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방황의 끝에 선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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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cary] 쪽지 캡슐

2000-05-27 ㅣ No.965

 

빗줄기가 가늘어진 틈을 타 뒷산에 다녀왔습니다.

남편과 한 우산을 쓰고 산길을 걸으니 발 밑에 갓 튀긴 팝콘처럼 하얀 아카시아 꽃잎이 수북해 뽀드득 소리라도 날 듯 합니다.

지난 주말 볕 좋은 산자락에 조그만 밭을 일구어 고구마, 고추, 호박을 심어 놓은 터라

비가 반가울 밖에요.

줄기로 심은 고구마가 뿌리를 내릴 때까진 물이 필요하다는 남편 성화에, 운동하러 가는 길에 물통에 물을 채워 뿌리고 약수터에 가 물을 길어 먹이며 공을 들였거든요.

그 덕에 다른 밭의 것보다 훨씬 꿋꿋하게 서 있는 우리 고구마...

어린 생명이 자라는 모습은 어쩜 그리 경이롭던지요.                                 방황을 끝내려 한다는 소은성님의 말이 찡하게 다가왔습니다.

이태 전 봄, 사춘기의 한가운데 서 있던 딸아이는 "짜증나"를 입에 달고 살았고,

그 무렵 전 늘 물기에 젖어 지냈지요.

무슨 일인가로 딸아이가 에미 맘을 할퀴고 학교에 가고 난 아침, 책방에 들러 버스에서 내리니 눈앞이 캄캄해 왔습니다. 아니 사실은 화창한 봄날 샛노랗게 핀 개나리가 눈을 쏘아 눈앞이 하얘진 것인데, 내 맘과 너무나 다른 그 정경이 어찌나 서럽던지 돌아오자 마자 엉엉 소리내어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유별나게 딸을 예뻐하는 아이 아빠는 딸아이를 마음먹고 심하게 꾸짖은 다음날, 아이 방에 편지를 써 놓고 출근해서는 하루종일 설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소은성님이 방황 속에서도 고운 심성을 잃지 않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건 보이지 않는 부모님의 눈물과 기도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딸아이를 깊이 사랑하고 그 아이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길만이 딸아이를 바르게 서게 한다고 믿으니까요.

딸아이는 여전히 천방지축이고 가끔 마음을 아프게도 하지만, 생글거리며 살갑게 구는 몸짓 하나, 휴대폰에 찍어 주는 "엄마 미안해"라는 한마디에 새로운 희망을 가집니다.

어찌보면 효도만큼 쉬운 것도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에 관한 한 심각한 건망증 환자여서 손 한번만 정을 담아 잡아 줘도 예전에 마음 아팠던 기억을 모두 잊고 마니까요. 게다가 부모는 모자라기가 이를 데 없어 자식이 밝은 얼굴로 웃으면 앞뒤 못 가리고 흐뭇해집니다.

 

소은성님, 가족에게 고마운, 미안한 마음이 들거든 마음에만 담아 두지 말고 사소한 일에서라도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내일 다시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망정...

 

어머니에게(아버지에게) 힘이 되는 것은 먼 훗날의 큰 효도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몸짓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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