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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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20,19-31)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나자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난다. (사도 5,12-16) 요한 사도는 파트모스섬에서, 그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묵시1,9-11ㄴ.12-13.17-19)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시며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다. (요한20,19-31)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 (사도5,12-16)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15)
'그리하여'에 해당하는 본문은 '호스테 카이'(hoste kai)이다. 접속사 '호스테'(hoste)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즉 '호스테'는 사도들이 행한 표징과 이적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떠한 반응과 결과를 나타내게 했는지를 결론적으로 진술하고 있음을 가리켜 준다.
여기서의 '호스테'는 앞의 사도행전 5장 12절과 13절의 내용과 연결하여 사도들의 표징과 이적이 많이 일어났고, 이것은 백성 가운데 사도행전 5장 15절과 16절의 결과를 낳게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즉 사도들이 행한 표징과 이적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사람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만 스쳐 지나가도 치유될 것으로 믿고 나올 정도가 되었고, 실제로 사도행전 5장 16절에서는 병든 자들이 모두 나음을 얻은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것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의 위대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베드로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유사한 경우를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나(마태9,20-22 ;마르코6,56) 사도 바오로의 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 병이 낫고 악령들이 물러나는 경우(사도19,11.12)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의 경우 그 사람과 관련된 사소한 것을 통하여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이러한 소박한 믿음을 실제로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할 여건을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의 그림자나 수건등을 통해서라도 병을 치유받고자 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다른 한편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제대로 된 의사들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살았는지를 암시한다.
별다른 희망이 없었던 그들 앞에 치유자가 나타나자 그들은 지금 치유받지 않으면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복음(요한20,19~31)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요한 복음 1장 34절에서 세례자 요한이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라고 한 외침이나, 요한 복음 1장 49절에서 나타나엘이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한 고백과 함께 요한 복음 2장 28절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담겨진 신앙 고백이다.
특히 요한 복음 2장 28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된 문맥에서 고백된 내용이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요한 복음사가는 요한 복음 1장 1절에서 본서의 첫 시작을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하였고, 본서의 종결부인 요한 복음 20장 28절에 와서는 '저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
이것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개개인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요한 복음의 강조점을 드러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8절에서는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가 예수님께 대하여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이 하느님의 진정한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는 '~이시며'와 '~이십니다'로 번역되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관사 '호'(ho)가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 천주성)이 더욱 강조된다.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런 뉘앙스를 살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My Lord and my God)라고 번역했다.
토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게 되자 창자국와 못자국을 직접 만져 볼 필요도 없이(요한20,28) 그의 모든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기보다는 놀라움에 찬 탄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토마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놓았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9)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 없는 자'('아피스토스'; apistos)와 '믿는 자'('피스토스'; pistos)가 서로 대조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헤오라카스 ~ 페피스튜카스'; 'heorakas ~pepisteukas)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 '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이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의 선택은 당시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서의 일차 독자들인 초대 교회 신도들이나,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도 계속해서 던져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들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 다다르지 못한, 수준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루카24,10.11).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들이다.
코린토 1서 15장 5절과 6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은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서야 믿은 자들이다. 얼핏 보기에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더 복있는 사람들인 것 같지만, 요한 복음 20장 29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더 복된 사람들이다.
'믿음 없는 자'(apistos)보다는 보고서라도 믿은 자들이 더 복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들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고, 또한 지금도 직접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근거하여 이 부활의 진리를 믿는, 예수님 승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더 복된 사람들인 것이다(로마10,9).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믿음으로 이끕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토마스가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층 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이 층 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모든 문이 닫혀 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그들 가운데에 서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물질적인 것들에 좌우되지 않으십니다. 굳게 닫힌 문들은 그분을 멈춰 세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원하시면 어디든지 가실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