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성가정 축일] 나자렛 (루카 2,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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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12-30 ㅣ No.138

 

 

[성가정 축일] 나자렛 (루카 2,41-52)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해질 때에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로 옮겼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고 한다. (집회 3,2-6.12-14)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바오로 사도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콜로 3,12-21)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18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9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20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21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내시는데,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간다. (루카 2,41-52)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독서 (집회3,2-6.12-14)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3~6) 

 

집회서 제1부(1,1~16,23)에서 저자는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임을 천명한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므로 주님을 제대로 알아 모시지 않으면 그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다(1,14).

여기서 '경외함'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실제로 저자는 먼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언급한 데(1~2장) 이어서 곧바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가르친다(3장).

 

오늘 성가정 축일 독서는 집회서 3장 2~6절과 12~14절의 말씀이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3)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6)

이 말씀은 탈출기 20장 12절의 십계명을 연상시킨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공경하라'라고 번역된 '캅베드'(kabbed) '무겁다','존귀하다', '많다'뜻을 지닌 '카베드'(kabed) 능동형 명령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존경하라','절대적으로 존귀케 하라' 매우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카베드'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며 경외한다는 문맥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은 부모를 섬기고 공경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잘 보여준다.

 

사실 부모단순히 자식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매체 혹은 이 땅에서 양육하고 지원하는 물리적 후원자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바대로 부모 이 땅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권위를 지닌 존재이므로 자녀는 부모 섬기는 일을 하느님 섬기듯이 정성껏 하여야 한다.


또한 이렇게 부모를 섬기고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법까지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느님 뿐만 아니라 그 권위를 지상에서 대행하는 우리의 육신적인 아버지이신 부모를 하느님께 하듯 섬겨야 할 것이다.

 

탈출기 20장 12절에 '오래 살 것이다'라고 번역된 '야아리쿤'(yaarikun) '연장하다', '확장하다'는 뜻이 있는 '아라크'(arak)사역 능동형 동사로서 '길게 하여 주다', '연장시키다'는 뜻이다.

'아이리쿤'(airikun)는 사역형 동사이므로 '길어지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주어하느님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즉, 생명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장수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생명 연장의 약속이 아니라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 삶이 복될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실로 하느님께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면,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 인생을 또한 책임져 주시지 않겠는가?


사도 바오로는 이 아름답고 복된 약속을 에페소서 6장 1~3절에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자녀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하신 약속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축일 제2독서 (콜로3,12-21)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18-21)

 

콜로새서 3장 12-17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린 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신앙의 덕목을 밝히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콜로새서 3장 18절 -4장 1절에서는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삶의 지침들 중에 특히 가까운 인간 관계에서 지켜야 할 덕목들을 제시한다.

 

'아내 여러분'으로 번역된 '귀나이케스'(gynaikes; wives)의 원형 '귀네'(gyne)'여성'이라는 뜻과 '아내'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는데, 본절에서는 가정을 전제로 하므로 '아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사도 바오로는 본격적인 권면을 하기에 앞서서 아내들에게 이 권면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호격으로 새 단락을 시작한다.

 

 

여기서 아내의 본분을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순종하십시오'로 번역된 '휘포탓세스테'(hypotassesthe; submit)의 원형 '휘소탓소'(hypotasso)는 '~아래에'라는 뜻을 지니는 전치사 '휘포'(hypo)'두다', '놓다'를 의미하는 '탓소'(tasso)의 합성어로서 아무개의 권고나 충고, 통제에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이 단어는 군사 용어로서 상관들의 통치권에 대한 하급 군사들의 복종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적 순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심과 사랑하는 마음과 신뢰를 가지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가정을 다스리고 이끄는 권한을 남편에게  주었기 때문에 아내들은 남편들을 잘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아내의 순종하는 정결한 행위로 남편을 구원할 수도 있으므로 순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3,1-2)

 

창조 질서에 따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한 창조 원리로도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언급에서 나타나는 대로(1코린11,3.8.9), 여자가 남자의 보호를 받고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만드신 가정의 질서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은 신앙의 의무요(에페5,22-24) 하느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따르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내가 더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다. 동등한 관계에 있어서도 질서를 위해 순종이 필요할 때가 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동등하시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께 순종하였듯이 아내도 남편과 동등하지만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질서를 위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아내가 남편을 잘 섬길 때 가정이 질서가 유지되고 하느님의 법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은 자신의 인간적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더 높고 위대한 하느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세를 늘 갖고 있어야 한다.

아내의 순종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가장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느님 아래에서 가정을 질서있게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아내의 순종은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남편들이 아내에 대하여 지켜야 할 본문은 아내를 사랑하고, 모질게 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십시오'로 번역된 '아가파테'(agapate)의 원형 '아가파오'(agapao)는  어떠한 인격체를 향하여 좋아하는 마음과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서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내를 좋아하며 소중히 여기고 아내가 모든 것에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자기 희생적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agape)의 동사형이 사용된 것은 남편이 육체적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이며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부부 생활도 이러한 아가페적 사랑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동일한 옥중 서간인 에페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어주신 그 사랑에 비유한다(에페5,25).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위가 동반된 자신의 전부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의 헌신적인 사랑과 아내의 순종은 가정을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 두 요소는 상호 연관성을 가지는데, 아내가 순종하면 남편은 사랑하게 되고, 남편이 사랑하게 되면 아내는 순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 부부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덕목임을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3장 18절의 아내에게 주는 권면에서와는 다르게 콜로새서 3장 19절의 남편에게 주는 권면에서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준수 명령외에 한 가지 금지 명령을 더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질게 대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피크라이네스테'(pikrainesthe; be harsh; be bitter)의 원형 '파크라이노'(pikraino)화나게 하거나 괴로움에 덮여 비탄에 잠기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본절에서 금지를 나타내는 부사 '메'(me)와 함께 현재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괴롭히는 것을 중단하라', '괴롭히는 습관을 버려라'라는 강한 금지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권면은 당시 사회의 분위기와 여건을 반영하여 주어졌다고 여겨진다.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그렇게 높지 않았던 당시에 아내들은 남편의 폭력과 무관심의 희생물이 되기 쉬웠으므로, 이같은 사도 바오로의 권면은 매우 신선했다고 여겨진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3장 20절, 21절에서 보다 확대된 가족 구성원으로서 부모와 자녀사이의 순종과 존중에 대하여 권면한다.

먼저 콜로새서 3장 20절자녀들이 부모에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가 순종임을 밝힌다.

 

여기서 '순종하십시오'로 번역된 '휘사쿠에테'(hypakuete; obey)의 원형 '휘파쿠오'(hypakuo) '~아래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포'(hypo)그 자체로 이미 '듣다',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쿠오'(akuo)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를 직역하면, '아래에서 듣다'로서 '철저히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희랍 고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문지기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가서 그가 누구인가를 확인하여 문을 열며 영접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다.

 

콜로새서 3장 20절에서 이 단어는 문 두드린 자가 누구이고, 왜 문을 두드렸는지를 문지기가 알아내듯이 부모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순종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아내가 남편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 '휫포타소'(hypotasso)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나타낸다.

 

원문에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보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이 훨씬 강도 높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서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학습하기를 원하신다.

 

가정 안에서 부모께 대한 순종은 궁극적인 권위이신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연결되어 있다. 부모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위에 대리자들로서, 하느님께서는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통해 당신께 대한 순종을 훈련하게끔 하셨다.

 

이 훈련은 그들의 삶을 다스리는 절대적 권위에 대한 순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도리요 의무이다. 하느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이 땅에서 장수의 축복을 약속하셨다(에페6,1). 그러나 부모에 대하여 거부하고 불효하는 자는 죽음이 그 대가로 주어질 것이다(마태15,4).

 

한편, 사도 바오로는 자녀들의 순종의 영역'무슨 일에서나'로 번역된 '카타 판타'(kata panta; in everything; in all things)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녀들이 어느 한 가지나 몇 가지만을 한정해서 선택적으로 순종하고 공경하거나, 일시적이고 한정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무제한적으로 모든 면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특히 '무슨일에서나'라는 표현은 부모의 명령이 하느님의 권위와 자신의 양심에 위배될 경우, 마음대로 부모를 대적할 것이 아니라 순종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해야 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이것이'로 번역된 '가르'(gar)'왜냐하면 ~때문이다'라는 뜻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이것은 앞의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라는 명령이 바로 본문의 이유 때문에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원문은 '투토 가르 유아레스톤 예스틴 엔 퀴리오'(tuto gar euareston estin en kyrio; for this is pleasing well to the Lord; for this pleases the Lord)로서  '이것은 주님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고 번역된다.

 

여기서 전치사 '엔'(en)의 용례가 문제인데, '어떤 일이 ~에게 일어나다' 혹은 '어떤 인격적 존재의 면전에서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것은 주님 앞에서 기쁨이기 때문이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철저히 순종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순종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21)

'아버지 여러분'으로 번역된 '파테레스'(pateres)의 원형 '파테르'(pater)일차적으로 '아버지'를 뜻하고, 더 나아가서는 '양육자', '보호자', '지지자'라는 뜻도 가진다.

 

여기서 부모 중, 한 편 양육자로서의 아버지의 의미가 아닌 자녀에 대한 양육과 보호의 책임을 지닌 부모의 대표격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아버지 여러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자녀에 대한 양육자로서 어머니까지 포함한 부모를 가리키는 말이다(히브11,23).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 태도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것이다. '들볶지 마십시오'라는 뜻으로 번역된 '에레티제테'(erethizete; provoke to anger; embitter)의 원형 '에레티조'(erethizo)'흥분시키다', '화나게 하다'라는 뜻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리를 남용할 때 오는 부작용을 가리킨다.

 

자녀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부모는 자녀의 소유주가 아니라 소유주인 하느님을 대신하여 양육하는 양육자일 뿐이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에 대한 소유욕에 사로잡혀 자녀를 마치 자신의 꼭둑각시 인형처럼 다루어서는 안된다.

 

부모의 욕심대로 혹은 부모의 권위만을 내세워 자녀를 양육한다면, 자녀들은 상심하거나 반발하게 된다. 그래서 자녀를 성나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양육할 때 자녀들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에페6,4).

 

한편 '기를 꺾고 맙니다'로 번역된 '히나 메 아티모신'(hina me athymosin)'히나'(hina) 가정법' 구문으로서 목적을 나타낸다. 이것은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혹은 '기를 꺾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기를 꺾다', '낙심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티모신'(athymosin)의 원형 '아티메오'(athymeo; discourage) 부정 불변사 '아'(a)'열정', '열망'을  뜻하는 명사 '티모스'(thy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열정을 잃어버리다', '낙담하다','의기소침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열정과 용기를 잃은 자녀에게는 미래가 없다. 성장기에 있는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어린 격려이지, 심령을 상하게 하고 기를 꺾는 것이 아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자녀의 재능과 취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부모들만의 일방적인 강요는 자녀를 낙담하게 만든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자녀를 전락시키거나 교육해서는 안된다.

오로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탈란트를 발견해서 그것을 가지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한평생 살도록 양육해야 한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축일 복음 (루카2,41-52)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49ㄴ~51)

 

율법에는 13세 이상의 유다 남자들이스라엘의 3대 절기유월절(과월절), 초막절(장막절), 오순절(추수감사절)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켜야 할 것이 명시되어 있다.(탈출23,14~17; 신명16,17).

하지만 포로 시대 이후 여러 지역에 흩어진 유다인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경건한 유다인들은 적어도 유월절(과월절) 행사만큼은 참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율법의 의하면 유다인 남자들만 성전을 방문했지만(탈출23,17), 후기에는 여자들도 이 행사에 참여했으며, 예수님의 부모 역시 매년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방문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유다 사회에서는 13세가 되면 책임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들은 '바르 미츠바'(bar mitzvah)라는 '율법의 아들'이 되어 회당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탈무드나 미쉬나의 기록에 의하면, 유다 소년들은 13세가 되기 1~2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미리 올라가 '율법의 아들'이 되기 위한 행동들을 배웠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12살에 성전에 올라간 것은 다음 해에 있을 종교 의식을 미리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루카 복음 2장 43절'축제 기간'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는 니산월 14~21일의 일주일간의 규정들(탈출12,15; 레위23,8; 신명16,3)을 말하는데, 예수님의 가족들은 이 축제 기간을 다 준수했던 경건한 집안이었다.

그리고 축제 기간이 끝나고 소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고 나오는데, '남았다'에 해당하는 '휘페메이넨'(hypemeinen; stayed behind)'휘포메노'(hypomeno)의 부정(不定) 과거 능동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거나 실수로 남았던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당시 유월절에 참여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무리를 지어 내려갔고,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 쪽 가운데 한 편을 따라갔다.

그래서 요셉은 예수님이 마리아 일행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마리아는 요셉 일행에 있는 것으로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루카 복음 2장 44절'찾아보았지만'에 해당하는 '아네제툰'(anezetoun; they sought; they began looking for)의 원형 '아나제테오'(anazeteo)'반복'이라는 개념이 있는 접두어 '아나'(ana)'찾다'를 뜻하는 동사 '제테오'(zeteo)의 합성어로서 반복해서 찾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이 동사는 여기서 미완료 과거로 사용되어 부모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힘들게 두루 찾아다녔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룻길이 되는 노중 숙소에서 서로 만나 예수님이 없음을 확인했을 것이고, 그제서야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고 또 찾기 시작했다.

 

한편, 루카 복음 2장 45절'찾아내지'에 해당하는 '아나제툰테스'(anazetountes; seeking)현재분사형으로 사용되어 잠시 쉴 틈도 없이 분주하게 찾아다니는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는 루카 복음 2장 46절 이하에서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 가운데서 앉아 그들과 토론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부모가 무척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그 당시 소년 예수님과 함께 토론을 한 율법 교사들은 유다 랍비로서 당시 고령이었던 할렐, 삼마이, 그리고 가므리엘을 비롯한 유명하고 해박한 율법 박사들이었던 것이다. 소년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당시 성전 안에 있었던 회당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관한 것으로 토론했다.

 

루카 복음 2장 47절'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해당하는 '에피 테 쉬네세이 카이 타이스 아포크리세신 아우투'(epi te synesei kai tais apokrisesin  autou;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에서 '슬기', '지혜'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 '쉬네세이'(synesei)의 기본형 '쉬네시스'(synesis)'이해력', '통찰력', '추리력' 등을 뜻하는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지혜와 내적 통찰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삶의 경륜이나 경험에서 얻는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hia)와는 다른, 하느님의 지혜로 그들과 토론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율법 교사들은 경탄하였는데, 루카 복음 2장 47절의 '경탄하였다'해당하는 '엑시스탄토'(eksistanto; were astonished; were amazed) 원형 '엑시스테미'(eksistemi)'제 정신이 아니다', '넋을 잃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어 자신들보다 한 수 위의 예수님의 깊은 통찰력과 답변에 대해 계속적으로 경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드러내고 있다.

 

루카 복음 2장 48절에서 아기의 부모도 당시 성전에서 석학들과 토론하는 아들 예수님의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고, '얘야'라고 부른다

'얘야'에 해당하는 '테크논'(teknon; son)이라는 호격 안에서 '안도', '놀람', '기쁨', '책망'등의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교차된다.

특히 어머니가 애타게 찾았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애타게'에 해당하는 '오뒤노메노이'(odynomenoi; anxiously; sorrowfully)'매우 걱정하여'라는 뜻으로 아주 강한 느낌을 주는 단어이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와 요셉의 사랑이 남달리 깊었고, 인류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간적인 성장 과정을 밟아가시는 예수님을 잘 보살펴 드려야 하는 소명 의식 때문에, 그만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아들 예수님께 대한 근심이 컸을 것이다.

 

'제 아버지의 집에'

루카 복음 2장 49절'제 아버지의 집에'로 번역된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en tois tou patros mou; in my Father's house)에서 '집'으로 번역된 '토이스'(tois)는 관사 '호'(ho)여격 복수로서 '것들'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그래서 '제 아버지의 집에'는 '제 아버지의 것들에'라는 의미라서, '제 아버지의 집의 일들에', '제 아버지의 사람들 가운데' 또는 '제 아버지의 집들에'라는 번역이 다 가능하다.

그리고 '저는 ~ 있어야 하는 줄'로 번역된 '데이 에이나이 메'(tei einai me; I had to be)에서 '데이'(dei)비인칭 동사로서 '~이 필요하다', '~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의무를 말하기 보다는, 구세주 혹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에게 맡겨진 구원 사업과 관계된 일을 말한 것이다.

루카 복음 2장 49절예수님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시는 장면인데, 소년 예수님은 이렇게 이미 육적인 부모의 관계를 초월하여 감당해야 할,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구원 사업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루카 복음 2장 48절과는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부모를 책망한 듯이 보이며, 마리아가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로 말한 데 대해 예수님 자신은 성부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제 루카 복음 2장 51절에서 예수님께서 있어야 할 곳은 하느님의 집이며, 그가 관계해야 할 진정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지만,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소년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세로 그들과 함께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에 해당하는 '판타 타 레마타'(panta ta remata; all these things)루카 복음 2장 49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탄생을 알린 천사의 말(루카1,27~37)과 천사들의 말을 전한 목자들의 말(루카2,17), 그리고 시메온과 안나의 말(루카2,29~35.38), 소년 예수님 및 아기 예수님과 관련되어 일어난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에 해당하는 '디에테레이~엔 테 카르디아 아우테스'(dieterei~en te kardia autes; kept~in her heart)에서 '간직하였다'로 번역된 '디에테레이'(dieterei)미완료 과거로서 과거 시점에서의 '진행', '끝나지 않음'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마리아의 마음 속에 계속하여 간직하여 지키는 것을 보여 주며, 성령께서 깨우쳐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보여 주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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