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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나를 따라라.”(요한 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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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5-05 ㅣ No.159

 

 

[부활 제3주일]“나를 따라라.”(요한 21,1-19)

 

사도들은 신문하는 대사제에게,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다며 부활을 증언한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27ㄴ-32.40ㄴ-41)
그 무렵 대사제가 사도들을 27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40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요한 사도는, 모든 피조물이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무궁하기를 비는 소리를 듣는다. (묵시 5,11-14)
나 요한은 11 어좌와 생물들과 원로들을 에워싼 많은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백만 수억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는, 당신 양들을 돌보라고 하신다. (요한 21,1-19)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사도5,27ㄴ-32.40ㄴ-4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31~32)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목적이 여러 가지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 결과 가운데

이스라엘의 회개와 죄의 용서를 받게 하는 것도 포함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본문에 나오는 '받게 하시려고' 번역된

'두나이'(dunai)란 부정사를 목적이 아닌 결과의 의미로 해석할 때 그렇게 된다.

이러한 번역이 문맥과 더 잘 어울린다.

 

그리고 당시 베드로는 유대인 지도자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회의에서 이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업의 효력이 전체 인류에게 미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유대인에게 국한시켜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원문에는 '그분을'로 번역된 '투톤'(tuton)이 본절의 맨 처음에 나온다.

이것은 '투톤'으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그분을 하느님께서 영도자(왕; 아르케곤 archegon)와

구원자(구세주; 소테라 sotera)로 높이셨다'이다.

 

이처럼 본문에서 '그(분)'을 강조적으로 문장 맨 처음에 위치시킨 목적

앞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나무에 매달아 죽여

저주할 자로 여긴 것과 대조하여 바로 그분을 하느님께서 오히려

왕과 구세주로 높이신 것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대조는 원문에서 문장의 주어로서 '하느님'(호 테오스)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앞절의 서두에 '호 테오스'(ho theos)가 나와 있기 때문에 본절에서 생략될 수 있지만

여기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강조적으로 쓰인 '하느님'은 앞절에서

예수님을 죽인 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너희'(휘메이스; hymeis)와 대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저주할 자로 여겨 죽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함으로써

그들에게 죽임당한 예수님을 왕과 구세주로 높인 분이 바로 하느님 당신 자신임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을 왕과 구세주로 높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및 하느님 옥좌 오른편에 앉히심을 가리킨다(필리2,9~11).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시며 유일한 구세주이심이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인정된 것이다.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31)

 

시편 110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이것은 본문이 승천의 방향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는 '테 덱시아'(te dexia)가 도구, 수단의 여격이므로

문법적으로 볼 때는 '오른손으로' 번역하여 승천의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 개념에서 오른손은 능력 말한다.

 

즉 사도행전 2장 33절에도 나오지만, 하느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당신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시고 하늘로 올리신 것을

상징적인 표현 방법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탈출5,6; 89,14).

  

한편 '들어 올리시어'라는 표현은 지상에서 천국으로의 장소적 이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보다는 육신을 입으셨던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승천을 통해

다시 영광스러워지셨다는 신분적 이동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필리2,9-11).

 

한편 사도행전 5장 32절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지상 명령인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1,8)는 말씀을 잘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에서 '일'로 번역된 '레마톤'(rematon)의 원형

'레마'(rema)는 대부분 '말씀'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단어가 히브리어적인 어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따바르'(dabar)처럼 '일','사건' 가리키게 되는데,

새 성경을 포함하여 여러 영역본들도 본문에서 이러한 관점으로 이 단어를 해석하였다.

 

이렇게 볼 경우 이 단어는 앞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과 구세주로 높이신 사건들을 가리키게 된다.

따라서 사도들은 바로 이 '사건의 증인' 되는 것이다.

 

그러나 '레마'(rema)는 신약 성경에서 대부분 '말씀'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본문에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레마'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과 구세주로 높이신 일에 관한 '설교','말씀'을 가리키게 된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의 증인' 된다.

 

그러나 '레마' 어떻게 해석되든지 변함없는 사실은 사도들의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왕과 구세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있다.

 

이 말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의 증인이며,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편에 있는 합당한 증인으로서

자신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처럼 대사제의 권위도 두려워하지 않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바로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증인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을 받았으므로, 그 어떤 위협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성령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복음의 당당한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부어 주신 것이다. 

 

 

부활 제3주일 복음 (요한21,1-19)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밴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1)

 

사도 요한 복음사가는 당시 그 자리에 다른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도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리는데 힘을 합했을텐데도 불구하고, 마치 시몬 베드로 혼자 153마리나 되는

고기가 잡힌 그물을 끌어올린 것처럼 기록했다.

 

이것은 고기를 끌어올리는 행위가 상징하는 앞으로의 제자들이 수행하는 선교

사업에 있어서,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실제로 시몬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중심 인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사도9,32~34).

 

그리고 요한 복음 21장 11절에서 이 사건의 목격자인 사도 요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잡은 고기가 매우 풍성했음을

세 단어를 사용해서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가득'에 해당하는 '메스톤'(meston; fulls), '그토록 많은데도'에 해당하는

'토수톤'(tosouton; so many), '큰'에 해당하는 '메갈론'(megalon; great;

large)이 세 단어인데, '메스톤'(meston)밀도의 정도를, '메갈론'(megalon)

크기나 부피의 정도를, '토수톤'(tosouton)분량이나 수의 정도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가득찬 큰 (고기가) ~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같은 삼중적 표현을 통해 단순히 고기가 양적으로 많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놀라운 결과로서의 풍요함을

독자들이 생생하게 느끼도록 했다.

 

또한 요한 복음사가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 사건이 주는 놀라움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서 정확하게 잡힌 고기의 수를 세어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이 숫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100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수이며, 50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수이다.

그리고 3은 삼위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장차 유대인과 이방인의 복음화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완성될 것을 보여준다는 견해이다(성 치릴로).

 

둘째, 자연수 1부터 17까지를 모두 합할 경우에 그 합이 153이다.

17에서 10은 율법의 수요, 7은 은총의 수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이 이른다는 견해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셋째, 초대 교회의 중심 인물인 베드로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인 '시몬',

'바르요나', '게파'알파벳이 나타내는 수가 가리키는 합이 153이므로,

이것은 시몬 베드로를 중심으로 복음 전파가 이루어진다는 견해이다

(튀빙겐 학파).

 

넷째, 자연계의 물고기의 종류가 153가지나 되므로, 이것은 세상 모든 종족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견해이다(성 예로니모).

 

이러한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해석들은 앞으로 제자들이 담당해야 할

세계 선교의 결과가 매우 풍요로울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제자들을 고기잡는 어부에서 사람잡는 어부로

부르신 것처럼, 이제 부활 이후에 다시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이 사건을 통해 사람 낚는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신 일과 관련해서 요한 복음 21장 11절

상황과 유사한 내용이 기록된 루카 복음 5장 6절을 보면, 고기를 많이 잡아서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온다.

 

루카 복음사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사람들이 매우 많음에 초점을 맞추었고,

요한 복음사가 그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의 포용성, 즉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불씨를 다시 지펴주시는 주님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침이 될 무렵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로 하여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도록 해주시고, 손수 아침을 준비하시어 같이 식사하시며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먼저 그분을 알아봅니다(21,7).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일곱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돌아가시자 두려움과 좌절에 빠진 나머지 스승을 버리고 도망갔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예전의 일터로 돌아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죽음을 넘어서는 빛을 보지 못한 채 밤의 어둠 속에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숯불 사랑’으로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제자들을 절망과 당혹감, 좌절감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끈 빛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겪었던 이 과정은 내 안에서도 되풀이되곤 합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사회적 불의 앞에 무기력함을 느낄 때,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 때 쉽게 내가 원하는 일상에 안주해버리곤 하지요. 

참으로 그런 어둠의 순간이야말로 더 깊이 주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으며, 사랑이신 주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때에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다가오시어 내 일상의 그물이 터지도록 풍요롭게 해주시고, 생명을 시작하는 아침밥을 차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피곤하고 고달플 때일수록 내가 만든 동굴이 아니라 주님을 애타게 찾아야 할 때입니다. 

제자들이 아침을 먹은 뒤 예수님께서는 으뜸 사도인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첫 번째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21,15)고 묻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양들을 쳐야 할' 으뜸 사도로서 지닌 막중한 사랑의 책임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지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차례나 거듭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21,17) 하고 대답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난 뒤 세 차례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배신했었지요.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 쓰라린 아픔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고 죄책감과 수치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거듭 사랑을 확인하셨을까요? 무엇보다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양들을 치며, 교회의 반석이 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질문을 통해 베드로 스스로 자신 안에 있던 죄책감과 수치심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정화된 사랑을 지니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거듭 되는 질문은 사랑과 희망의 불씨였던 것입니다. 

매순간 나의 어둠과 절망, 실패와 고통, 죽음의 상황, 죄책감과 수치심의 한복판으로 다가오시어 다시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펴주시는 사랑의 모닥불에 나의 고통과 시련,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를 올려 희망을 숨쉬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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