 일은 없애고 쌓는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몸을 닦는 모든 일이란 옛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쌓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현들의 모든 가르침은 바로 악한 것을 없애고 (1)을 쌓는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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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여기서 "덕"은 "德"을 말한다. 그런데 이 한자는, 영어로 "virtue"로 번역되는 라틴어 단어에 대응하는 차용된 번역 용어이다. 이 차용된 번역 용어인 "德(덕, virtue)"의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적 의미는 다음의 글들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70.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7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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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윤리적] 악한 일은 욕망(2)에서 나온다. 그러나 욕망은 본래 나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上帝)이 사람들에게 몸을 보호하고 정신을 도우라고 내려준, 공평한 의리와 정당한 도리를 가진 밀사(密使)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다스렸기 때문에 비로소 죄가 되고 허물이 되어 온갖 악(惡)이 그것을 뿌리로 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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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시자 주: 여기서 "욕망" 으로 차용 번역된 한자단어는 "欲" 이며,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에, 영어로 "appetite"로 번역이 되는 라틴어 단어에 대응하는 차용 번역 용어가 아니고, 영어로 "desire"로 번역이 되는 라틴어 단어에 대응하는 차용 번역 용어이다. 그리고 "appetite(욕구)""desire(욕망)"의 차이점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5.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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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뿌리가 마음에 숨어 있으면, 외면(역자 주 : 말이나 행동)에 갑자기 부(富)를 바라고, 귀(貴)를 바라고, 안락(安樂)이 바라는 세 개의 큰 줄기가 생겨난다. 이 줄기는 다시 가지들을 낳는데, 부를 바람은 [재물에 대한] 탐욕(貪)을 낳고, 귀를 바람은 거만함을 낳고, 안락을 바람은 [음식에 대한] 욕심[즉, 식탐]을 낳고, 방탕함을 낳으며, 게으름을 낳는다. 그리고 이 부와 귀와 안락을 바람이 자아를 이기면 질투를 낳고, 그것이 자아를 빼앗으면 분노를 낳는다. 그러니 사욕(3)이란 그 뿌리를 하나로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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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게시자 주: 여기서 "사욕"은, "慾(사욕, 즉 사악한 욕망)"이 아니라, "慾(사욕, 즉 사사로운 욕망)"을 말한다. 위에 링크 주소를 제시한 칠극자서 원문을 필히 들여다 보도록 하라. 그리고 "慾(사욕)"은, 慾偏情(사욕편정)아니라, "慾偏情(사욕편정)"을 말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10.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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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바라고, 귀를 바라고, 안락을 바람은 줄기이다. 그리고 줄기가 낳은 거만함(傲, pride), 탐욕(貪, covetousness or avarice), 탐식(?, gluttony), 방탕(淫, lust), 게으름(怠, sloth or acedia), 질투(妬, envy) 그리고 분노(忿, anger or wrath)는 가지(枝)이다.(4) 또 여러 가지의 죄와 허물, 해서는 인될 생각과 언동(言動) 등은 이 일곱 가지(七枝)가 모여서 열매가 되고, 나누어져 잎이 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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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게시자 주: 이 일곱 가지(七枝)들이 바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66항에 나열된, [영적 죄종(spiritual capital sins)들 다섯 개들과 육에 기인하는 죄종(carnal capital sins)들 두 개들로 구성된], 소위 말하는, "칠죄종(七罪宗, seven capical sins)"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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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불길은 이 나무를 장작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사사로운 욕망(5)을 버리면 지옥의 불길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근심과 걱정이 몸과 마음을 어지럽혀서 편안치 못함을 염려하는 것은 모두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데에 말미암는다. 그러니 이 나무를 세상에서 뽑아버린다면 사람들은 모두 다 천사(angel)가 될 것이다. 그러면 남을 자기처럼 생각하고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듯이 생각 할 것이니, 하늘나라(6)가 어찌 멀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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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게시자 주: 여기서 "사사로운 욕망" 이라는 표현은, "慾(사욕, 즉 사악한 욕망)"이 아니라, "慾(사욕)" 을 우리말로 풀어서 번역한 것이다. 위에 링크 주소를 제시한 칠극자서 원문을 필히 들여다 보도록 하라.

(6) 게시자 주: 위에 링크 주소를 제시한 칠극자서 원문에서 "天堂境界(천당경계)" 라는 표현을 우리말 번역문에서, "천당경계(天堂境界)" 직역 번역하거나 혹은 "고성소(古聖所)/림보(Limbo)/저승(주: 1996년 이후부터 "저승"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경신성사성에 의하여 승인됨)" 라고 번역하는 대신에"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고성소(古聖所)"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과 용어사전에 주어진 설명들을 참고하라: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215 (고성소)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6163 (저승)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 중에 지상에 개시하신(즉, 처음으로 시작하신)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 천국)"는, 예수 재림의 날까지는, "하늘(heaven, 천당)"과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7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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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욕망을 이기고 덕을 닦는 일은 종일토록 논의하고, 평생토록 힘쓰는데도 거만함(傲, pride), 질투(妬, envy), 분노(忿, anger or wrath), 방탕(淫, lust)과 같은 여러 욕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겸손(謙), 어짐(仁), 곧음(貞), 참음(忍)과 같은 여러 덕은 쌓여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세 가지 이치에 어둡기 때문인데,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 첫째이고, 마음을 깨끗이 하지 않는 것이 그 둘째이며, 절차를 따르지 않는 것이 그 셋째이다.

세상을 거만스럽고 자신을 옳다고 여기는 이들은 모두 덕을 닦고 욕망을 이기는 역량은 내 스스로 갖춘 것이라고 하며, 사람이 태어난 이래로 주의를 일으켜 주는 단 하나의 생각이라도 그 모두가 하늘의 주인(天主)이신 하느님(上帝, God)가 우리에게 내려준 것임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부귀, 장수. 편안함과 같은 복(福, blessings), 그리고 미미하고 일시적인 복도 이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모두 알 것이다. 그러니 욕망을 이기고 덕을 닦는 더없이 어려운 일을 함부로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보다 심한 잘못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그 역량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안다면, 하늘에서 모든 일을 정해주기를 빌며 이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며, 그리하여 덕이 이루어지고 욕망이 극복된다면, 그것이 하느님이 내려준 것임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저들이 ‘내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하느님(上帝, God)의 힘으로 돌리지 않는 것은 바로 거만이라고 하는 마귀에게 공격을 받아서 근본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는 것도 없고 사리에 어긋나면서도 자신을 옳다고 하고, 아첨하는 말을 들으면 경망스럽게 기뻐하지만, 조금이라도 불쾌한 말을 하면 만날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원망하고 탓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니, 그들이 닦은 덕은 어떤 것인가?

사람의 선(good)과 악(evil)은 의향(志, will)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하더라도 선의(善志, good will)가 없다면, 이는 사람(man)의 모습은 가졌더라도 영신(靈神, 즉 영혼, soul)은 없는 것이니,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하였을 뿐이다.

가볍고 날랜 배와 수레는 [사람이] 다니기 어려운 곳에서 사람을 실어 주지만, 사람들이 그 공을 칭찬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배와 수레는 공(功, merit)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실어 줄 의향(志, will)이 없기 때문이다.

덕을 닦고 욕망을 이기려는 사람은 오직 그의 온 마음을 깨끗이 하여서 하느님(上帝, God)에게 향해야만 그 의향(志, will)이 [가장] 높다고 할 것이다. 다음은 그 의향(志, will)이 아름다운 하늘의 덕(天德)을 부러워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살아서는 깨끗한 마음(心)의 즐거움을 누리고, 죽어서는 하느님과 신성(神聖, 거룩함, holiness, sanctity)의 짝이 됨에 의향(志, will)을 두는 것이다.

덕을 닦으면서 만약 부귀, 영화, 명예와 같은 세상에서 복을 아울러 바란다면, 이는 덕을 닦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욕망을 닦으면서 덕의 모습을 입고 있을 뿐이다. 이는 덕으로써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으로써 욕망을 다스리는 것일 뿐이니, 옛 욕망을 아직 버리기도 전에 새 욕망이 보태어지고, 새 욕망에 빠질 것이다.

덕을 닦으면서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의 복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니 욕망을 버리려는 세속적인 생각을 다스려서 덕을 쌓는 것인데, 피해야 할 것을 잡아서 그것을 헐어버린다면 덕은 어디에서 이루어지겠는가? 그러니 마음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덕을 닦으려는 의향(志, will)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털끝만큼의 욕망이라도 반드시 없애버릴 것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어렵다. 이 한마디의 말은 평생을 다하더라도 이룰 수가 없다. 하나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도 한 나라를 이겨내기보다 어려운데, 모든 욕망을 다스리는 일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더욱이 처음 닦을 때의 덕은 매우 미미하고 약하다. 그러나 처음 공격을 받을 때의 욕망은 크고도 강하다. 따라서 미미하고 약한 덕으로 크고 강한 욕망을 공격한다면, 날카로울 뿐 욕망은 더욱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향을 돌려 기반마저 없애버릴 것이니 도리어 그 해를 받게 될 것이다.

사욕(7)을 이기는 것은 오래된 집을 헐어버리는 것과 같아, 만약 주춧돌을 먼저 헐어버린다면, 집은 엎어지고 재목은 부수어져서, 사람들은 그것에 깔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와와 처마를 먼저 헐어낸 뒤에 주춧돌을 헐어낸다면 재목과 사람이 모두 다치지 않을 것이며, 일도 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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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게시자 주: 여기서 "사욕"은, "慾(사욕)"이 아니라, "慾(사욕)"을 말한다. 위에 링크 주소를 제시한 칠극자서 원문을 필히 들여다 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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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욕망을 이기려면 반드시 그 하나하나씩 따로 공격하여야 하며, 쉽고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덕이 늘어나고 힘(능력)이 커지게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어렵고 큰 것으로 차츰차츰 나아가야 한다.

차츰차츰 나아가서 정밀함에 이르는 것은, 그 길이 밝고 편안하며, 막히고 떨어질 험한 곳도 빠르고 쉬운 곳으로 나가는 것과 같아지므로, 옛 말씀에 “덕으로 나아가는 것은 사다리에 오르는 것과 같으니, 조심스럽게 오르며 서두르지 마라. 급히 서두르면 반드시 떨어진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덕을] 빨리 닦고자 하여 잘못된 것을 헤아리지 않거나 혹은 자신을 믿어서 단계를 뛰어 넘는다면, 빨리 싫증이 나고 힘도 빠지게 될 것인데, 이는 절차를 따르지 않은 잘못이다.

나 빤또하는 팔만 리 밖 외국에서 온 나그네인데, 일찍이 하느님(上帝)의 은총과 자애를 받아 이 세상의 복이란 지극히 일시적이고 지극히 미미한 것이며, 굳은 것도 한 곳에 머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아가 영원한 행복은 죽은 뒤에야 진실로 갖추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예수회(the Jesuit)의 가르침을 따라, 뛰어난 분들께서 환희 밝혀주신 가르침을 익히 듣고서 자신을 바로잡고 세속을 교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저 사악한 이야기들이 길을 가득히 메우고 있어서 [사람들이] 하느님이 인간과 사물의 참된 주인임을 알지 못하고, 하늘나라(8)에 오를 수 있는 참된 지름길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가련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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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게시자 주: 위에 링크 주소를 제시한 칠극자서 원문에서 "天堂" 이라는 표현을 우리말 번역문에서, "하늘(heaven, 천당)" 로 번역하는 대신에"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로 번역하였는데, 전후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이 번역은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 중에 지상에 개시하신(즉, 처음으로 시작하신)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 천국)"는, 예수 재림의 날까지는, "하늘(heaven, 천당)"과 결코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7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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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몇몇 벗들과 함께 동쪽으로 오게 되었는데, 구사일생의 고비를 겪으며 바다를 건넌 지 3년 만에 중국을 도착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언어와 문자는 [우리의 언어와 문자와는] 서로 완전히 통하지 않았다. 마음을 기울여 익히고 배워도 겨우 아이들과 비슷할 뿐이었다.

요사이 점차 그것의 대략을 깨우쳐 학자들의 강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마음속으로 생각하기에, 의향(志, will)을 가진 유현(儒賢, 역자 주 : 유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들 가운데 덕을 닦고 사욕을 이겨내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이가 많이 있고, 방법도 [우리와] 같고 의향(志, will)도 일치하여, 매우 다르지 않는데도 다만 세 가지의 폐단 때문에 막히고 [외물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 한둘이 아닌 듯하였다. 이에 들은 것 그리고 좁은 식견 한 둘을 실마리로 삼아서 나의 깨우침에 대한 인정을 받으려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의 병은 일곱 가지가 있고, 이것을 치료할 약 또한 일곱 가지가 있는데, 그 큰 의향(志, will)을 모아 보면 결국 옛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쌓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영원한 즐거움과 영원한 복을 쌓는 것이요, 없애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영원한 괴로움과 영원한 재앙을 없애는 것이다.

정성스러운 잠언(箴言) 정도로도 매우 좋겠지만, 많은 말을 사용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은 입과 같기 때문이다. 입은 저마다 그들의 기호에 맞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음식을 차려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각각 먹여 주어야 한다.

덕은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여러 말을 섞어서 늘어놓은 것은 바로 대접할 음식이 이 한 조각의 저민 고기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즐기는 분들이 맛보기를 바랄 뿐이다. 혹시 “말을 여러 가지로 늘어놓아서, 덕을 여러 가지로 흩어버렸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어찌 그런 일을 하려고 했겠는가?

萬曆 甲寅년(1614년) 음력 10월 빤또하가 적었다.

칠극(七克) 중에서 - 빤또하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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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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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부산가톨릭신학원 까페)

제목 : 칠극(七克)이 전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의 천주교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천주교서적을 통해 교리연구를 하여 자발적으로 천주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는 세계 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는 신문화와 새 종교에 대한 호기심에서 여럿이 한 곳에 모여서 한역서학서란 책을 통해 새 종교의 교리를 토론한 것을 시발로 창립되었다. 모든 것을 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초창기의 순교자들을 살펴보면 윤지충은 김범우의 집에서 열린 강학회에 참석하여 김범우의 책을 복사하여 보고 정약전으로부터 바울이란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리고 권상연은 사촌인 윤지충에게서 책을 빌려보고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김범우로부터 책을 빌려 복사하여 본 「천주실의」와 「칠극」이 문제가 되어 순교자가 되었다.

조선 사회는 조선 왕조 창건 때에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당시 사회는 가부장적인 가족사회였으며 윤리중심적인 정서에 제시된 도덕이 첫째이고 전부이며 근본이었으며 인륜지상적이고 자율적인 도덕률을 요구하고 있었다. 반면에 새 종교인 천주교는 하느님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하느님만을 절대적 존재로 신앙하고, 인간을 하느님의 피조물인 상대적 존재로 보며, 도덕은 종교의 한 부분이고 효도는 윤리적 관계일 뿐이므로 종교화되거나 절대화될 수 없는 것인 탓으로 유학은 서학을 사회의 전통적인 질서와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유교가 인간중심적인데 반해 서학은 천주를 우선적으로 내세우고 거기에 절대성과 초월성을 두는 사실이 사회질서를 깨뜨리는 것으로 여겨져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유학과 서학의 만남은 동양의 절대종교와 서양의 절대종교의 만남이었다. 서학의 전래는 기존 세력인 유학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충돌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고, 기존 세력의 유지를 위해 탄압과 박해가 초래되는 것도 불가피했다.

사서(邪書)라고 불렸던 천주교 서적들에 대해서는 박해를 당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박해자들도 관심을 보였다. 서적들을 통해 전파된 천주교에 대해 정조 초기에 법률로 천주교 서적들의 수입과 배포를 금지시켰다. 불태워진 천주교 서적이 120종, 111권, 119책(한글번역본은 82종, 111권, 128책)이라고 하니 얼마만큼이나 일반 서민층에서 널리 배포되고 읽혀졌는지를 입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리 교육을 위해「칠극」을 기본교재로 하여 가르쳤다고 한다. 이는 천주교가 윤지충의 폐제분주(廢祭焚主)사건과 ‘황사영백서’사건 이래로 반인륜 반역의 종교가 됨에 따라 신자들은 의식적으로 유교윤리와 견줄 수 있는 「칠극」을 더욱 강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칠극」이라는 책은 신앙 선조들에게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목숨을 기꺼이 하느님께 내어 놓고 모든 것을 다 바친 삶을 살 수 있었는지 늘 궁금하여 왔다. 「칠극」을 통해 궁금증을 풀어본다.

「칠극」은 그리스도교와 유학의 만남이며 수양론이다.

 「칠극」은 마태오 리치의 뒤를 이어 중국에 건너 온 예수회 선교사 빤또하가 자신이 배웠던 스콜라 신학의 윤리론, 특히 그 중에서 칠죄종(七罪宗)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덕을 역시 그 당시를 풍미했던 성리학의 수양체계와 조화시켜가면서 설명한 책이다. 그래서 부산교회사연구소에서 출판한 번역서에는 '그리스도교와 신유학의 초기 접촉에서 형성된 수양론'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리스도교와 유학의 만남이다.

 ◆「칠극」은 하느님(上帝)이 인간과 사물의 참된 주인임을 알리기 위해 지었다.

 「칠극자서(七克自序)」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욕망은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몸을 보호하고 정신을 도우라고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다스렸기 때문에 비로소 죄가 되고 허물이 되어 온갖 악이 그것을 뿌리로 삼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욕망이 마음에 숨어 있으면 여기서 부(富), 귀(貴), 안락(安樂)을 바라게 되고, 다시 부(富)는 탐욕을 낳고, 귀(貴)는 거만함을 낳고, 안락(安樂)은 욕심과 방탕과 게으름을 낳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자아를 이기면 질투를 낳고, 자아를 빼앗으면 분노를 낳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여러 가지의 죄와 허물, 해서는 안될 생각과 언동 등은 이 일곱 가지가 모여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욕망을 이기고 덕을 닦는 일은 평생토록 힘써도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것은 세 가지 이치에 어둡기 때문이라고 하여,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 첫째이고, 마음을 깨끗이 하지 않는 것이 둘째이며, 절차를 따르지 않는 것이 셋째이다 라고 하였다. 빤또하는 욕망을 이기고 덕을 닦는 더없이 어려운 일을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하느님(上帝)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느님(上帝)이 인간과 사물의 참된 주인임을 알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는 참된 지름길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 동쪽으로 오게 되었는데, 중국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에 덕을 닦고 사욕을 이겨내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이가 많이 있고, 방법도 우리와 같고 의향(志, will)도 일치하는데 세 가지의 폐단 때문에 막히는 것이 한둘이 아닌 듯하여 이에 들은 것과 좁은 식견으로 깨우침을 주고자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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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위에 링크 주소를 제시한 칠극자서 원문에서 "天堂" 이라는 표현을 우리말 번역문에서, "하늘(heaven, 천당)" 로 번역하는 대신에"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로 번역하였는데, 전후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이 번역은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 중에 지상에 개시하신(즉, 처음으로 시작하신)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는, 예수 재림의 날까지는, "하늘(heaven, 천당)"과 결코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7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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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극」은 일곱 가지의 죄와 이를 이겨내는 일곱 가지의 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죄의 근본에 일곱 가지의 실마리가 있다고 한다. 그 첫째는 교만이고, 둘째는 질투이고, 셋째는 탐욕이고, 넷째는 분노이고, 다섯째는 마음이 먹고 마시는데 빠지는 것이고, 여섯째는 여색에 빠지는 것이고, 일곱째는 착한 일을 함에 게으른 것이다. 또 이 죄의 일곱 가지 실마리를 이겨내는 데는 일곱 가지의 덕이 있다고 한다. 그 첫째는 겸양으로 교만함을 이겨내는 것이고, 둘째는 남에게 어질게 대하고 남을 사랑하여 질투를 이겨내는 것이고, 셋째는 재물을 버려 탐욕을 이겨내는 것이고, 넷째는 참고 견딤으로써 분노를 이겨내는 것이고, 다섯째는 집착을 없앰으로써 먹고 마시는데 빠짐을 이겨내는 것이고, 여섯째는 욕망을 끊어서 여색에 빠짐을 이겨내는 것이고, 일곱째는 하느님을 부지런히 섬겨서 착한 일을 함에 게으름을 이겨내는 것이다. 이 책은 인간 죄악의 일곱 가지 뿌리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덕에 관한 이야기이다.

 제1편은 교만을 누르다. 즉 복오(伏傲)편이다.

 교만은 분수에 넘치는 영화를 바라는 것이다. 그 실마리는 매우 많지만 크게 네 가지를 소개한다. 그 첫째는 선(善)이 자기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선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이고, 셋째는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고, 넷째는 남을 경멸하며 자신은 뭇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는 교만이 사자처럼 사나운데, 이는 겸손으로써 눌러야 하므로 복오 편을 짓는다고 하였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이 준 것이다. 그런데 교만한 이들은 하느님이 준 것을 그들 스스로 가진 것이라고 한다. 착한 말, 아름다운 행실 그리고 재능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준 재물인데, 그것으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복을 사게 하고, 하느님의 빛나는 이름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할 것을 가르치고 권하려 하였는데 자신의 것으로 자랑하며, 자신의 영화를 도모한다면 도둑질한 죄에서 어떻게 벗어나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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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읽을 수 있는, 칠극卷之一, 제731쪽에서 "天堂" 이라는 표현을 우리말 번역문에서, "하늘(heaven, 천당)" 로 번역하는 대신에"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로 번역하였는데, 전후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이 번역은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 중에 지상에 개시하신(즉, 처음으로 시작하신)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는, 예수 재림의 날까지는, "하늘(heaven, 천당)"과 결코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7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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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항상 겸손하라고 한다. 만약 사람이 하느님은 위대하지만 나는 보잘것없고,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나지도 자라지도 못했을 것이고, 현명할 수도, 지덕(知德)이 더없이 뛰어나고 사리(事理)에 완전히 통할 수도 없을 것임을 생각한다면, 그의 마음은 하느님에게 겸손해지고, 나아가 남들에게 겸손해질 것이다. 이것이 겸손이라고 하였다.

 겸손의 덕의 최상의 경지에 오르는 데는 일곱 단계가 있는데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고, 그것을 마음속으로 깊이 뉘우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고, 그것을 밖으로 환히 알리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그리고 남들에게 내가 실제로 이러한 죄를 가졌음을 믿게 하는 것이 네 번째 단계이고, 남들이 비난한다는 소문을 전해 듣더라도 참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섯 번째 단계이며, 그리하여 나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라도, 즐거워하며 성내지 않는 것이 여섯 번째 단계이고, 나에게 모욕을 입혀 주기를 깊이 바라는 것이 일곱 번째 단계이다.

 제2편은 질투를 가라앉히다. 즉 평투(平妬) 편이다.

 질투는 마치 파도처럼 일어나는데, 이는 용서로써 가라앉혀야 한다고 한다. 하느님은 주는 것을 마음으로 삼고 있다. 하느님의 마음은 지극히 공정하다. 그런데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사랑을 베풀면서, 남에게는 성을 내고, 자신에게는 두터우면서, 남에게는 인색한 것이니, 바로 하느님과 서로 등을 지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남의 나쁜 점을 헤아리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며, 남을 헐뜯는 말을 하는 것을 경계하며, 헐뜯는 말을 듣는 것을 경계하라고 한다. 헐뜯는 데는 일곱 가지의 실마리가 있는데 첫째는 남의 드러나지 않은 행위를 이유 없이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는 남의 잘못을 좋아하는 것이고, 셋째는 이유 없이 퍼뜨리고, 또 늘려서 퍼뜨리는 것이며, 넷째는 거짓되게 충고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남이 드러내지 않고 한 착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여섯째는 남의 환히 드러난 착한 일을 없애버리는 것이며, 일곱째는 착한 일을 나쁜 일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분노와 질투는 연이어 오고,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정(情)이므로 근본이 서로 비슷하다. 어짊과 사랑은 순수한 덕이므로, 이것을 하나로 묶어서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참사랑도 마음속에 머물러 있다면 알 수가 없으니, 반드시 크게 실천으로 드러내어야 한다면서 사람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이 네 가지 있다고 한다. 그 첫 번째는 사람의 사랑은 하느님이 준 것이므로 하느님이다. 두 번째로 사랑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 이는 나의 육신이 아니라 나의 정신이다. 세 번째로 사랑해야 할 것은 남이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용서뿐이다. 네 번째로 사랑해야 할 것은 나의 정신을 받들어 섬기며, 그것을 도와 착한 일을 하려고 하게 해야 하는 자신의 몸이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했던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은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마태 22,39)는 것이라고 하였다.

 제3편 탐욕을 풀다. 해탐(解貪)편이다.

 탐욕의 마음은 마치 손아귀에 물건을 잡고 있는 것처럼 단단한데, 이는 베풂으로 풀어야 한다고 한다. 탐욕은 자신의 재물이 아닌 것을 손에 넣으려 하는 것이다. 부(富)는 하느님이 내려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손에 넣는 방법도 하느님이 정해 두었다. 그러면서 베풂의 덕을 논하는데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줄 때에 내키지 않아 하면서 베풀어주는 것과 또 베풀어주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더디게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두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은혜를 베푸는 것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하느님을 대신해서 가난하여 가진 것이 없는 이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제4편 분노를 없애다. 식분(熄忿)편이다.

 분노는 타오르는 불과 같은데, 이 불은 참음으로써 꺼야 한다. 분노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여야만 원수로 여기는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갑자기 성을 내는 것은 사람의 감정이다. 그러나 성냄을 쌓으면 사람을 죄에 빠뜨리게 된다고 하였다. 참음으로써 어려움에 맞서라고 한다. 참음으로써 복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참음은 모든 덕을 지켜주고, 모든 악을 막아 준다고 하였다. 참음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처음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애써 참는 것인데, 이는 참음의 시작이며, 다음은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즐겁게 참는 것인데, 이는 참음이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마지막은 참아 낼 어려운 일을 얻으려고 하여 그것을 찾고, 이미 그것을 얻었으면, 즐거워하며 그것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는 것인데, 이는 참음에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고생과 어려움으로 덕을 늘이라고 하였다. 세상의 일은 세 가지가 있을 뿐인데, 곧 참된 복이 하나이고, 참된 재앙이 하나이며, 복도 아니고 재앙도 아닌 것이 하나라며, 살아 있을 때 덕을 쌓는다면, 죽은 뒤에 영원히 즐거울 것인데 이것이 참된 복이며, 그러나 살아 있을 때 죄를 지었다면, 죽은 뒤에는 영원히 괴로움을 받을 것인데 이것이 참된 재앙이라고 하였다.

 제5편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막다. 색도(塞?)편이다.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이들은 마치 도랑처럼 음식물을 집어삼키는데, 이는 절도로써 막아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먹고 마시는 것에 절도가 없다는 것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이로움과 의로움 그리고 즐거움의 아름답고 좋음 셋인데 절도에 맞게 한다면 이 셋을 누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잃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면서 정도를 넘지 않는 덕을 논하면서 “정도를 넘지 않는 덕을 행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니 맛있는 음식을 끊는 것, 먹고 마시는 것을 적게하여 배부름에 이르지 않는 것, 과일과 물만 마시는 것, 채소만 먹고 소금을 뿌리거나 기름을 넣지 않는 것, 술과 고기를 끊고서 담백한 것을 먹는 것 등이 정도를 넘지 않는 덕이라는 뿌리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윤회사상과 인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이는 세상 사람들의 악함을 징계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죄악은 세상의 모든 죄악의 근원인 재물을 좋아하는 것, 귀함을 좋아하는 것, 편안하고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하며,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사람과 사물을 맡아 다스리는 주인이 있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으며,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정한 법칙과 정해진 장소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천당과 지옥”이라고 하였다.

 제6편 음란함을 막다. 방음(坊淫)편이다.

 음란은 마치 물이 넘쳐 나는 것과 같은데, 이는 마음을 곧고 바르게 하여서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있는데, 깨끗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몸도 깨끗하고 마음도 깨끗해야만 덕이 된다고 하였다. 정덕을 논하면서 “음욕을 끊는 정결에 대하여 세 등급을 이야기하는데,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의 정결과 홀아비와 홀어미의 정결 그리고 동정의 몸을 지키는 정결을 말하며” 정결은 사람의 마음을 세상의 즐거움과 세상의 근심에서 떠나가게 한다며 정결을 지키면 마음을 다하여 덕을 닦고 하느님을 섬기게 된다고 하였다.

 정덕은 하늘에서 사람의 영혼을 빛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육신을 죽은 뒤에도 향기롭게 하며, 땅에서 썩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결혼의 바른 뜻을 이야기하는데 하느님은 한 지아비가 한 지어미만을 짝하도록 하였다며 이것이 바른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친구 사이를 맺을 때에도 서로를 대함이 대등하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는데 어찌 부부 사이를 맺으면서 대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내는 동등한 것이다.” 하는 말을 하였다.

 제7편 게으름을 채찍질하다. 책태(策怠)편이다.

게으름은 마치 둔하고 힘이 빠진 말과 같다. 그런데 이는 부지런함으로써 채찍질해 주어야 한다면서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간보다 귀중한 보배는 없다. 그리고 어떤 사물도 우리가 가질 수 없지만, 오직 시간만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린 뒤에는 다시 돌이킬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게으름은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가니 큰 허물이며 재앙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간에 기대어서 분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공덕을 쌓을 때 시작이 좋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좋은 것이 아니며 끝이 좋아야만 좋은 것이라며, 평생의 일 가운데 마지막 날의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일을 선택할 때에는 반드시 세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면서, 하나는 선으로, 인간의 욕망을 이겨내고, 바른 도를 닦고, 하느님을 섬겨서 죽은 뒤의 영원한 세월의 일을 미리 준비함에 힘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 하나는 이로움으로, 일이 끝이 난 뒤에 마음의 덕에 이로움을 주어야 하고, 또 하나는 언제나 하느님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도덕에 마음을 기울이는 참된 생각을 품고 있을 뿐, 바깥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부지런함의 덕을 논하면서, 우리들은 잠시 뒤에 반드시 죽게 된다. 하늘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다. 덕에 힘을 기울이면 죽은 뒤에도 우리의 목숨은 영원할 것이라고 하였다. 

맺는 말 

「칠극」은 유교의 도덕적 수양론을 중심주제로 풀어놓은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이다. 유교의 사상과 도에 대하여 긍정적 평가를 내리면서 지식과 수덕을 연결시킨다. 즉 유학의 인간 중심적 윤리방향과 관습에 대해 그리스도교적 하느님 중심의 수양 논리를 연결하여 소개하는데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등과 같은 그리스도교 고유의 가르침을 우선적으로 전하기보다는 이 세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 구체적 삶 안에서 사악함을 극복하고 덕을 닦는 법을 가르친다. 

「칠극편서」에서 “마음을 붙들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서, 하늘이 준 본성에 따라 하늘의 일에 이르는 것, 이것이 유학자의 참된 본령이요 참된 학문이라는 유교의 윤리관에 저자는 배움의 바탕을 하늘에 두지 않고 오직 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있으니, 이는 넓은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그 키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 폐단은 바야흐로 도적을 아들로 생각하고, 마귀를 천사로 생각하게 되어 가니, 아아,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저자는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를 주도하는 문화상징을 택하여 삶에서 사악함을 극복하고 덕을 닦는 법을 가르쳤다는 것은 전교에 현명한 일이었다. 

저자는 내용에서 죄의 근본에 일곱 가지의 실마리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곱 가지에 이르는 죄의 원인을 극복할 수 있는 일곱 가지의 덕을 제시하고 있다. 내용의 각 편에서 덕을 닦으라 또는 덕으로 나아가라고 일러준다. 덕은 무엇인가? “덕(德, virtue)은 [윤리적] 선을 행(즉 선행을)하고자 하는 몸에 밴(habitual) 확고한 마음가짐(will, 의향, 志)이다. 덕은 인간이 선한 일을 하게 할 뿐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덕으로 나아가는 것은 사다리에 오르는 것과 같으니, 조심스럽게 오르며 서두르지 마라. 급히 서두르면 반드시 떨어진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칠극」이 담고 있는 내용 및 그 사상적 전체는, 첫째, 인본주의적 지혜문학서로서 인간의 완성을 추구하는 한편 이상(理想)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보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둘째, 신유학에서 보편화된 공(公)과 사(私)라는 윤리적 범주를 수용하고 있다. 셋째, 신유학의 본성론인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구분을 중세 그리스도교의 인간론인 영혼과 육체라는 분류로 재해석하고 있다. 넷째, 시간의 사용에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고 마지막 때를 인간의 최종 목표와 직결시키고 있다. 

그리고「칠극」에 대하여 성호 이익은 「칠극」이 유학의 극기설과 한 가지라고 전제한 다음, 모든 악의 세 가지 큰 줄기는 욕부(欲富), 욕귀(欲貴), 욕일락(欲逸樂)인데, 거기에는 많은 가지가 생겨서 탐욕(貪慾), 오욕(傲慾), 도욕(?慾), 음욕(淫慾), 태욕(怠慾), 질투(嫉妬), 분심(忿心)이 생긴다고 설명하고, 이 일곱 가지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사색,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하였다. 나아가 이 책이 천주귀신지설(天主鬼神之說)을 제외하면 유교와 같을 뿐만 아니라 극기를 설명하는 비유는 오히려 유교보다 다양하고 적절하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순교자 윤지충이 1791년 전주에서 신문을 당할 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칠극」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칠극은 이러합니다. 교만을 이기기 위한 겸손, 질투를 이기기 위한 애덕(愛德, charity), 분노를 이기기 위한 인내, 인색을 이기기 위한 희사의 너그러움, 탐식(貪食)을 이기기 위한 절식(節食), 음란을 위기기 위한 금욕, 게으름을 이기기 위한 근면, 이 모두가 덕을 닦는 데 도움을 줌이 명백하고 정확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선천주교회가 양반 지식인들의 새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퍼져가고 확대됨에 따라 교리서의 한글 번역 작업이 필수적인 과제였다. 기록상 나타난 바 없으나 「칠극」은 이벽의 부인 류한당(柳閑堂) 권씨가 한글로 번역하였다.고 전한다.

끝으로 신앙의 선조들이 보여준 삶은 가슴에 벅차오르는 감격을 안겨 주었으며 비밀스런 격려도 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는 우리 신앙의 원천이다. 우리들은 천주교 성인 성녀에 있어 한국 순교 성인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겨 왔다. 그렇지만 교회는 항상 성인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순교 성인들이 남겨준 신앙유산은 너무도 많다. 우리 천주교인들은 한국천주교회사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믿음의 지표이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신앙의 지혜임을 확인하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히브 13,7)

우리가 비록 피 흘려 순교하지는 못하지만 순교자의 삶을 살 수 있다. 지금을 살고 있는 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마지못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느님의 의향(志, will)을 따라 기쁘게 사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증거하고,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와 쾌락보다 하느님의 의향(志, will)을 우선으로 여기며, 명예와 안일을 추구하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따라 묵묵히 살아가고,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감수하며, 이웃의 실수를 관대하게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는 삶이 바로 순교라 하겠다.

순교자를 자주 묵상하고, 특히 한국 순교 성인들의 그 정신을 익혀야겠다. 순교자들의 피로 축성된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참으로 복되다. 천상에서 복을 누리고 있는 성인들이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기 때문이다.(끝)

<참고서적>

빤또하, 칠극, 박유리 역, 일조각,
최재건, 조선후기 서학의 수용과 발전, 한들출판사
가톨릭교회교리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가톨릭교회교리서(요약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경향잡지, 1993년 5월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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