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꼭필독]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자료 <다해연중제19주일> 912_faith 히브리 11,1

인쇄

. [121.190.18.*]

2022-08-05 ㅣ No.2610

 

게시자 주 1: (1) 오늘의 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동영상게시자 주 2 다음에 있습니다.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610.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341.htm <----- 필히 시청 요망

 

"KF94 마스크 미착용, 착용 시의 커다란 차이점을 잘 보어주는 실험 동영상들 - 오미크론 출현 이전인 2021년 10월 14일에 확보한 자료들임" 제목의 졸글에 추가된 중요한 방역 수칙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2: [첫 공지 일자: 2022년 7월 17일(다해 연중 제16주일)]

(1) [PC 혹은 노트북의 경우] 바로 아래의 제(2)항에 제시된 이들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본문들을 눈으로 읽으면서 이들을 또한 귀로 듣고자 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바로 아래의 주소를 클릭하면, New American Bible (NAB)에서 발췌된 오늘의 영어 전례성경 본문(즉,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들을, 화답송 등과 함께, 청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어지는 제(2)항 으로 이동하여 안내대로 하십시오.][원 출처: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http://ch.catholic.or.kr/pundang/4/cbs/Cycle_C/Ordinary/c_ot_19_mp3 <----- 여기를 클릭하라

 

[스마트폰의 경우] 바로 아래의 제(2)항에 제시된 이들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본문들을 눈으로 읽으면서 이들을 또한 귀로 듣고자 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i) 위의 주소를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고 가만히 있으면 가지게 되는 작은 메뉴판 한 개에서, 다른 브라우저로 열기를 선택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ii) 사용 중인 스마트폰에 이미 열려있는 본글의 브라우저를 찾아서 거기로 이동한 후에, 바로 아래의 제(2)항에 있는 주소를 누르면, 바로 아래의 제(2)항에 있는 이들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본문들을 눈으로 읽으면서 이들을 또한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2006년 12월 10일(다해 대림 제2주일)부터 지금까지 바로 아래의 제(2)항에 안내된 English Bible Study 까페[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영어 성경공부 자료실]에서 필자가 지속적으로 전달 제공해온 자료이므로, 여기에 진작에 올려드릴 수도 있었으나, 혹시라도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동안 그러지 않았던 것인데,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제(1)항에서 듣게 되는 NAB에서 발췌된 영어 전례성경 본문들 등을 또한 눈으로 직접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lub.catholic.or.kr/community/asp/club/attboard/read.asp?type=attboard&schcode=pundang4biblestudy&seq=8&id=1208 <----- 또한 필독 권고   

 

이것도 또한 여기에 진작에 올려드릴 수도 있었으나, 혹시라도 거부감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동안 그러지 않았던 것인데,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3) 바로 위에 제(1)항제(2)항 제공의 정보들을 반복적으로 꾸준히 함께 활용하면, 영어 듣기 및 읽기 능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2 끝)

 

 

다해 연중 제19주일 온라인 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자료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오늘의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여기를 클릭하여 청취(聽取) 혹은 시청(視聽)하십시오    

가해/나해/다해 주일 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동영상 목록: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13.htm  
묵상 동영상 교재: 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 II, 가톨릭출판사, 2010년.

묵상 동영상 교안(敎案)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610.htm

 

 

시작 기도: 대성호경, 주님의 기도

 

이 십자성가 표적(表迹)으로써, (이마 위에 +)

우리의 주님이신 천주께서는 (입 위에 +)

우리의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가슴 위에 +)

성부와 (이마 위에 손끝을 찍음) 

성자와 (배 위에 손끝을 찍음) 

성령의 이름으로. (왼쪽 어깨 위에 손끝을 찍은 후에 그리고 곧바로 직선으로 이동하여 오른쪽 어깨 위에 손끝을 찍음)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들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게시자 주: (i) 성경공부에 필수적인 복습용 묵상 자료들은 아래의 <<부록>>에 있습니다.

 

(ii) 다해 삼위일체 대축일부터 다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의 묵상 동영상 교재"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 II"가톨릭출판사[전화: 02-6365-1888]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현재 45부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다해연중제19주일> 다해 연중 제19주일


히브리 11,1-2.8-19; 지혜서 18,6-9; 루카 복음서 12,32-48

 

오늘의 제2독서 중에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본체/실체(substantia)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밖으로의 표시(argumentum, 증거)입니다.(*1) (히브리 11,1) 

 

-----

(*1) 번역자 주: 아래에 있는 제E항을 필독하라.

-----

 

오늘의 제1독서 중에서:

 

그 밤이 저희 조상들에게는 벌써 예고되었으니 그들이 어떠한 맹세들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용기를 가질 수도 있게(that ... might)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 (지혜 18,6)

 

-----

(*2) 번역자 주: 본글의 <<부록>>에 있는 복습 17을 필독하라.

-----

 

오늘의 복음 말씀 중에서: 

 

"이는 너희의 보물이 있는 바로 거기에 너희의 심장(heart)도 장차 있게 될(will) 것이기 때문이다."(*3) (루카 12,34)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8월 10일]

(*3)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영어본 성경들의 루카 복음서 12,34는 모두 조동사 "will"을 사용하여, 인과 관계를 밝히는, 미래 시제로 번역이 되었음을 따른 것이다:

https://biblehub.com/luke/12-34.htm 

[이상, 2022년 8월 10일자 내용 추가 끝]

 

 

오늘의 전례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학습하기 위하여, 술이부작(述而不作)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합시다.  

 

오늘의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에서 교재 본문 중의 특정 주제(topic)들에 대한 추가 설명들이 주어지고 있는 부분들:

 

* 오늘의 독서들의 주제: 02:11-03:19

* 히브리서 11,1의 심각한 번역 오류에 대하여: 03:28-08:49; 16:16-22:06; 36:32-41:01; 57:29-59:07 

* 개입된 당사자들의 자유 의지들에 의햐여 야기되는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어법인  '[so] that ... may/might ...'은 지역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 훼손되어서는 아니된다[주: 복습 17 필독 권고]: 08:49-10:08; 50:06-50:34

* 성경 용어 'Cor'/'heart'는 '마음'아니라 '심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주: 복습 9 필독 권고]: 10:08-10:40

* 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시리즈를 활용한 '히브리서'의 학습 방법 안내: 10:57-11:35

* 신학적 믿음(theological faith)은 향주삼덕들 중의 한 개인 초자연적(supernatural) 믿음(faith, 신덕, 信德)을 말한다: 11:35-15:09

*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4항): 15:09-16:16; 41:01-42:47 

* '우리의 본향이 하늘 나라'??? - '주석 성경'의 주석 오류: 22:06-22:24; 44:22-45:22

* 무라토리 단편 안내: 22:24-22:45; 46:21-47:27

* 사해 문서들 중에서 지혜서의 일부 조각들의 발견에 대하여: 22:45-26:41; 47:21-48:12

* 미드라쉬 안내: 26:41-26:58; 49:07-49:46

* 영어로 'glorious'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를 '영광스럽다'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번역 오류이다: 26:58-27:44; 50:55-51:14

* 이벽 성조의 '성교요지' 에 등장하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마태오 복음서 6,19-21; 루카 복음서 12,33-34): 27:44-28:35; 55:19-56:23

*  마태오 복음서 6,19-21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 안내: 28:35-29:06

* '하늘 나라'(천국)과 '천당'은 예수 재림의 날까지 동일시하면 아니 된다: 29:06-29:24; 52:58-54:26; 56:43-57:12

* 히브리서 11,1-2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 안내: 29:24-29:49 

* 오늘의 제2독서 입문: 29:55-36:32

* 오늘의 제1독서 입문: 46:21-50:06

* 지혜서 11,9에서 '조상들의 찬미가'는 '조상들에 대한 찬미가'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번역 오류): 51:40-52:01

* 오늘의 복음 말씀 입문: 52:06-52:58

*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제6장에서 말씀하신 세 가지 의로운 일들 중의 하나 - 자선 제공: 54:25-55:19

* 루카 복음서 12,37 등에서 '행복하여라'로 번역된 것은 번역 오류이다[주: 복습 25 필독 권고]: 57:29-59:07

* 오늘의 3분 복음/교리 묵상: 01:05:20-01:06:58

 

게시자 주: 바로 위의 특정 주제 목록에서, 초록색으로 굵게 표시된 특정 주제(topics)들 각각 및 입문들 등 나머지 사항들도, 바로 아래에 안내된 바처럼, 묵상 동영상 중의 특정 주제 시작 시간을 선택함으로써, 손쉽게 찾아 청취하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시리즈를 활용한 '히브리서'의 학습 방법 안내: 10:57-11:35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히브리서_학습방법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0:57-11:35  [즉, 10분57초-11분:35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히브리서_학습방법_2610"]  

A.

본 해설서 시리즈를 활용한 ‘히브리서’의 학습은 다음과 같이 진행하도록 하라:

 

(i)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주일 및 중요 대축일에 독서로 발췌되고 있는 모든 성경 본문들에 대한 색인을 제공하고 있는, 본 해설서인 다해-II 해설서의 색인(index)에서 ‘히브리서’ 항목을 찾아 해당 독서들의 입문 및 장(chapters)들과 절(verses)들을 순서대로 학습하도록 하라.

 

(ii) 그리고 본 해설서 시리즈의 인터넷 각주로 제공되고 있는 홀수 해 연중 제1-4주 주간 제1독서들에 대한 다음의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들을 학습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baptlord.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ot_2.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ot_3.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ot_4.htm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신학적 믿음/하느님 쪽으로 향하게 하는 믿음(theological faith)은 향주삼덕들 중의 한 개인 초자연적(supernatural) 믿음(faith, 신덕, 信德)을 말한다: 11:35-15:09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theological_faith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1:35-15:09  [즉, 11분35초-15분09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theological_faith_2610"]   

B.
(i)
‘theological faith’이라는 표현은, 예를 들면, 2000년 교황청 신앙 교리성 문헌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 제7항에서 사용이 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성화은총’에 의하여, 예를 들어, 세례를 받는 자에게 주입되는, 그러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덕들인, ‘믿음, 희망, 사랑’으로 구성된 향주 삼덕(theological virtues, 대신덕, 對神德)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 쪽으로 향하게 하는 믿음(faith, 신덕, 信德)’을 말한다.

 

다음의 자료를 클릭하면, 향주 삼덕을 언급하면서 ‘theological faith’, ‘theological hope’, 그리고 ‘theological charity’라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성화은총(sanctifying grace)에 대한 영어 가톨릭 대사전의 설명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e_sanctifying_grace.htm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따라, 향주 삼덕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다음의 책을 또한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fiatlux2000/Romanus_Cessario_The_Virtues.htm

 

(ii) 다음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제공의 우리말 ‘주님이신 예수님’ 전문 및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영어 ‘Dominus Iesus’ 전문이며, 우리말 번역에서 단 두 번 제7항에서 사용되고 있는 ‘theological faith’라는 용어를 애매모호하게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번역한 것은, 동일한 본문 중에 여러 번 사용되고 있는 ‘christian faith’라는 표현을 ‘그리스도 신앙’ 혹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또한 번역을 하고 있기에, 전후 문맥상 번역 과정에서 원문에서 구분하고 있는 이들 두 용어들 사이의 개념적 차이 혹은 변별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므로, 번역 오류라는 생각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ck/2000Dominus_Iesus_kr.htm (우리말)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rc_con_cfaith_doc_20000806_di_en.htm (영어)

 

(iii) 계시 진리에 근거한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은 특히,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이 유일한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 쪽으로 향하게 하는 믿음/신학적 믿음(faith, 신앙)’을, 자아를 인식하는 인격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그러나 개인별로 다를 수 있는 ‘(자기 중심의) 믿음(belief, 신념)’과 분명하게 잘 구분하여야 한다고 ‘주님이신 예수님’ 제7항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iv) ‘성화은총’에 대한 위의 제(i)항의 가톨릭 대사전 설명에서 ‘theological belief'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theological faith'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일반적으로,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의 정의 방식’ 그 자체로부터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음의 Merriam Webster's On Line Dictionary의 설명에 의하면, faith 단어를 설명할 때에 belief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faith는, belief와는 달리, 믿는 대상이 참(true)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belief이므로, faith는 ‘belief의 특별한 경우’, 즉 ‘belief의 개념에 추가로 요청되는 제한 조건을 만족하여야 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특히 belief 단어 설명 다음에 주어져 있는 동의어들에 대한 설명들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mw/belief.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mw/faith.htm

(v) 믿음(faith, 신앙)믿음(belief, 신념)의 차이에 대한 다음의 엮은이의 졸글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12.htm  <----- 필독 권고

 

C. 향주 삼덕들 중의 하나인 ‘믿음(faith)’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CCCC)의 가르침은 본 해설서 시리즈의 가해-II 연중 제10주일 3분 복음/교리 묵상에 있으니 참고하라.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4항): 15:09-16:16; 41:01-42:47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obedience_of_faith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5:09-16:16; 41:01-42:47 [즉, 15분09초-16분16초; 41분01초-42분47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obedience_of_faith_2610"]    

D.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obedience of faith)’과 관련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본 해설서 시리즈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 3분 복음/교리 묵상 그리고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44항에 있으니 꼭 학습하도록 하라.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144.htm <----- 필독 권고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히브리서 11,1의 심각한 번역 오류에 대하여: 03:28-08:49; 16:16-22:06; 36:32-41:01; 57:29-59:07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definition_of_faith_in_Hebrews11_1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03:28-08:49; 16:16-22:06; 36:32-41:01; 57:29-59:07 [즉, 03분28초-08분49초; 16분16초-22분06초; 36분32초-41분01초; 57분29초-59분07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definition_of_faith_in_Hebrews11_1_2610"]  

E.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4월 19일]

게시자 주: 바로 아래에서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바 그 자체는 는 다음과 같다: 즉, 히브리서 11,1에서 '믿음'faith)이라고 불리는 한 개의 형이상학적 개념(a metaphysical concept)이,

 

(i) [그리스도교 세례에 의하여] 하느님에 의하여 인간들에게 주어지는/제공되는, 따라서 초자연적인 그 무엇인 바 [게시자 주: 이것은 사도들의 시대부터, 그리스도교 보편교회 교도권이 지속적으로 수용해온,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통적 이해임], 아니면

 

(ii) 하느님에 의하여 인간들에게 주어지는/제공되는 바 그 자체와 전혀 무관하게, 각 인간 개개인의 어떤 느낌(a feeling)의 결과 가지게 되는 한 개의 신념(a belief) [게시자 주: 이것은, 특히, 16세기 중반 경부터 마르틴 루터 등 개신교회 측 일부가, 성경 본문 어디에도 없는, 자신들의 세 개의 주장들 중의 한 개인, "믿음만으로"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동안 그리스도교 보편교회 교도권에서 기 수용된 바로 위의 제(i)항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대신에, 아전인수 격으로 히브리서 11,1의에서 말해지고 있는 '믿음'(faith)이라는 단어의 그리스어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를, 지역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의적으로/임의적으로/작위적으로, 변경하고자 시도하는 주장하는 바임],

 

이들 둘 사이의 어느 것이 신약 성경 전체에서 말해지고 있는 '믿음'(faith)를 올바르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상, 게시자 주 끝)

[이상, 2023년 4월 19일자 내용 추가 끝]


(i)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46항히브리서 11,1믿음(faith)의 정의(definition)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4월 20일]

그러나,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6항에서 말하는 히브리서 11,1에 있는 믿음(faith)의 정의(definition)에서 사용된 믿음(faitn)이라는 표현은, 가올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에서부터의 문맥 안에서 정밀하게 고찰할 때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에 정의된(defined) '믿음'(faith)이라는 성경 및 교리 용어의 자구적 어의(literal sense)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고, 바로 이 자구적 어의에 근거하는, 세 개의 영성적 어의(spiritual sense)들 중의 한 개인, 윤리적 어의(moral sense)를 나타내는 용어임에 대하여서,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literal_sense_of_faith_vs_moral_sense_of_faith_1555.htm <----- 꼭 필독 권고  

[이상, 2023년 4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ii) “새 번역 성경”, 히브리서 11,1에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라고 번역된 표현 중의 "보증"RSV (Revised Standard Version)에서의 해당 표현 중의 "assurance"과 동일하나, 그러나 NAB (New American Bible)에서는 ‘Faith is the realization of what is hoped for and evidence of things not seen (믿음은 희망하는 바의 본체/실체(realization)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밖으로의 표시(증거, evidence)입니다.’로 번역되었다.

 

(iii)

(iii)-1. 이 문제점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다음의 주소에 있는 히브리서 11,1에 대한 NAB 주석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b/hebrews11.htm
해당 주석의 졸번역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6.htm <----- 전문 꼭 필독 권고/요망/요구

(졸번역 발췌)
[1] Faith is the realization . . . evidence: 인간 저자는 정확한 정의(definition)를 시도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각각 본체/실체(realization)와 밖으로의 표시(evidence,증거)로 번역이 된 그리스어 단어들 hypostasiselenchos의 의미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hypostasis"본체/실체(substance)," (히브리 1,3에서 번역되었듯이) "있음(being, 유)", 혹은 (히브리 3,14에서 번역되었듯이) "실재(reality)"를 통상적으로 의미하나, 그러나 여기서는 더 주관적인(subjective) 어떤 것을 암시하기에, 그리하여 그 결과 오히려 "보증(assurance)"(RSV)보다는 본체/실체(realization)가 선택되었다. 통상적으로 "증거(proof)"를 의미하는, Elenchos는 객관적인(objective) 의미로 여기서 사용되고 있기에 그리하여 그 결과 오히려 "(내적) 확신[(inner) conviction]"이라는 전이된 의미(transferred sense)보다는 밖으로의 표시(evidence, 증거)로 번역되었다.
(이상, 졸번역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4월 21일]

(iii)-2. 그 다음으로, 다음은 2001년에 초판 발행된 "200주년 신양성서 주해", 히브리서 11,1 본문 및 이 절에 대한 주석 전문이다:

 

(발췌 시작)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사물의 근거입니다.

 

주석: 1절에서는 믿음에 대한 본격적 강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 정의부터 내린다. 저자는 바울로와 같은 방법으로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들어 믿음의 본질을 설명한다(로마 8,24-25; 1코린 13,12; 2코린 4,18 참조). 믿음에 대한 이 정의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단어는 "실상""근거"다. "실상"(휘포스타시스)은 본질, 실체, 보증, 확증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확증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문장 내용으로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사물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실상이다. "근거"(엘렝코스)는 논증, 증거, 근거, 아는 방법, 신념 등의 의미가 있다. 이 단어 역시 앞의 실상과 관련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하는 근거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iii)-2: (1) "200주년 신양성서 주해", 히브리서 본문에 대한 주석은, 로마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전공하신 것으로 알려진 이홍기 신부님(부산교구)께서 마련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바로 위에 발췌된 주석을 읽으셨을 것으로 생각되는, 역시 로마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전공하신 것으로 알려진 임승필 신부님(제주교구)에 의하여 우리말로 번역이 된 "새 번역 성경", 히브리서 11,1의 우리말 번역문은, 바로 위에 발췌된 200주년 신양성서 주해", 히브리서 11,1의 우리말 번역문과 결코 대옹소이하지도 않고 또한 결코 논리적으로 등가가 아님에 반드시 주목하라.

 

(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997년에 라틴어 정본이 출판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에 제시된 "믿음"(faith)이라는 용어의 자구적 어의(literal sense)/정의(definition),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항들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매우 정밀하게 들여다본 바과 그 결론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게시자 주 3-3-2를 반드시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literal_sense_of_faith_vs_moral_sense_of_faith_1555.htm <----- 꼭 필독 권고  

(이상, 게시자 주 (iii)-2 끝)

[이상, 2023년 4월 21일자 내용 추가 끝]

 

(iv)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ypostasis‘라는 그리스어 성경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hypostasis_vs_person.htm <----- 꼭 필독 권고

(v)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유관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faith_BD4NAB_912.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6.htm [주: 필독 권고] <----- 꼭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faith.htm [주: 제912번 글부터 학습하라]. 

 

(vi) 그런데, 그리스어 단어들 hypostasiselenchos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에 대하여 논란이 있게 된 주된 이유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독일의 실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에 의하여 개신교회 측의 신학으로서 도입된, 그리스도교 전통적 신학을 전적으로 부정하는/거부하는, ‘느낌으로서 경신’(religion as feeling)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religion_as_feeling_2018.htm <----- 꼭 필독 권고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아무리 늦더라도 1941년에 이르면, 독일의 실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에 의하여 개신교회 측의 신학으로서 도입된, 그리스도교 전통적 신학을 전적으로 부정하는/거부하는, ‘느낌으로서 경신’(religion as feeling)의 영향이 개신교회 측 성서 주석학 분야에 이미 나타났음을 예증(demonstrate)하는 가톨릭 Confraternity Bible 1941-1942히브리서 11,1에 대한 주석을 읽을 수 있다:

 

출처: https://johnblood.gitlab.io/haydock/confraternity/id241.html 

(발췌 시작)

11, 1-40:  Third Motive:  Old Testament Examples.    1.  Faith is here described in some of its effects, and not really defined regarding its own nature.  In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faith was spoken of as essential to salvation; here it is stated that faith is the very foundation (substance) of salvation (things to be hoped for).  Faith also furnishes clear proof (evidence) that what God has testified to exists even though not seen (things that are not seen).  Although the Greek word for "substance" has also the subjective meaning of "assurance," the word for "evidence" never has the subjective meaning of "conviction," which would be necessary for the translation adopted by some that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to be hoped for, a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  2.  Had testimony borne to them: Scripture testifies to their faith.    3.  That the visible world came through creation is known by faith.

 

-----
(*) 게시자 주: (1) 바로 이 영어 번역문이, 위의 제(ii)항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1950년대에 개정된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히브리서 11,1에 그대로 등장하였고, 그리고 이 영어 번역문의 전반부가 "공동번역성서"(1970년대 초) 및 "새 번역 성경"(2005년)히브리서 11,1의 전반부와 또한 정확하게 동일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2) 그리고 위의 제(iii)항에 발췌된 NAB 주석은 바로 이 주석의 연장선상에 있음에 또한 주목하라.

-----

(이상, 발췌 끝)

 

(vii)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14년과 그 이후 1950년까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개신교회 측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된 중국어본 신약 성경, 히브리서 11,1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와 처음 개정된 RSV (Revised Standard Version)의 히브리서 11,1과 논리적으로 등가인 번역문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13년이후_한문본_개신교회용_성경들/히브리11_1.htm  <-----  필히 확인 권고

 

(viii) 더 나아가, 히브리서 11,1RSV(Revised Standard Version), "공동번역성서", "새 번역 성경"의 번역문이 말하는 바로서 이해할 경우에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히브리서 11,1을 본문 중에서 발췌 인용하고 있는, 교회의 천사적 박사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 대전"뿐만이 아니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금구) 등의 교부(들)의 문헌(들)의 유관 내용(들)을 도무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함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fathers/St_Chrysostom_homily21_on_Hebrews11_1-2.htm <-----  필히 확인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earch/google_Hebrews11_1_at_newadvent_org.htm <-----  필히 확인 권고

 

(ix)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히브리서 11,1의 지역 언어로 번역 과정에 발생한 바로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2001년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지침서, "Liturgiam authenticam"의 가르침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지역_언어로의_번역에_관한_2001년_경신성사성_지침서_1290.htm <----- 필독 권고

 

(x)

(x-1) 다음은, 2010년에 초간된 "주성 성경"의 주석들의 번역 대본인, 1975년에 그 초판이 발행된 프랑스어 공동번역성서(TOB), 히브리서 11,1에 대한 주석 전문이다:

 

(발췌 시작)

히브리11_1_주석_in_1975년초판_&_2010년판_TOB_제2632쪽.jpg

(이상, 발췌 끝)

 

(x-2)그리고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마련된, 위에 발췌된 바의 영어 번역문이다:

 

(영어 번역문 시작)

1) 11,1 The emphasis on faith and recognition in vv. 1 to 3 provides the principle of interpretation that will be applied to all the evidences that will be mentioned thereafter. Just like the apostle Paul, in Romans 8:24-25; 1 Corinthians 13:12 and 2 Corinthians 4:18, the author contrasts what is actual, real, with what is not yet real. Noah in 11:7 becomes the first example of the one who acts with that faith that knows what is not seen.

 

1) 11,1. 제1-3절에서 믿음(faith, 신덕)에 대한 강조 및 인식(recognition)은 이어서 장차 언급될 모든 증거(evidence)들 쪽으로 장차 적용될 해석의 원리를 제공한다. 로마서 8,24-25; 1코린토 13,12 그리고 2코린토 4,18에서 사도 바오로와 꼭 마찬가지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현실태적이고(actual), 실제인(real) 바와 아직은 실제가 아닌 바를 대조한다. 11,7에 있는 노아는 보이지 않는 바를 알게 하는(know) 바로 그 믿음(신덕)으로써 행동하는 자의 첫 예제(example)이다.

 

3) Defined in an impersonal way, faith is here related to hope; it tends towards the future and towards the invisible. Elsewhere in the New Testament one finds different points of view that complement this one. Paul especially represents faith as a personal relationship between believers and their Lord. James affirms the insufficiency of a purely conceptual faith in the existence of the one God and insists on the necessary connection of faith with works (Jas 2:14,26).

 

3) 비인격적 방식으로 정의된, 믿음(faith, 신덕)은 희망(hope, 망덕) 쪽으로 여기서 관련지어지며, 그리하여 그것은 미래 쪽으로 향하는 그리하여 비가시적인 것 쪽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로 이 관점을 보상하는 관점에 있어서의 다른 점들을 우리는 발견한다. 바오로는 믿음(신덕)을 믿는 자들과 그들의 주님 사이의 한 개의 인격적 관계의 상태로서 특별히 제시한다. 야고보는 한분이신 하느님의 존재 쪽으로 어떤 순수하게 개념적인 믿음의 불충분성을 확언하면서 믿음(신덕)과 일(works)들의 필연적인 연결에 대하여 주장한다 (야고보 2,14.26).

 

The terms used by the author are open to several interpretations. Hypostasis can mean substance (Chrysostom, Augustine, Thomas Aquinas: faith gives existence in us to spiritual goods we hope for), or guarantee, title of possession (Gregory of Nyssa, Calvin, the orthodox tradition and some moderns). Widely attested in the papyri, this second meaning seems more probable here. Many, however, prefer the subjective meaning of firm confidence (Erasmus, Luther, Zwingli, many moderns). For the second term, a subjective meaning is also proposed: argument, proof, means of knowing. The Greek fathers insist on the evidence given by faith, a vision of the invisible (see 11,27).

 

[히브리서의] 저자에 의하여 사용된 용어들은 여러 해석들 쪽으로 열려 있다. [그리스 단어] hypostasis(i) 본체/실체(substance)(크리소스토모, 아우구스티노, 토마스 아퀴나스: 믿음/신덕이 우리들 안에서 우리가 희망하는 영적 선(spiritual goods)들 쪽으로 존재(existence)를 제공한다)를, 혹은 (ii) 보증(guarantee), 소유 증서(니사의 그레고리오, 캘빈, 정교회 전통 및 일부 현대인들)를, 의미할 수 있다. 파피루스들에서 널리 임증되듯이, 바로 이 두 번째 의미가 여기에서 더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다수는 확고한 확신(firm confidence)이라는 주관적 의미를 선호한다(에라스무스, 루터, 츠빙글리, 다수의 현대인들). 두 번째 용어의 경우에, 다음과 같은 한 개의 주관적 의미가 또한 제안된다: 논거(argument), 증명/증거(proof), 앎의 의미. 그리스 교부들은, 비가시적인 것(the invisible)에 대한 한 개의 환시(a vision)인, 믿음(신덕)에 의하여 제공되는 증거(evidence)를 주장한다 (11,27을 보라).

 

바로 아래의 (x-3) 에 없음) The author brings out the paradoxical nature of faith, which possesses without holding, which knows without seeing. The examples that follow will show all the power of life that faith conceals.

 

바로 아래의 (x-3) 에 없음) [히브리서의] 저자는, 붙잡음 없이 소유하는, 봄 없이 알게 되는, 믿음/신덕의 역설적 본성을 분명히 한다(brings out). 바로 뒤따르는 예제들은 믿음(신덕)이 감추고 있는 삶의 힘 모두를 장차 보여줄 것이다. 

(이상, 영어 번역 및 우리말 번역 끝)

 

(x-3) 그리고 다음은, 2010년에 초간된 "주석 성경", 히브리서 11,1 본문 및 우리말 주석 전문이다:

 

출처: https://bible.cbck.or.kr/Knbnotes/Bible/Heb/11
(발췌 시작)
11) 믿음은 우리가2)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3)

 

1) 믿음과 그에 따른 인정(認定)을 강조하는 1-3절은 이어서 다루는 구약 성경의 모든 이야기에 적용되는 원칙을 제시한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 8,24-25; 1코린 13,12; 2코린 4,18에서 하듯이, 히브리서 필자도 여기에서 현실 곧 실현된 것(번역 오류)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대립시킨다. 7절에 나오는 노아는 보지 않고도 아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첫 번째 본보기가 된다.


2) “우리가”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3) 필자는 먼저 믿음을 희망과 관련지어 정의한다. 믿음은 미래를, 보이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와 다른 관점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이 히브리서의 관점을 보완해 준다. 바오로는 믿음을 무엇보다도 먼저 신자들과 주님의 인격적 관계로 설명한다. 야고보서는 유일하신 하느님의 존재를 순전히 관념적으로만 믿는 것으로는 모자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신앙과 행동이 필연적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야고 2,14.26).

 

히브리서 필자가 믿음을 정의하면서 사용하는 용어들의 뜻이 분명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보증”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본글의 게시자 주: 본문 중의 hypostasis 를, 바로 이 주석을 읽는 국내의 성서 연구자들 조차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도록 단순히, '그리스 말'로 대체한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번역 오류임]은 ‘본질’[본글의 게시자 주: 'hypostasis'가, '본체'/'실체' 대신에, 통상적으로 'essence'에 대응하는 번역 용어인, '본질'로 번역된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음. 이 문제는, 특히, 아마도, 개정판 "가톨릭대사전"'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보니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음.]을 뜻할 수도 있고(크리소스토모, 아우구스티노, 토마스 아퀴나스: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영적인 것들이 우리 안에 존재하게 해 준다.), ‘보증, 권리 증서’를 뜻할 수도 있다(니사의 그레고리오, 칼뱅, 일부 현대 학자들). 여기에서는 고대의 파피루스 수사본들에서도 널리 쓰이는 둘째 뜻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확신’을 뜻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에라스무스, 루터, 츠빙글리, 여러 현대 학자), 이 낱말에는 이러한 주관적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반론이 강력히 제기된다[본글의 게시자 주: 국내의 주석자에 의하여 추가됨, 아래의 제(xi)항 필히 참조]. 두 번째 용어 곧 “확증”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에 대해서도 ‘내적 신념’ 같은 주관적 의미가 제시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확증[본글의 게시자 주: 번역 오류], 논증, 증거, 인식 방법’ 등의 뜻으로 쓰인다. 동방 교부들은 이와 관련하여 믿음이 가져다주는 확실성[본글의 게시자 주: 번역 오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을 강조한다(27절 참조).
(이상, 발췌 끝)

 

(xi) 다음은, 2007년에 반포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회칙 [주: 두 번째 회칙] "SPE SALVI(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제7항 전문인데, 특히, 위의 제(x)항에 발췌된, 1975년에 그 초판이 발행된 프랑스어 공동번역성서(TOB), 히브리서 11,1에 대한 주석의 문제점을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ben-xvi_enc_20071130_ss_en.htm 

(발췌 및 우리말 졸번역 시작)

7. We must return once more to the New Testament. In the eleventh chapter of the Letter to the Hebrews (v. 1) we find a kind of definition of faith which closely links this virtue with hope. Ever since the Reformation there has been a dispute among exegetes over the central word of this phrase, but today a way towards a common interpretation seems to be opening up once more.

 

7. 우리는 한 번 더 신약 성경 쪽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간의 제11번째 장 (제1절)에서 우리는 믿음/신덕(faith, 信德)의 정의(definition)의 한 종류를 발견하는데 이 정의는 바로 이 덕(virtue)을 희망/망덕(hope)과 매우 가깝게 연결합니다. [16세기 중반의] 그 개혁(the Reformation) 이후부터 지금까지 바로 이 단락의 중심 단어에 대하여 주석자(exegetes)들 사이에 한 개의 논쟁(a dispute)이 있어 왔으나, 그러나 오늘날 한 개의 공통의 해석 쪽으로 향하는 한 개의 길이 다시 한 번 더 활짝 열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For the time being I shall leave this central word untranslated. The sentence therefore reads as follows: “Faith is the hypostasis of things hoped for; the proof of things not seen”. For the Fathers and for the theologians of the Middle Ages, it was clear that the Greek word hypostasis was to be rendered in Latin with the term substantia. The Latin translation of the text produced at the time of the early Church therefore reads: Est autem fides sperandarum substantia rerum, argumentum non apparentium—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proof of things not seen.

 

당분간 저는 바로 이 중심 단어를 번역하지 않은 채 남겨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읽힙니다: "믿음은 희망하게 되는 사물들의 hypostasis이며,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밖으로의 표시/증거/증명(proof)입니다". 교부들의 경우에 그리고 중세의 신학자들의 경우에, 그리스 단어 hypostasis는 라틴어로 substantia라는 용어로 번역되어져야 함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의 시기에 산출된 이 본문의 라틴어 번역문은 다음과 같이 읽힙니다: Est autem fides sperandarum substantia rerum, argumentum non apparentium — 믿음은 희망하게 되는 사물들의 "본체"/"실체"(substance)이며,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밖으로의 표시/증거/증명(proof)입니다.

 

Saint Thomas Aquinas[4], using the terminology of the philosophical tradition to which he belonged, explains it as follows: faith is a habitus, that is, a stable disposition of the spirit, through which eternal life takes root in us and reason is led to consent to what it does not see. The concept of “substance” is therefore modified in the sense that through faith, in a tentative way, or as we might say “in embryo” — and thus according to the “substance” — there are already present in us the things that are hoped for: the whole, true life. And precisely because the thing itself is already present, this presence of what is to come also creates certainty: this “thing” which must come is not yet visible in the external world (it does not “appear”), but because of the fact that, as an initial and dynamic reality, we carry it within us, a certain perception of it has even now come into existence.

 

성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4]는, 그쪽으로 자신이 속하였던 철학 전통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믿음은 한 개의 습관(habitus), 즉, 영(the spirit)의 한 개의 안정적인 성향(a stable disposition)인데, 바로 이 습관/성향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 우리들 안에 뿌리를 박으며 그리하여 이성(reason)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바 쪽으로 동의하도록 인도됩니다. 그러므로 "본체"/"실체"(substance)라는 개념은 믿음/신덕(信德)을 통하여(through faith), 어떤 잠정적인 방식으로(in a tentative way), 혹은 "미발달의 상태에 있는"(in embryo)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도 있듯이 — 그리하여 그 결과(and thus) "본체"/"실체"(substance)에 따라 — 희망하게 되는 사물(things)들이 우리들 안에 이미 현존하게(present)[즉, 실재(實在)하게] 됨이라는 의미로 한정(限定)수정(修正) 됩니다(is modified). 그리하여 정확하게 왜냐하면 해당 사물(the thing) 그 자체가 이미 현존하기 때문에, 장차 도래할 바의 바로 이 현존(presence)은 확실성(certantity)을 또한 만들어내며(create), 그리하여 도래하여야 하는 바로 이 "사물"(thing)은 이 외부의 세계 안에서 아직 가시적이지(visible) 않으나 (그것이 "나타나지"(appear) 않으나), 그러나 왜냐하면 한 개의 초기의 및 역동적인 실재(reality)로서, 우리가 그것을 우리들 안쪽에 지니고 다닌다(carry)는 사실(fact) 때문에, 그것에 대한 한 개의 확실한 인식(perception)이 존재(existence) 안쪽으로 심지어 지금 이미 도래하게 됩니다.

 

To Luther [주: 마르틴 루터], who was not particularly fond of the Letter to the Hebrews, the concept of “substance”, in the context of his view of faith, meant nothing. For this reason he understood the term hypostasis/substance not in the objective sense (of a reality present within us), but in the subjective sense, as an expression of an interior attitude, and so, naturally, he also had to understand the term argumentum as a disposition of the subject.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특히 좋아하지 않았던 자인, 루터(Luther)[주: 마르틴 루터]에게, 믿음(faith)에 대한 자신의 관점[주: 즉, 믿음만으로, sola fide]이라는 문맥 안에서, "본체"/"실체"(substance)라는 개념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meant nothing).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는 hypostasis/substance 라는 용어를 (우리들 안쪽에 현존하는 한 개의 실재(實在)(a reality)이라는) 유일한 객관적인 의미로(in the objective sense)아니라, 다만 어떤 내면의 태도의 한 표현으로서, 유일한 주관적인 의미로(in the subjective sense), 이해하였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자연적으로, 그는 argumentum 을 해당 주체의 어떤 성향으로서 또한 이해하여야 하였던 것입니다.


In the twentieth century [주: 위의 제(vi)항 필히 참조] this interpretation became prevalent — at least in Germany — in Catholic exegesis too, so that the ecumenical translation into German of the New Testament, approved by the Bishops, reads as follows: Glaube aber ist: Feststehen in dem, was man erhofft, Überzeugtsein von dem, was man nicht sieht (faith is: standing firm in what one hopes, being convinced of what one does not see).

 

20세기에 있어 [주: 위의 제(vi)항 필히 참조] 바로 이 해석은 — 적어도 독일(Germany에서 — 가톨릭 주석에서 또한, 우세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주교들에 의하여 승인된, 신약 성경의 독일어(German) 안쪽으로 교회 일치 번역본(the ecumenical translation, 공동 번역 성서)은 다음과 같이 읽힙니다: Glaube aber ist: Feststehen in dem, was man erhofft, Überzeugtsein von dem, was man nicht sieht (믿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사자가 희망하는 바 쪽으로 확고하게 서 있으면서, 당사자가 보지 못하는 바에 대하여 확신하게 됨).

 

This in itself is not incorrect, but it is not the meaning of the text, because the Greek term used (elenchos) does not have the subjective sense of “conviction”[주: RSV 히브리서 11,1을 꼭 참조하라] but the objective sense of “proof”. Rightly, therefore, recent Protestant exegesis has arrived at a different interpretation: “Yet there can be no question but that this classical Protestant understanding is untenable”[5].

 

바로 이 번역문 그 자체는 틀린 것(incorrect)이 아니나, 그러나 이 본문의 의미는 아닌데, 왜냐하면 사용된 해당 그리스어 용어(elenchos)은 "확신"(conviction)[주: RSV 히브리서 11,1을 꼭 참조하라]이라는 주관적 의미(subjective sense)를 가지고 있지 않고 , 다만 "밖으로의 표시"/"증거"/"증명"(proof)이라는 객관적인 의미(objective sense)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그러므로, 최근의 프로테스탄트/개신교회 측 주석(exegesis)은 다음과 같은 한 개의 다른 해석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yet) 바로 이 고전적 프로테스탄트/개신교회 측의 이해 행위(understanding)는 틀림없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untenable)"[5]. 

 

Faith is not merely a personal reaching out towards things to come that are still totally absent: it gives us something. It gives us even now something of the reality we are waiting for, and this present reality constitutes for us a “proof” of the things that are still unseen. Faith draws the future into the present, so that it is no longer simply a “not yet”. The fact that this future exists changes the present; the present is touched by the future reality, and thus the things of the future spill over into those of the present and those of the present into those of the future.

 

믿음(faith, 신덕, 信德)은, 다음과 같이, 단지, 여전히 전적으로 부재인(absent) 도래할 사물들 쪽으로 향하여, 어떤, 개인적인, 손을 뻗치는 행위(a personal reaching out)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무엇(somehing)을 제공합니다. 믿음(faith, 신덕, 信德)은 우리들에게 심지어 우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실재(the reality)에 대한 새로운 그 무엇(new something)을 [반드시 수용되어야 하는 한 개의 참진리로서] 제공하며, 그리하여 바로 이 현존하는 실재(this present reality, 즉, substantia)는 우리들을 위하여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한 개의 "밖으로의 표시"/"증거"/"증명"(a "proof")을 구성합니다. 믿음(faith, 신덕, 信德)은 이 미래를 이 현재 안쪽으로 끌어당기어, 그리하여 그 결과 이 미래는 더 이상 단순히 한 개의 "아직 아닌 것"(a "not yet")이 아닙니다. 바로 이 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현재를 다음과 같이 변경합니다: 이 현재가 이 미래의 실재(the future reality)에 의하여 접촉을 하게 되어(is touched by), 그리하여 그 결과 이 미래의 사물들이 이 현재의 바로 그것들 안쪽으로 넘치게 되고(spill over) 그리고 이 현재의 바로 그것들이 미래의 바로 그것들 안쪽으로 넘치게 됩니다.


-----

[4] Summa Theologiae, II-IIae, q.4, a.1.

 

[5] H. Köster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III (1972), p.586.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졸번역 끝)

 

(xii)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우리나라 개신교회 측 대표적 신약 성경들인 "개역한글", "개역개정", "표준새번역" 등의 히브리서 11,1의 우리말 번역문들은, 위의 제(vii)항에서 이미 말씀드린, 중국어본 성경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 본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심각한 번역 오류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Readpage.php?version=HAN&book=heb&chap=11&sec=1&cVersion=GAE^SAE^&fontSize=15px&fontWeight=normal 

 

그러나 이와는 달리, 1970년대 초에 개신교회 측과 함께 우리말로 번역이 된 "공동번역성서"(the ecumenical translation)히브리서 11,1의 우리말 번역문 중의 "보증"은, 1950년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영어본 "공동번역성서"인 RSV (Revised Standard Vertion), 히브리서 11,1과 중의 "assurance"와 동일하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그리고 2005년에 출판된 "새 번역 성경"의 히브리서 11,1의 우리말 번역문은, 매우 실망스럽게도심각한 번역 오류인 바로 이 우리말본 "공동번역성서", 히브리서 11,1을 그대로 베꼈음이 대단히 분명하다. 따라서, 위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지적하고 있는 바에 따라, 조만간, "새 대중 라틴말 성경"(1979, Nava Vulgata), 히브리서 11,1과 동일한 문장으로 반드시 바로잡아져야 할 것이다.

 

(xiii)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xmasday.htm 
(발췌 시작)
1. 다음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자의 교서(Motu Proprio) 형식의 1968년 6월 30일자 교황 바오로 6세의 교서(Apostolic Letter)인 "하느님 백성의 신앙고백(Creed of the People of God)" 영문본 전문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p-vi_mp_19680630_cr_en.htm

 

그리고 바로 아래에 있는 주소를 클릭하면, 이 영문본 교서 전문을 청취할 수 있다:

http://pds.catholic.or.kr/Archives/100/1/gnattboard/167/414/creed_of_PG_PaulVI_mp3


2. 다음은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발간하는 경향잡지 1968년 8월호에 실린 
교황 바오로 6세 교서 "하느님 백성의 신앙고백" 우리말 전문이다:
http://zine.cbck.or.kr/gallery/view.asp?seq=57790&path=070509230230&page=8&flip=0    
(이상, 발췌 끝)

 

작성 중입니다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우리의 본향이 하늘 나라'??? - '주석 성경'의 주석 오류: 22:06-22:24; 44:22-45:22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our_homeland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22:06-22:24; 44:22-45:22 [즉, 22분06초-22분24초; 44분22초-45분22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our_homeland_2610"] 

F.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우리의 본향(本鄕)이 하늘 나라??? - 필리피 3,20 주석 성경의 주석 오류’ 제목의 유관 졸글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3.htm <----- 꼭 필독 권고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무라토리 단편 안내: 22:24-22:45; 46:21-47:27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Muratorian_Canon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22:24-22:45; 46:21-47:27 [즉, 22분24초-22분45초; 46분21초-47분27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Muratorian_Canon_2610"]  

G.

“무라토리 단편”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제였던 발견자 무라토리(Luigi Antonio Muratori, 1672-1750년)의 이름을 붙여 이렇게 부른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자료들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e_muratorian_canon.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ce_luigi_antonio_muratori.htm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사해 문서들 중에서 지혜서의 일부 조각들의 발견에 대하여: 22:45-26:41; 47:21-48:12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Wisdom_of_Solomon_in_dead_sea_scrolls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22:45-26:41; 47:21-48:12 [즉, 22분45초-26분41초; 47분21초-48분12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Wisdom_of_Solomon_in_dead_sea_scrolls_2610"]   

H.

사해 문서들 중에서 지혜서의 일부 조각들의 발견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자료 등을 참고하라:

 

출처 0: http://ch.catholic.or.kr/pundang/4/septuagint/septuagint_vs_Jamaian_old_t.htm
(발췌 시작)

The copies of these 7 books and the missing parts of Daniel and Esther were found among the Dead Sea Scrolls and were dated to:

  • Tobit: 4th – 3rd century BC
  • Judith: 2nd – 1st century BC
  • 1 Maccabees: late 2nd or early 1st century BC
  • 2 Maccabees: circa 124 BC
  • Wisdom: approximately 40 BC or earlier
  • Sirach: 180 BC
  • Baruch: 200-60 BC
  • Parts of Daniel not included in the Masoretic texts: 3rd – 2nd century BC
  • Parts of Esther not included in the Masoretic texts: 2nd – 1st century BC

(이상, 발췌 끝)
 

또한 다음의 개신교회 측 자료들도 참고하라: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qumran/cave_1_wisdom_of_solomon.htm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qumran/cave_1_wisdom_of_solomon.pdf  [주: 제88쪽 Cave 1 단락 필히 참조] <----- 필독 권고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Inventory of the Scrolls


The following is a brief inventory provided by Dr. Gleason Archer of the discoveries made in each of the Dead Sea caves.{16}


Cave 1 was the first cave discovered and excavated in 1949. Among the discoveries was found the Isaiah Scroll containing a well-preserved scroll of the entire book of Isaiah. Fragments were found from the other Old Testament books which included Genesis, Leviticus, Deuteronomy, Judges, Samuel, Ezekiel, and Psalms. Non-biblical books included the Book of Enoch, Sayings of Moses, Book of Jubilee, Book of Noah, Testament of Levi and the Wisdom of Solomon. Fragments from commentaries on Psalms, Micah, and Zephaniah were also discovered.

(이상, 발췌 끝)


출처 3: http://ch.catholic.or.kr/pundang/4/qumran/drbi-hermeneutics-appendix-1.pdf [주: Other Cave 1 Fragments 단락 필히 참조] <----- 필독 권고

(출처 3으로부터 발췌 시작)

Other Cave 1 Fragments: This cave also yielded fragments of Genesis, Leviticus, Deuteronomy, Judges, Samuel, Isaiah, Ezekiel, Psalms, and some nonbiblical works, including Enoch, Sayings of Moses (previously unknown), Book of Jubilee, Book of Noah, Testament of Levi, Tobit, and the Wisdom of Solomon. An interesting fragment of Daniel, containing 2:4 (where the language changes from Hebrew to Aramaic), also comes from this cave. Fragmentary commentaries on the Psalms, Micah, and Zephaniah were also found in Cave 1.

(이상, 발췌 끝)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미드라쉬 안내: 26:41-26:58; 49:07-49:46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midrash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26:41-26:58; 49:07-49:46 [즉, 26분41초-26분58초; 49분07초-49분46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midrash_2610"]    

I.
(i)
미드라쉬(midrash)에 대한 Modern Catholic Dictionary의 설명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r_midrash.htm <----- 필독 권고

 

(ii) 또한 이 용어에 대한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사전”에 제시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info/midrash.htm <----- 필독 권고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영어로 'glorious'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를 '영광스럽다'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번역 오류이다: 26:58-27:44; 50:55-51:14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glory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26:58-27:44; 50:55-51:14 [즉, 26분58초-27분44초; 50분55초-51분14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glory_2610"] 

J.

복습 12: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번역 표현의 정의(definition), "영광"(glory) 이라는 용어와, "영광을 발하는"(glorious), "영광을 더하다"(glorify), "자랑하다"(glory in) 등의 그 파생어들의 정의(definitions)들을 학습할 수 있다. 특히 (i)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시는 영광(glory)이 단계적임과 (ii) 예수님의 부활 시점에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예수님께 더해지는 영광이 곧 ‘새 장조’의 매우 중요한 원리임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특히 제 2017번 글을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glory_2343.htm <----- 꼭 필청/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8.htm <----- 꼭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9.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7.htm <----- 꼭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8.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45.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glory.htm <----- 필독 권고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이벽 성조의 '성교요지' 에 등장하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마태오 복음서 6,19-21; 루카 복음서 12,33-34): 27:44-28:35; 55:19-56:23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이벽_성조의_성교요지22_5-8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27:44-28:35; 55:19-56:23 [즉, 27분44초-28분35초; 55분19초-56분23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이벽_성조의_성교요지22_5-8_2610"]  

K.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i) 신약 성경의 4복음서들을 하나로 묶은 화합 목음서/조화 복음서의 한 종류인 한문본 “천주강생언행기략”(1635년)에 포함된 마태오 복음서 6,19-21 혹은 루카 복음서 12,33-34, 그리고/혹은 (ii) 주일 및 대축일 미사 중의 전례성경 복음 말씀들과 이들에 대한 묵상들로 구성된 한문본 “천주강생성경직해”(1636-1642년)에 포함된 마태오 복음서 6,19-21을, 사전에 학습한 후에 작문한 것이 분명한, 이벽 성조의 “성교요지”, 22,5-8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81.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801.htm <----- 필독 권고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마태오 복음서 6,19-21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 안내: 28:35-29:06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Matthew6_19-21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28:35-29:06 [즉, 28분35초-29분06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Matthew6_19-21_2610"] 

L.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RSVCE에서 발췌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마태오 6,19-23) 전문 및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11_fri.htm <----- 필독 권고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하늘 나라'(천국)과 '천당'은 예수 재림의 날까지 동일시하면 아니 된다: 29:06-29:24; 52:58-54:26; 56:43-57:12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ingdom_of_God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29:06-29:24; 52:58-54:26; 56:43-57:12 [즉, 29분06초-29분24초; 52분58초-54분26초; 56분43초-57분12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kingdom_of_God_2610"]  

M.

예수 재림의 날까지는 동일하지 않으므로 구별하여야 하는 개념들인, 영성체가 있는 지상의 교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heaven, 천당)’의 차이점에 대하여서는, 본 해설서의 다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 복음 말씀(마태오 복음서 16,13-19) 해설의 각주에 있는 안내를 참고하라. 혹은 아래의 <<부록>>에 있는 복습 7을 학습하라.

 

 

%%%%%%%%%%

다해 연중 제19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3/다해연중제19주일.mp4 <----- 히브리서 11,1-2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 안내: 29:24-29:49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나바르_성경_주석서_히브리11_1_261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29:24-29:49 [즉, 29분24초-29분49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나바르_성경_주석서_히브리11_1_2610"]   

N.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의 교황 교도권에 매우 충실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오늘의 독서들에 대한 해설들을 학습할 수 있다. 내용이 매우 좋으며 필독을 권고드린다. 오늘의 제2독서의 첫 부분(히브리서 11,1-2)에 대한 해설의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19.htm <----- 필독 권고

 

O.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lerus/homilies/c_ot_19.htm 

[주: 교황청 성직자 및 수도자들을 위한 홈페이지 제공]   

(발췌 시작)

THEME of the READINGS

 

Waiting faithfully and watchfully. This is the summary of the main content of today’s liturgy, the attitude of Abraham and Sarah, and of all those who died waiting for the promise made by God (second reading). This is the attitude of the descendants of the patriarchs, who wait with confidence, in the midst of hard work, for the night of deliverance (first reading). This is the attitude of the Christian in this world, engaged in his everyday tasks, staying awake for his Master’s return (Gospel).

 

오늘의 독서들의 주제

 

충실하게 및 방심하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행위.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 및 사라의, 그리고 하느님에 의하여 마련된 약속을 기다리면서 죽은 자들 모두의 태도인(제2독서), 오늘의 전례의 주된 내용의 요약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제(deliverance)의 밤을, 힘든 일의 한가운데에서, 자신감과 함께 기다린 자들인, 성조[patriarchs, 이스라엘, 즉, 야곱의 12 아들]들의 후손들의 태도입니다 (제1독서). 바로 이것이, 자신의 스승님의 되돌아오심을 위하여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일상의 임무들에 종사하고 있는, 바로 이 세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입니다 (복음 말씀).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 3분 복음/교리 묵상  

 

CCCC 588. (주님의 기도에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CCC 2807-2812, 2858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hallow), 즉,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거룩하신 분으로서 인정하는 찬양의 기도(a prayer of praise)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모세에게 드러내셨으며 그리고 그의 백성이, 그 안에 당신께서 거주하실(dwell) 거룩한 민족(nation)으로서, 당신을 위하여 성별되기를(be consecrated) 원하셨습니다(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c_ot_19_c2807.htm 

 

CCCC 589.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되는지요?
CCC 2813-2815


우리를 “거룩함 쪽으로” 부르시는 분이신(1 테살로니카 4,7)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함이란 우리의 세례 성별(baptismal consecration)이 우리의 삶 전체에 생기를 불어 넣기를 바람(to desire)을 말합니다. 추가적으로, 그것은 - 우리의 삶들 및 우리의 기도들과 함께 - 모든 사람에 의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리고 찬양받게 되기(be blessed)를 요구함(to ask)을 말합니다(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c_ot_19_c2813.htm
 

 

마침 기도: 성모송, 영광송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부록: 복습용 묵상 자료들 >>

 

%%%%%%%%%%

다해 사순 제2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20/다해사순제2주일.mp4 <----- 복습 0부터 복습 3까지 매우 간략한 복습: 01:05-10:33

[오류 바로잡음: 바로 위의 동영상 12:18-12:48에서 기억에 의존하여 말씀드린 바는 오류가 분명합니다. 창세기 17,5를 꼭 참조하십시오]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reviews_0-3_2377.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01:05-10:33 [즉, 01분05초-10분33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reviews_0-3_2377" 

 

복습 0: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미 그리스도인들인 새 교우/세례 준비자(Catechumens)들을 위한 세례명 선정 안내의 글[제목: 축일표에 따른 성인, 성녀 모음으로 바로가기.. [세례명 선정시 꼭 참고]; 게시일자: 2003-03-08]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50.htm

 

(i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주일 전례성경 학습자들을 위한 입문자료 모음 동영상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세례를 받으신 교우님들께서 꼭 청취하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79.htm <----- 필독 권고

 

복습 1: 다해 대림 제3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07/다해대림제3주일.mp4 18:01-19:50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realism_2317.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다해 대림 제3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8:01-19:50[즉, 18분01초-19분50초]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realism_2317"]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경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학습 시에 필수적인 "실재론(realism)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실재론을 인정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그리스도교 부활 신앙 등을 인정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제목의 글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78.htm <----- 필독 권고

 

복습 2: 나해 연중 제32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02/나해연중제32주일.mp4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32:38[즉, 32분38초]부터 잠깐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piety"][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piety_2301.htm]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하느님이 한 말단인, 적어도 3자들 사이에 있어, "경의/존중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등을 학습할 수 있다. 한문 문화권 안에는 없는 개념인 것으로 파악되기에,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49.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iety.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good_works.htm <----- 필독 권고

 

%%%%%%%%%%

다해 사순 제5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23/다해사순제5주일.mp4 <----- 의로움/올바름의 근거인 [판단과 절차에 있어] 수용된 올바름: 03:08-04:20-05:37; 10:31-14:30; 47:26-51;15

[오류 바로잡음: 바로 위의 동영상 22:09에서 "오는 성금요일"은 "오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로 바로잡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0-08-01]을 참조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2.htm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rectitude_2401.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03:08-04:20-05:37; 10:31-14:30; 47:26-51;15 [즉, 03분08초-04분20초-05분37초; 10분31초-14분30초; 47분26초-51분15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rectitude_2401"]   

복습 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판단과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즉,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해지고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특히 제1689번 글 및 제1690번 글의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89.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rectitude.htm 

 

복습 4: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악"(evil), "윤리적 악"(moral evil), "죄"(sin), 원죄"(original sin) 등의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s)들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68.htm  <----- 필독 권고

 

%%%%%%%%%% 

다해 연중 제4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14/다해연중제4주일.mp4 <----- 시기(jealousy), 질투(envy): 15:48-16:48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envy_234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5:48-16:48 [즉, 15분48초-16분48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envy_2340"]

 

복습 5: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칠죄종들에 포함되지 않는 "시기"(jealousy)와,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의 차이점에 대한 글들을 읽을 수 있다. 시기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질투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음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라.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envy_vs_jealousy_concept_error.htm <----- 필독 권고

 

%%%%%%%%%% 

복습 6: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자/하느님의 아드님"(the Son of God)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60.htm <----- 필독 권고

 

(ii) 교의적으로 ‘하느님의 외 아드님(성자, Son of God)’ = ‘(유일하신) 말씀(the Word)’ = ‘(영원한) 지혜(eternal Wisdom)’ = ‘로고스(Logos)’이 성립함에 대한 설명은, 본 해설서 시리즈의 예수 성탄 대축일(낮) 복음 말씀(요한 복음서 1,1-18) 해설의 각주에 주어져 있으니 참고하라. 혹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327.htm <----- 필독 권고 

 

복습 7: (i)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은 곧 ‘하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of heaven)를 말한다(LG 5).

 

(i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하늘 나라(천국)"(the kingdom of heaven)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80.htm <----- 필독 권고

[제목: 하늘 나라(천국)의 흔적이 있는 곳과 지상의 그 현존처는 구분하여야]

 

(iii) 더 나아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 성서 신학, 영성 신학 등에 있어 가장 중요한(the most important),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의 핵심(core)인, 초자연적 상태를 나타내는, ‘천국’(天國), 즉, ‘하늘나라’, 즉,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라는 차용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 및 출처 등을 학습할 수 있다. 특히,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천당’(天堂, heaven)은 ‘천국’(天國, the kingdom of heaven)의 옛말이 아님을 항상 기억하면서, 필독 학습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76.htm
[제목: 개념적 혼란을 불러 일으키는 번역오류들 몇 개 -CCC 2816항외]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77.htm
[제목: 그리스도의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교리 교육 1991.09.04.]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87.htm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Gospel)은 무엇에 대한 것?]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96.htm

[제목: 사회적 관심 -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54.htm

[제목: 하늘 나라(천국)과 천당(heaven)의 차이점. 가해 주님 승천 대축일 온라인 주일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80.htm

[제목: 하늘 나라(천국)의 흔적이 있는 곳과 지상의 그 현존처는 구분하여야, 가해 연중 제17주일 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KH_JohnPaul_II.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H_concept_errors.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H_translation_errors.htm <----- 여기를 클릭한 후에, [꼭필독] 라벨이 붙은 글들을 꼭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ingdom_of_heaven.htm

 

(iv)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시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혹은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영어로 ‘the kingdom of God’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가, 1704년 혹은 그 이전의 시기에, 이미 ‘神國’(신국)으로 번역되었고,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神國’이 우리말 표현 ‘하느님의 나라’로 번역되었는데, 그러나, 왜냐하면 그 자구적 의미에 있어 통치의 개념이 곧바로 연상되지 않는, ‘國’(나라 국) 낱글자가 번역 용어인 ‘神國’(신국)에서 사용된 것이 참으로 유감이라 아니 지적할 수 없다.

 

(v) 다른 한편으로, ‘kingdom’, 즉, ‘regnum‘이, 어원적으로, ‘king’(임금) + ‘dominion’(통치), 즉, ‘king‘s dominion’(임금의 통치)를 의미하므로, 예수님께서 지상에 개시((開始)하신(inaugurates) ’하늘 나라‘, 즉, ’하느님의 나라‘, ‘國’(나라 국) 낱글자 때문에 연상하게 되는 장소의 개념이 아닌, 원 성경 용어의 의미인, 지상에 있는 [진리 그자체인(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55항)] 하느님이라는 임금의 통치‘(the reign of God)로 이해하면 훨씬 더 쉽게 이해됨에 반드시 주목하라.

 

%%%%%%%%%%

다해 사순 제5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23/다해사순제5주일.mp4 <----- 구속/속량(redemption)은 구원(salvation)과 결코 논리적으로 등가인 개념이 아님: 07:10-08:40; 21:03-22:16

[오류 바로잡음: 바로 위의 동영상 22:09에서 "오는 성금요일"은 "오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로 바로잡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0-08-01]을 참조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2.htm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Redemption_2401.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07:10-08:40; 21:03-22:16 [즉, 07분10초-08분40초; 21분03초-22분16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Redemption_2401"]     

복습 8:

(i)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구속(救贖)/속량 신비’(the mystery of redemption)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Redemption_2303.htm <----- 필청/필독 권고 


(ii) 요한 복음서 6,27에서, ‘인장’(seal, 印章) 대신에, ‘인정’ 운운한 것은 번역 오류가 분명하다는 생각이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주석 성경”의 각주에서 이 번역 오류를 바로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39.htm <----- 꼭 필독 권고

 

(iii) 바로 이 심각한 번역 오류와 관련하여, 본 해설서의 연중 제19주일 제2독서에 포함되는 (a) 에페소서 3,40에서 성 바오로가 가르치는 바 그리고 (b) 이에 대한 해설을 꼭 학습하도록 하라. 그리고 (c)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요한 복음서 6,27; 2코린토 1,22; 에페소 1,13; 4,30을 그 성경 근거들로 제시하는, ‘인호(印號, seal)’에 대한 가르침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698항을 학습할 수 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698.htm <----- 필독 권고 

출처 2: https://cbck.or.kr/Documents/Catechism/Read/698 <----- 필독 권고 

 

(iv)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경우에, 성세성사(the sacrament of Baptism)에서 처음으로 ‘인호(印號, seal)’를 받음의 교의 신학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속량(Redemption) 위업의 혜택을 지속적으로 입기 위함이며(에페소서 4,30), 그리고 이것은 강생하신 성자 하느님이신, 즉, 강생하신 거룩한 말씀이신, 즉, 성부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유일한 중보(中保)/중개자이신, 예수님의 인성(人性, humanity)(요한 복음서 6,27) 및 피조물인 세례를 받는 자의 인성(人性, humanity)(에페소서 4,30), 바로 이 인장(seals, 印章)들이 새겨짐이라는 성경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

 

(v) 성세성사, 견진성사, 신품성사를 받는 자들의 영혼(souls)들에 바로 이 인장(seals, 印章)들의 새겨짐, 즉, 성사의 인호(印號)(sacramental characters)들이 박힘에 의하여, 'imago Dei’(하느님의 모습), 즉, ‘영성’(靈性, spirituality)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어, 그리하여 그 결과 '새 인간'/'새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에페소서 4,24의 가르침뿐만이 아니라, '새 인간'/'새 사람'이라는 상태의 유지가, 예수님의 구속(救贖)/속량(Redemption) 위업의 지속적인 결과로서, 가능할 수도 있게 되었음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본 해설서의 나해 연중 제19주일 제2독서 해설의 일부로서 발췌된 에페소서 4,30에 대한 성 예로니모의 해설을 반드시 학습하고,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227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272항, 제1273항, 제1274항을 학습하도록 하라.

 

(v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혼’이 그 형상(form)인 인간의 형상인(formal cause)인 ‘imago Dei’(하느님의 모습) 그리고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대응하는 번역 용어의 출처 등에 대한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92.htm <----- 꼭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capax_Dei.htm <----- 필독 권고 

 

(vi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령에 의한 기름부음 받는 세례를 받은, 즉, 대세(代洗, private baptism)가 아닌, 세례 인호(印號, seal)가 포함된 장엄 세례(solemn baptism)를 받은, 그리스도인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통공(communio, 하나 됨)’의 필요충분조건‘예수님의 계명의 준수’임을 증명하는 졸글/졸고를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55.htm <----- 필독 권고 

 

(viii)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령에 의한 기름부음 받는 세례를 받지 아니 한, 즉, 세례 인호(印號, seal)가 포함되지 않은, 따라서 대부분의 개신교회 측의 세례가 포함되는, 대세(代洗, private baptism)만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영성체를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졸글/졸고를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39_private_baptism.htm <----- 필독 권고 

 

(ix) 나해 연중 제32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02/나해연중제32주일.mp4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sealed_character_2301.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55:22[즉, 55분22초]부터 잠깐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sealed_character"]

 

(a)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personal) 친밀한 대화’를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바로, 대세(代洗, private baptism)아닌, ‘성령으로 기름부음받는 세례’(즉, 장엄 세례, solemn baptism)에서, 영혼(soul)을 그 형상(form)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사람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결과로서 훼손된, 자신의 형상인(formal cause)을 완미하게(perfectly) 회복시켜야 함이며, 그리고 바로 이 형상인의 완미한 회복(perfect recovery)을 위하여, 주교(bishop)/사제(priest)/부제(deacon)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자의 영혼에 새겨지는 ‘인호’(印號, the sealed, character)를 받아야 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b)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주관하시는 신성적(divine) 인과 관계의 지속적 형성에 있어, 인간/사람이, 대세(代洗, private baptism)아닌, ‘성령으로 기름부음받는 세례’(즉, 장엄 세례, solemn baptism)에서, 자신의 형상인을 완미하게(perfectly) 회복시켜야만 비로소 ‘하느님과의 인격적 친밀한 대화’에의 참여자 및 수혜자가 될 수도 있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소위 말하는 자연계의 물리 법칙에서처럼 ‘공명 현상’(the phenomenon of resonance)이, 하느님과 사람/인간 사이에 ‘영적 공명 현상’(the phenomenon of spiritual resonance)이 발생할 수도 있음에, 그리하여 그 결과, ‘하느님과의 인격적 친밀한 대화’라는 한 개의 기적(miracle)이 발생할 수도 있음에, 그리하여 그 결과, 또한 은총(grace)이라는 도움에 의하여 ‘악습(vices)들’이 ‘덕들’(virtues)로 교정되는 습관에 있어서의 변화가 발생하게 되어, 하느님 쪽으로 ‘회심’/‘윤리적으로 변화’(‘conversion‘ to God)라는 한 개의 윤리적 기적(a moral miacle)이 발생할 수도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c)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이에 대한 유관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또한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weakness_2297.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39_private_baptism.htm <----- 필독 권고

 

복습 9:

(i) 다음은, 1880년에 초간된 "한불자전"에서 발췌한 바이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30-1884_리델/1880_한불자전.htm <----- 여기를 클릭하면


필자가 어렵게 확보하여 제공하는 [제공처: 분당골 가톨릭 문서 선교 홈페이지 capax Dei], 예를 들어, 우리말 고어체 표기의 변천과정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문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국내의 인터넷 공간에 제공자가 없어서 국내의 인터넷 공간에서 전혀 구할 수 없었던, "한불자전 전문 pdf"를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셩셔_셩셰_셩심_셩신_in_1880_한불자전_제404쪽.jpg

 

게시자 주: "셩심"(聖心)을 프랑스어로 설명하면서, "마음"아니라, "Cœur" (심장; 라틴어: Cor)가 사용된 것에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발췌 끝)

 

(ii)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heart), 즉, 성체 성혈에 의하여 구약 성경의 유관 예언들이 구현된 그리스도교 고유한 구속(救贖)/속량(Redemption) 신비와 관련하여, 구약 성경 및 신약 성경의 유관 부분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성경 용어인 ‘Cor/heart’을, 글자 그대로, ‘심장’으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을 하지 않고, 대신에, ‘마음’(mind)으로 잘못 번역을 한 심각한 번역 오류에 대하여 지적하는 필자의 졸글들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히브리서 9,28; 이사야서 53,12 :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51.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_mon.htm

 

히브리서 10,7; 칠십인역 시편 40,6-8[7-9]: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63.htm 

[제목: 칠십인 역 시편 40,6-8 및 히브리서 10,5-7: 을 마련해 주셨다 vs 대중 라틴말본 및 마소라본 시편 40,7-9: 귀를 열어 주셨다???; 게시일자: 2020-06-15]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_tue.htm

 

히브리서 10,12; 시편 110,1: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_wed.htm 

 

히브리서 10,17; 예레미야 31,33-34: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_wed.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1.htm <----- 필독 권고 

[제목: 하느님께서 접촉하시는 우리의 신체 부위는 어디?; 게시일자: 2015-01-07]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4.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6.htm <----- 필독 권고

[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의 우리말 번역 작업 자체가 해석/주해 작업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게시일자: 2015-02-17]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lent_5.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ot_8.htm  


복습 10: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516항, 제517항, 그리고 제518항에서, (i) 성부 하느님의 계시, (ii) 구속(救贖)/속량 신비, 그리고 (iii) 총귀(總歸)/총괄복귀(總括復歸) 신비로 구성된다고 가르치는, 예수님의 신비/오적(奧跡)(mysteries)들에 공통인 특징들 중의 하나인,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하기 이전의 원 상태, 즉, ‘코스모스(cosmos)’로 회복되기 시작하였음을 말하는, 예수님의 부활에 의하여 이미 개시된, 성경 용어인 ‘총귀(總歸)/총괄복귀’(總括復歸, recapitulation, recapitulatio)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등에 대한 글들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필독하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recapitulation_of_St_Irenaeus.htm <----- 필독 권고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새 창조’의 핵심 성경 용어인 'recapitulation/recapitulatio'의 차용 번역 용어로서 채택된 ‘총귀(總歸)’라는 용어의 출처와 기원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15.htm  <----- 필독 권고

 

%%%%%%%%%%

다해 연중 제5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15/다해연중제5주일.mp4 <----- "은총"의 정의(definition): 12:00-12:41; 47:10-48:58; 50:50-56:06

[오류 바로잡음: 바로 위의 동영상 04:11과 18:59에서 "팔삭둥이"로 잘못 읽은 것을, 교안 본문대로, "칠삭둥이"로 교체합니다. 그리고 18:59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잘못 읽은 것을, 교안 본문대로 "형이하학적"으로 교체합니다.]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grace_2343.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2:00-12:41; 47:10-48:58; 50:50-56:06 [즉, 12분:00초-12분:41초; 47분:10초-48분:58초; 50분:50초-56분:06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grace_2343"]

 

복습 11: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한문 문화권 천주교회의 고유한 번역 용어인 ‘은총’(grace)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출처 등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47.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5.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2.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1.htm [출처]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grace.htm  <----- 꼭 필독 권고 :

 

%%%%%%%%%%

다해 사순 제5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23/다해사순제5주일.mp4 <-----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시는 영광은 단계적이고 예수님의 부활 시점에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더해지는 영광은 곧 '새 창조'의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14:30-16:05; 51:15-52:26

[오류 바로잡음: 바로 위의 동영상 22:09에서 "오는 성금요일"은 "오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로 바로잡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0-08-01]을 참조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2.htm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glory_2401.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4:30-16:05; 51:15-52:26 [즉, 14분30초-16분05초; 51분15초-52분26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glory_2401"] 

복습 12: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번역 표현의 정의(definition), "영광"(glory) 이라는 용어와, "영광을 발하는"(glorious), "영광을 더하다"(glorify), "자랑하다"(glory in) 등의 그 파생어들의 정의(definitions)들을 학습할 수 있다. 특히 (i)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시는 영광(glory)이 단계적임과 (ii) 예수님의 부활 시점에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예수님께 더해지는 영광이 곧 ‘새 장조’의 매우 중요한 원리임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특히 제 2017번 글을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glory_2343.htm <----- 꼭 필청/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8.htm <----- 꼭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9.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7.htm <----- 꼭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8.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45.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glory.htm <----- 필독 권고

 

복습 13: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에 제시된 '애덕'(charity)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등에 대한 글[제목: 애덕(charity)이라는 덕; 게시일자: 2013-11-04]을 학습할 수 있다[본문 중에 포함된 key word: Christoph Cardinal Schönborn]: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65.htm  <----- 필독 권고

 

(ii)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그리스도교 전통적 교의 신학, 성서 신학, 그리고 영성 신학에 있어 그리스도교(Christianity, 즉, 예수님의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용어들인, 예수님의 새 계명의 이해에 필수적인, 오늘의 복음 말씀과 제2독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명사 ‘사랑’(love, agape, charitas, charity, amore)의 자구적 어의(語義)(literal sense) 및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동사 ‘사랑하다’(to love, agapao, diligere, amor)의 자구적 어의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 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51.htm [가해 부활 제6주일 말씀전례 묵상]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7.htm [번역 용어인 사랑하다의 의미] <--- 꼭 제일 먼저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52.htm [사랑들의 차이점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8.htm [하느님의 뜻(의지, will)]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65.htm [애덕(charity)이라는 덕(신학대전여행)]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5.htm   [사랑/애덕의 정의(definition) 외]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0.htm [하느님의 사랑]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00.htm [사랑의 의미는?]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37.htm [애덕의 결여/부재(cupiditas)는 모든 죄의 뿌리]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4.htm [Ubi caritas et amor 혹은 Ubi caritas est vera?]

 

%%%%%%%%%%

다해 사순 제5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23/다해사순제5주일.mp4 <----- 필리피서 3,11에서 [그리스도교] 희망이란, 곧, 당사자인 나를 위한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을 말한다; 주관적 구속(subjective redemption)이란 무엇을 말할까?: 16:05-17:47; 47:26-52:26-54:46-57:09

[오류 바로잡음: 바로 위의 동영상 22:09에서 "오는 성금요일"은 "오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로 바로잡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0-08-01]을 참조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2.htm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divine_love_for_myself_2401.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6:05-17:47; 47:26-52:26-54:46-57:09 [즉, 16분05초-17분47초; 47분26초-52분26초-54분46초-57분09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divine_love_for_myself_2401"]  

(iii)

그리고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인성(人性)적 사랑(human love)의 차이점에 대한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특히, 필리피서 3,11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바로 이 초자연적 희망(hope, 망덕)이 당사자 자신을 위한 신성적 사랑(divine love)임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3.htm  
[3자들 사이의 자연적 사랑 dilectio 에만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이 가능하다] 

 

(iv) 더 나아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이들 용어들의 자구적 어의(語義)(literal sense)에 대한 추가적인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또한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concept_of_love.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05.htm

 

%%%%%%%%%% 

복습 14:

가. 나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04/나해그리스도왕대축일.mp4 [오류 정정: 이 동영상 중의 육성(肉聲) 설명에서, (i) 18:29-18:36[18분29초-18분36초] 사이에 말해진 "하스모니아 왕조""셀레우키드 왕조"로, (ii) 31:26-31:29[31분26초-31분29초] 사이에 말해진 "예수님께 제몰로"를, 교재 본문과 동일하게, "하느님께 제물로"로, 그리고 (iii) 33:50-35:23[33분50초-35분23초] 사이에 말해진 "순음력""태음력"으로, 바로 잡습니다.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주일_전례성경_학습자들을_위한_입문자료_모음_2007-10-09.pdf]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perfect_2305.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36:30-39:15[즉, 36분:30초-39분15초]를 잠깐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 (*)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perfect_2305"]

 

%%%%%%%%%%

나. 나해 연중 제32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02/나해연중제32주일.mp4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04:31[즉, 04분31초]부터 잠깐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perfection"]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perfection_2301.htm]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 성서 신학, 그리고 영성 신학에 있어 핵심 용어인 '완미(完美)'(perfection)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대한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완미(完美)한(perfect) 것은 완전(完全)한(complete) 것이나,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음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라:

(*)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erfection.htm <----- 필독 권고

 

%%%%%%%%%% 

복습 15: (i)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의로움/올바름’(righteousness)‘정의’(justice)의 차이점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묵상 동영상을 꼭 청취하도록 하라. 특히, ‘정의로운 자(the just)들’ 중에서만 오로지 ‘의로운 자(the righteous)들’이 있을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21.htm <----- 묵상 동영상 필청취 요망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45.htm <----- 묵상 동영상 필청취 요망

 

(ii) ‘의로운 자들’(the righteous), 즉, ‘의인들’‘의로운 일들’(piety), 즉, ‘선행들’(good works)을 실천한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있을 수 있는데,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나열하신 ‘의로운 일들’, 즉, ‘선행들’에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iety.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good_works.htm <----- 필독 권고

 

복습 16: (i)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credere Deum’(信天主, 신천주), ‘credere Deo’(信賴天主, 신뢰천주), 그리고 ‘credere in Deum’(信仰天主, 신앙천주)의 차이점에 대한 글을 학습할 수 있다.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므로 필히 학습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9.htm <----- 필독 권고

 

(ii) 혹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믿다"(believe)"쪽으로 믿다"(believe in)의 커다란 차이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9.htm <----- 필독 권고

 

복습 17: (a) 영어 번역문들에서 ‘... so that ... may/might ...’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전달하고자 한 형이상학적 의미가 잘 보존되도록 우리말로 직역 번역을 하고자 한다면, 천주교회가 이미 존재하는 지역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中保)/중개자 역할(요한 복음서 14,6)이 알려진 지역에서, 다음의 인과 관계들이 성립함과 모순되지 않도록 번역되어야 함을 항상 유념하도록 하라:

(i)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믿는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세례를 받는 자들, 즉,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입양되는 자들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ii) 세례를 받은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장차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얻는 자들, 즉, 천상영복을 누리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b)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 so that ... may/might ...’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전달하고자 한, '인과 관계'라는 형이상학적 의미에 관한 용례(usage examples)들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meaning_of_so_that_statement.htm <----- 필독 권고

 

복습 18: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기적’(miracle), ‘이적’(wonder). ‘표징’(sign)의 차이점에 대한 글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09.htm <----- 필독 권고 

 

복습 19: [情(정, passion)과 욕정(欲情, lust)의 차이점]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정(情, passion)’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 등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5.htm <----- 꼭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assions.htm <----- 필독 권고

(이상, 복습 끝) 

 

복습 20: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절망’/‘자포자기’(despair, hopelessness)이 포함되는, 성령에 거스르는 죄들 여섯 개에 대한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blasphemy2Holy_Spirit.htm <----- 필독 권고

 

%%%%%%%%%%

다해 사순 제5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23/다해사순제5주일.mp4 <----- 그리스어 성경 용어인 '새'(new"의 두 가지 의미들: 06:37-07:10

[오류 바로잡음: 바로 위의 동영상 22:09에서 "오는 성금요일"은 "오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로 바로잡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0-08-01]을 참조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2.htm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two_meanings_of_Greek_new_2401.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06:37-07:10 [즉, 06분37초-07분10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two_meanings_of_Greek_new_2401"]   

A.
복습 2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예를 들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그리고 우리말 등의 지역 언어들의 한계 때문에 동일하게 ‘새로운(nova, nouveau, new)’으로 번역되는, 그러나 동일한 의미를 결코 나타내지 않는,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들인 ‘새로운'(kainos, 카이노스)‘새로운'(neos, 네오스)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s)들의 커다란 차이점에 대한 글 등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two_meanings_of_Greek_new_2387.htm <----- 필청/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kainos_vs_neos.htm

 

%%%%%%%%%%

다해 연중 제4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14/다해연중제4주일.mp4 <----- 교만(pride): 14:30-15:13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pride_234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4:30-15:13 [즉, 14분30초-15분13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pride_2340"]

 

복습 22: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경 용어인,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교만’(pride)의 정의(definition) 등에 대한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ride.htm <----- 필독 권고

 

%%%%%%%%%% 
다해 연중 제4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14/다해연중제4주일.mp4 <----- 허영(vainglory): 15:13-15:48; 기적, 망망, 허영: 30:08-37:13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vainglory_2340.htm]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5:13-15:48 30:08-37:13[즉, 15분13초-15분48초 30분:08초-37분:13초]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vainglory_2340"]

 

(ii) ‘교만’의 딸(daughters)들 중의 하나로서, 그 자체로는 소죄(venial sin)로 분류되는, ‘허영(vanity, vainglory)’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72_vainglory.htm <----- 필독 권고 

 

%%%%%%%%%% 

복습 23: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예수님의 공생활 전후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map/PalestineChristHR.jpg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map/the_journey_&_deeds_of_Jesus_&_scriptual_index.htm <----- 되도록 자주 참조하라

[주: 예수님의 공생활 당시의 행적들이, 4복음서들 중의 근거 구절들의 제시와 함께, 자세하게 표기된 지도임. 확대하여 보도록 하라. 다만, 1881년에 출판된 지도이다보니,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의 고향[벳사이다(Bethsaida)]의 위치 오류, "Coasts of Judea"(마태오 19,1; 마르코 10,1) 표기 오류 등의 오류들이 있음]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사도 베드로의 고향[벳사이다(Bethsaida)]의 위치를 고고학 고증를 거쳐 찾아내는 과정 등에 대한 글[제목: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마태오 19,1)???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마르코 10,1)???; 게시일자: 2021-10-02]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81.htm <----- 필독 권고

 

복습 24: 나해 연중 제30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99/나해연중제30주일.mp4 

 

[우선적으로, 위에 있는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주소에 접속하여 11:00[즉, 11분00초]부터 잠깐 동안 먼저 시청/청취하면, 아래의 주소(들)에 안내된 글(들)의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name="concupiscence"]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사욕편정’(慾偏情, concupiscence)이 죄가 아님 등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특히, (사악할 사; 주: 1880년에 초간된 “한불자전”에 수록된 옛 발음은 ) 낱글자를 사용하는 ‘慾偏情’이라는 한자표기는, 16세기 중반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단(heresy)으로 단죄된 마르틴 루터의 주장에 동의하여, 바로 이 ‘사욕편정’이 죄임을 말하기 때문에, 명백한 번역 오류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부제: 죄가 아닌, 죄 쪽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말하는, 사욕(私慾)/사욕편정(私慾偏情, concupiscence) 등에 대하여;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concupiscence_2290.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96.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10.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56.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concupiscence.htm

 

%%%%%  

복습 25: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마태오 복음서 5,3; 루카 복음서 6,20에서, "복되도다" 혹은 "복되어라" 대신에, 1970년대"공동번역성서"에서 처음으로 도입된"행복하여랴!"로 번역된 표현이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임을 지적하는 졸글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blessed_are_2350.htm <----- 필독 권고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성자 주: 2020년 가해 부활 제3주일부터, 매주 시리즈의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본 "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교안"은 통상적으로 이틀 동안의 묵상 후에 작성되고 있으며, 그리고 묵상 동영상 녹화 후에 추가적인 묵상의 결과로서 내용 보강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아래의 안내 첫 공지일자: 2021년 3월 10일]

이곳은 2004년에 굿뉴스 서버에 개설된 "가톨릭 문서 선교회"가 운영/관리하는 Big DataBase Archive 구축 공간 및 2000년 대희년부터 당시 교육부 지원 공동연구/교육용 SGI Origin 3400 수퍼컴퓨터 사용자들을 위하여 연구/개발해 온 고유한 AI 알고리즘/빅 데이터 분석 기법 기반 최신 연구 결과물들의 제공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또한 이곳은, 문화장벽(culture barriers)들/언어장벽(language barriers)들 등에 기인하는 형이상학 개념(metaphysical concepts)들의 전달 장애/훼손/오류 등의 조기 회복/복원 및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이들 개념들 사이에 현존하는 진리인 유의미한 관계의 상태들의 전달/발견 등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추구해 온, 연구/교육, 선교/전교/복음화 및 토착화, 공간이기도 합니다.

 



200 2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