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20주일] 영생 (요한 6,51-58)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8-19 ㅣ No.121

 

 

 [연중 제20주일] 영생 (요한 6,51-58)

 

잠언의 저자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예지의 길을 걸으라는 지혜의 외침을 전한다. (잠언 9,1-6)
1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
2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
3 이제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언덕 위에서 외치게 한다.
4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5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


바오로 사도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라고 한다. (에페 5,15-20)
형제 여러분, 15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19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20 그러면서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하시며,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잠언9,1~6)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깍아 자기 집을 지었다.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1~2)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시라.(5)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예지의 길을 걸으라."(6)

 

잠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언 1~9장이 일정한 주제에 따라 체계적으로 구성되었다면, 잠언 10장 이후부터는 아무런 관련성없이 수집되고 편집된 잠언들로 이루어졌다.

 

잠언 1~9장은 다른 부분에 비해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하는 이 부분은 표제(1,1), 시작하는 말(1,2~7), 교훈 모음(1,8~9,18)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잠언 1~9장은 전체 작품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기초가 된다.

잠언 1~9장이 보여 주는 종교적 성격('모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라는 사상의 강조)은 잠언 10~31장의 내용이 다소 비종교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 종교적인 내용들과 구별되지 않음을 전제하는 역할을 한다.

 

잠언 1~9장에서도 특별히 잠언 1장 2~7절은 책 전체를 요약하고 있는데, 잠언을 일종의 '교육서' 제시하며,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1,7)임을 대주제로 천명한다.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참된 지혜이며, '행복의 시작'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1장 7절의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란 표현은 첫 번째 잠언집의 마지막 부분인 잠언 9장 10절에서 반복되고, 잠언 31장 30절에서도 다시 언급됨으로써, 일종의 수미(首尾) 상관적 구조를 형성한다.

 

잠언 8~9장에서는 숙녀 지혜 등장하는데, 지혜의 여성적 의인화 이 부분의 핵심이며, 그녀는 창조 때에 하느님의 협력자로서 활동했다고 소개된다.

새 성경의 잠언 9장을 보면, '지혜'라는 여인의 초대라는 제목으로 9장이 시작된다.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깍아 자기 집을 지었다.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1~2) 

 

본장은 잠언 1장 8절 이후부터 계속되어 온 젊은이들을 위한 솔로몬의 열다섯 가르침 가운데 마지막 가르침이다.

솔로모은 가르침을 마감하면서,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촉구하기 위해서 지혜의 초청(9,1~12) 및 '우둔함'이라는 여자의 초대(9,13~18)와 이에 따른 반응의 상반된 결과를 제시된다.

 

먼저 전반부인 잠언 9장 1~12절에서는 지혜를 의인화하여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초청하며, 이러한 초청에 대한 수락 여부에 따라 행복과 멸망이란 결과가 주어지게 됨을 선언한다.

 

잠언 9장 1절과 2절에서는 지혜가 사람들을 위하여 집을 짓고 잔치를 준비했음을 밝힌다.

여기서 주어진 '지혜'(호크모트; hokmoth; wisdom)복수형인 반면에 동사는 단수형이다. 이것은 지혜가 비록 복수 형태로 제시되었다고 하더라도, 단수임을 나타낸다.

 

이처럼 단수를 복수 형태로 제시하는 것은 지혜가 신적(神的) 탁월성을 지닌 완전한 지혜임을 보여 준다(1,20.22; 14,1; 24,7). 

본절에서는 이러한 지혜가 집을 지었다고 묘사된다.

 

여기서 지혜의 집은 잠언 7장 27절('그 집은 저승으로 가는 길이라 죽음의 안방으로 내려가게 된다')에 나오는 저승으로 인도하는 간음녀의 집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집이다.

아울러 본문의 지혜를 그리스도로 본다면, 이 집은 강생(육화; Incarnatio)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요한 2,19.21.22).

 

한편, 이 집은 '일곱 기둥'('쉬브아 암무데하'; shibah ammudeha)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성경에서 일곱(쉬브아; shibah)완전수로 종종 사용된다. 따라서 이것은 지혜의 완전성 혹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 표현은 모두 완료형으로 표기되었는데, 이것은 지혜 혹은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초청할 준비를 이미 모두 완료하였음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잠언 9장 2절에서 지혜가 사람들을 청하기 위하여 짐승을 잡고 술을 만들어 상을 차리는 모습 말하고 있다.

본절에서 동사를 세 번 사용하여 이처럼 잔치 준비 상황을 묘사하는 것 잔치상을 차리기 위해 지혜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이 잔치가 풍성한 잔치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특히 짐승을 잡은 사실이 언급되는 것 지혜의 초청으로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맛볼 수 있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포도주(야인; yayin)를 혼합하는 것 포도주에 향료를 섞어 맛과 향기를 좋게 할 뿐 아니라 도수를 높이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지혜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 상당한 영적 기쁨과 활력을 제공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상을 차렸다'에서 '차리다'(갖추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레카'(arekah)의 원형 '아라크'(arak) '순서대로 놓다', '배열하다',' 정돈하다'(창세22.9; 레위1,7; 이사21,5), '준비하다', '채비하다'(판관17,10)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지혜가 영적 영양분과 기쁨을 제공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할 뿐만 아니라 질서있고 체계적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시라.' (5) 

 

빵과 술 일차적으로 만찬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와 예지(명철)를 의미하는 비유법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지혜의 초청은 그 목적이 지혜와 예지를 교훈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잠언 9장 2절과 대응되는 표현이라 할 수 없다.

 

이렇게 지혜와 예지를,  먹는 음식인 빵과 포도주(술)라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나타내는 이유는 먹는 음식이 육신 생명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처럼, 지혜와 예지의 교훈을 받지 않으면 영혼이 영적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 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잠언 9장 6절에 나오는 '살아라'(생명을 얻으라; yheyu; live)는 구절이다.

 

한편, 본절을 구원사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여 빵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그의 몸(성체)을, 포도주는 피(성혈)를 예표하고 있다(마태26,26~28; 오늘 주일 복음인 요한 6,53-58)고 보기도 한다.

즉 초대 교회 시대부터 본문은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성만찬을 예시하는 구절로 이해해 왔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으라' (6)

 

본절에서는 지혜와 만찬을 준비하고 교육 대상자들을 초청하는 분명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본절은 세 개의 명령으로 되어 있다. '어리석음을 버리라'는 것이 첫번째 명령인데, 어리석은 자가 지니고 있는 어리석음 그 자체를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명령은 '살아라'(생명을 얻으라)는 것인데, 본문의 '생명'은 단순히 살아 숨쉬며 목숨을 연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라, 튼튼하고 건강한 생명(3,8; 16,24; 17,22),  장수하는 생명(3,2.16; 10,27), 일상 생활에서 의미가 충만하고 활력 넘치는 생명을 지칭한다.

 

이처럼 지혜는 지혜를 얻는 자가 활력 넘치는 생명과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제시함으로써, 그 무엇을 추구하기 보다 지혜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명령은 '예지의 길을 걸으라'이다.

여기서 '예지의'에 해당하는 '삐나'(bina)'이해하다', '통찰하다', '분간, 식별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빈'(bin)의 명사형 표현이다.

 

이것은 어떤 일이나 사건 등에 대한 판단 능력 내지는 예민한 통찰력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특히 선악(善惡)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온 선물 소개되며(다니2,20), 하느님의 말씀이나 뜻깊은 관련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며(잠언2,9; 시편111,10), 궁극적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일(2,5),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그 능력은 구체적으로 표출된다.

 

그리고 '길을'에 해당하는 '뻬데레크'(bederek) '~안에'(in)란 의미를 지닌 전치사 '뻬'(be)'길'이란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함축적으로 삶의 방식, 태도 등을 나타내는 '떼레크'(derek)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예지의 길'악을 피하고 선을 추구하는 삶,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적용하며 바른 판단을 내리는 삶, 그리함으로 주님을 경외하며 정의와 공정을 구현하는 삶을 사는 것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성체의 삶을 미리 예표하는 것이다.



 

 연중 제20주일 복음(요한6,51~5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3)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6장 51절'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교훈을 더욱 확장해서, 생명을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이다. 살을 먹는 문제만으로도 그들 사이에 거친 논쟁이 벌어졌는데, 피도 마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그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모세의 율법이 피를 먹는 것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레위7,26.27), 하지만 이 두 가지 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 속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선포였다.

 

여기서 '얻지 못한다'에 해당하는 '우크 에케테'(euk echete; you have no)현제 시제로서 시대를 초월하여 변치 않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체성사를 암시하는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살을 뜻하는 빵(성체) 예수님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성혈)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요한 복음서를 쓴 시기인 1C 후반의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지향했던 성체성사의 궁극적인 의미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일치하여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데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살과 피'는 히브리적인 어법에 따르면, '전인'(全人)을 의미하는데,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일치 혹은 합일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대속적인 희생 제물을 영혼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2009/8/16 연중 제20주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인 당신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친교에 연결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믿음과 친교, 믿음과 성사, 믿음과 성체성사는 각각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완성합니다. 몸과 피, 곧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이제까지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이를 위한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이는 마술도 아니고 기계적인 성사 행위도 아닙니다. 믿음 없이 성사도 없고 생명도 없으며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도 없습니다.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뒤 환호할 때 “신앙의 신비여!”라고 표현하고, 성체를 모실 때 “그리스도의 몸. 아멘.”이라고 확신합니다. 믿음은 이를 표현하고 양육해 주는 성사의 전제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고 하시며, 그리스도와 사람 사이의 친교, 곧 당신 살을 먹고 당신 피를 마신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성체성사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생명을 신자에게 전해 줍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이는 삼위일체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사람과 하느님의 계약에 참여하게 됩니다.
‘살’에 대한 예수님의 끊임없는 언급은 사람들 가운데에 이루어진 육화의 신비로 이끌고 있습니다. 몸과 피의 지속적인 구별은 주님 생애의 양극, 곧 육화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암시입니다. 육화와 죽음 모두 성체성사와 연결되어 있고, 예수님께서는 성사 제정을 당신의 희생 제사적 죽음 전날에 분명하게 연결하십니다. 여기에 희생 제사와 성체성사가 지닌 복음 선포적 가치가 있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주일미사(나해) 12-08-19] - 연중 제20주일

 나를 먹어라

예수님,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 등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보자면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성현들처럼 장수하시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돌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혀 죽길 원하셨고, 당신을 먹는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있길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나를 먹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의미는, 조건 없는 신뢰를 하고 하느님과 하나 될 때 하느님은 우리의 에너지가 되시고,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를 통해 활동하게 되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왜 하필이면 ‘빵’이었을까요? 식욕이 당기고 효과가 탁월하다는 웅담이나, 곰 발바닥, 개소주, 산삼이면 어땠을까요? 굳이 빵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매일 먹는 빵, 즉 밥이라는 것이 별맛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생존을 위해 꼭 먹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빵으로 선언된 사랑이신 예수님의 살, 즉 ‘사랑 덩어리’가 바로 성체(聖體)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먹는 까닭은 참다운 삶을 위해서 사랑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며, 그 사랑이 바로 영원으로 넘어가는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식물도 물과 햇빛을 먹으면 예쁜 꽃을 피웁니다. 우리 인간도 육체의 양식을 먹고 영혼의 꽃을 피우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 때 아무 맛도 없는 성체를 받아먹지만, 그 성체의 힘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꽃, 즉 사랑을 꽃피워야 합니다. 또한 성체는, 몸을 던져 우리를 사랑하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몸뚱이기 때문에 그 성체를 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뇌와 결단을 우리가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고뇌와 결단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 죄 때문에 당신이 몸을 내놓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깊이 통회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랑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 살과 피를 내놓으셨으니, 우리도 사랑을 위하여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며 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에게, 회개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으로 보답하려는 그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성체를 먹습니다.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늘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측은지심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무조건, 한없이 용서합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기몸을 남에게 먹으라고 내어 놓습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의인들을 위해서는 물론 죄인들을 위해서도 죽습니다. / 성체를 먹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고찬근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0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