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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만한책-서울주보(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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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화 [ghtrans] 쪽지 캡슐

2003-03-14 ㅣ No.508

읽어 볼 만한 책   

 

운명 (노벨문학수상작)  

 

   이 책은 헝가리어로 쓰여진 2002년도 노벨상 수상작이다. 원제목 그대로 번역한다면 ‘운명 없음’이라고 해야겠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운명은, 있냐 없냐’라는 질문뿐 아니라 ‘만드느냐 안 만드느냐’ 하는 각도에서도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인공 죄르지는 15세 소년으로, 그의 활동 기간은 나치의 억압체계가 잘 돌아가던 1944년부터 시작하여 1년 만에 끝난다. 그는 “여느 때와 만찬가지로 아침 일찍 일어나 일터로” 가다가 강제로, 전혀 상상치도 못한 곳으로 끌려 다니고 온갖 어려운 시간을 체험한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도 “이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못했고 거기에 정말 관심도 없었으며 내 마음에 한치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주 가볍고 평화롭고 꿈을 꾸듯이 편안한 느낌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주인공은 쾌락에 탐닉하는 것과 정반대로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수용소에서 해방된 후, 고향에 돌아와서 느끼는 의사소통의 벽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떠날 때의 그 ‘여느 때’로 발길을 옮긴다.

 

   작품의 내용은 저자의 실제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인위적인 모든 여건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생명의 고유한 요소임을 밝히는 주인공의 자세는 허구가 아니다. 주인공은 고통의 무기력을 드러냄으로써 생명이 일정한 틀로 환언되거나 규정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 작품은 욥기와 전도서를 합해서 우려낸 느낌을 준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일을 이 복잡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까 질문하는 신자는 물론, 세상이 끝난 다음의 생명에 관심 있는 분도 읽으면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재미를 외면하는, 아니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재미의 지평을 여는 소설이다. “당신 자신을 어둠으로 감싸시는”(시편 18,11) 야훼를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심용섭 아우구스티노 신부·길음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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