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인쇄

박미연 [aldus119] 쪽지 캡슐

2005-08-10 ㅣ No.463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이즈음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제목의 TV드라마가 인기라고 들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작금(昨今)의 반일정서(反日情緖)와 맞물려 새삼 이순신 장군에 대한 향수(鄕愁)가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근세 35년간의 일제(日帝) 식민지배의 치욕을 비롯하여 먼 옛날부터 이어온 일본과의 악연(惡緣)으로 인해 한반도 안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피해의식을 마치 유전인자(遺傳因子)처럼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박정권의 유신시대가 나의 성장기였던 만큼 기존의 반일감정과 함께 북녘 정권에 대한 적개심(敵愾心)까지 학교에서 강제 주입 받으며 자라났으니 이순신 장군은 그 실체도 제대로 모른 채 무조건 신성(神聖)한 영웅으로 내 머리속에 각인 되고 말았다.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실제 삶이 이러했다는 말로 그의 치부나 인간적 약점을 들춰내려는 것이 아니라 12척의 전선(戰船)으로 133척의 왜선(倭船)에 대적한 명량해전을 앞두고 그가 했다는 말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과 비슷한 바가 있어 문득 기억의 수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의 말인즉 이러하다. - “반드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다(必死卽生必生卽死)”


젊은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말이지만, 늙은이든 젊은이든 죽음이 무섭고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대의명분(大義名分)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초개같이 던지는 의사열사(義士烈士)들의 영웅적 전기를 읽으며 우리 모두는 감동한다. 또 그들이 참으로 존경 받을 만한 분들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또한 대개의 사람들은 막연한 감동과 동의에 그칠 뿐 그 자신도 그러한 삶에 투신하겠다는 결의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현재진행형의 상황으로 상정하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진지하게 묻기보다 애써 회피하거나 굳이 모른 채 하는 것이 현실적인 내 모습이다.


죽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어떻게 죽든 살아있는 모든 것은 결국 죽는다(有始有終 生者必滅). 모른 채 하고 싶고 서글프고 골치 아프고 귀찮은 일이지만 어느 누구도 이 문제와 대면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한 극복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은 요원(遙遠)한 일이기에 인간은 괴롭다.

차라리 여타 짐승처럼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만이 아직은 먼 거리의 죽음을 지금 미리 느끼며 살아간다. 피할 수 없으면서 해법도 없으니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또 따져보면 그 비참함이 동시에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 무슨 아니러니인가?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연약한 갈대 같은 존재이지만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주는 이를 전혀 모르고 있기에 인간은 우주보다 위대하다. 인간이 우주보다 위대한 이유는 그가 자기의 비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자신의 비참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참을 깨닫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죽음 문제에 직면함으로서 인간은 비로소 철학을 한다. 죽음 자체와 죽음의 의미는 아직 살아있는 이 시간과 그 수많은 활동들을 제한하거나 확장한다. 그러기에 선인(先人)들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보라고 했을 것이다. 죽음 자체를 최종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천차만별한 인생 태도가 결정된다. 그저 전전긍긍하면서 일신(一身)의 안락함에만 초점을 맞춰 질기디 질긴 인생을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누가 그렇게 살고 싶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말만 그렇게 할 뿐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산다. 현상적으로 말이다.


순교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진리로 알고 그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기리는 라우렌시오 성인처럼 젊고 능력 있고 잘난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할 때 우리는 더욱 숙연해 질 수밖에 없다. 그를 본받고자 하는 우리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도 그의 순교행위를 어리석다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그의 삶을 헛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긴 세월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수(天壽)를 다하고 죽었지만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인생도 있을 것이요, 젊은 나이에 모란이 지듯 떠났지만 그 보람과 향기를 후세에 끼치는 인생도 있다.


순교자들은 죽음이 무섭지 않아 죽음도 불사(不辭)한 사람들이 아니다. 죽음보다 더 큰 삶의 문제를 고민하였고 마침내 제대로 살기 위하여 기꺼이 죽음 속으로 뛰어든 사람들이다. 종교 밖의 의사열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우리도 먼저 죽음보다 삶을 고민하자.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금 내 모습을 되돌아보자. 신앙인으로서, 십자가의 죽음 위에 꽃피운 예수님의 부활이 내 삶의 척추로 곧추 세워질 때에 이미 죽음은 내 손아귀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죽음 때문에 이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혜안(慧眼)도 열리게 된다. / 류종구 신부


 




210 4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