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사진 자료실

[성당] 안동교구 함창 본당 퇴강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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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3-06-15 ㅣ No.1064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안동교구 함창 본당 퇴강 공소

100년 신앙 전통 이어온 집성촌, 교우촌

 

 

(사진설명)

1. 1956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봉헌된 퇴강 공소 전경. 여느 성당과 달리 성모승천상이 성당 정면에 위치해 있다.

2. 퇴강공소 내부.

3. 성모승천상. 양 손을 가슴에 얹고 하늘을 우러러 보는 성모를 천사들이 떠받치고 있다.

 

 

쪽빛보다 푸르른 여름 하늘을 바라보며 서울에서 차로 달린 지 3시간30분. 눈 앞에 낙동강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그 뒤로 울창한 숲으로 덮힌 산이 턱하니 버티고 있고, 산 자락 끝에 고풍스런 벽돌조 고딕 성당이 서 있다. 산을 등지고 강을 내려다보는 형상이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경북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에 있는 안동교구 함창본당(주임 전장호 신부) 관할 퇴강공소 전경이다. 104년전 배산임수의 명당인 퇴강리에 신앙이 전래된 이래 경북 지역 교우들의 '믿음의 고향'이 된 곳이다.

 

차에서 내려 공소로 들어서니 앞마당 나무 그늘에 모여 담소하던 할머니 신자들이 기자를 아들처럼 반긴다.

 

"먼 데서 온다고 고생 많이 잡샀지여. 더븐데 퍼뜩 이거부터 한잔 하이소."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건네는 할머니 손에는 시원한 맥주 한잔이 들려 있었다. 수십년전부터 이어져 온 마을 전통에 따라 농번기인데도 불구하고 오후 1시부터 성당에 모여 성체조배를 하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단다. 마침 공소사목을 위해 거주하고 있는 이준건(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신부가 맥주 몇 병을 내놓아 마당에서 즉석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퇴강은 김씨가 모여사는 집성촌인데, 지금도 우리 마을에 사는 사람 모두가 교우라요. 그니까 교우촌인 셈이지여."

 

할머니들의 말에 교우촌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배 있었다. 퇴강리는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여 공동체를 이룬 한국 가톨릭 교회의 초창기 모습을 빼닮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 명맥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동강을 비롯해 경북 문경, 화령, 예천 등지에서 흘러온 여러 강줄기가 만나는 바람에 마을 앞 강물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뜻에서 예부터 '물미(尾)' 또는 '퇴강(退江)'으로 불리는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99년.

 

이보다 34년전인 1865년 김현영(베드로)이 문경 지역 교우들과 왕래하다 하느님을 알게 돼 입교를 준비했으나, 병인박해(1866-1873)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박해가 끝난 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후손에게 입교를 권면, 1899년 김운배(호노리오), 김종록(클레멘스), 최면집(마르티노)이 당시 가실 본당(현 대구대교구 낙산 본당의 전신)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퇴강리에 신앙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후 집성촌인 마을 특성상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복음은 친지와 가족들에게 급속히 전파돼 1903년 마을 이름을 딴 '물미(퇴강) 공소'가 탄생하고, 1922년에는 교세가 확장돼 경북 북부지역을 관할하는 본당으로 승격된다. 1935년 본당 교세 자료에 따르면, 본당과 관할 공소 신자를 모두 합해 1330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 당시 대첨례(대축일) 때는 교우들이 먹을 쌀을 머리에 이고 낙동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라요."

 

그야말로 경북 지역 복음화의 산실로 발전한 본당이었지만 한국전쟁에 이어 경제개발과 산업화로 이농현상이 심각해져 결국 1968년 안동교구 함창본당 관할 공소로 예속돼 오늘에 이른다. 하지만 퇴강 공소는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지형적 특성처럼 오는 7월 다시 준본당으로 승격될 예정이다. 교구가 농촌사목 활성화를 위해 현재 80여명의 신자가 모여사는 퇴강을 비롯해 상주시 사벌면에 있는 8개 공소를 묶어 본당으로 승격시키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는 올해로 공소 설정 100돌을 맞는 퇴강 교우들이 꾸준히 신앙 명맥을 이어온 보이지 않는 노력의 결과다. 지난 100년간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를 배출한 이력이 이를 반증한다. 고 김영옥(대구대교구) 신부를 비롯해 공소 출신 성직자가 11명이고 이들의 친인척을 포함하면 50명에 이른다. 또 이곳 출신 수도자도 15명이나 돼 '집안에 성직자 수도자가 없으면 퇴강 사람이 아니다'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옛 공소가 있던 자리는 풀밭으로 변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지금의 고딕식 공소 건물은 1956년에 지은 것이다. 외형은 명동대성당이나 대구 주교좌 계산동성당의 축소판이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중앙 정문 바로 앞에는 가슴에 양손을 모으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는 성모승천상이 있다. 원래는 성전을 지어 봉헌할 때 성당 안 제대 뒷벽에 성모승천상을 안치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성모상이 부식돼 못쓰게 되자 그 모습을 크게 새로 만들어 문 앞에 모셔 놓은 것이다.

 

성모승천상 뒤에 우뚝 선 퇴강공소를 바라보니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오르는 성모님처럼 공소에서 다시 한번 본당으로 거듭남으로써 경북지역 복음화의 중심이 되는 미래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평화신문, 제728호(2003년 6월 15일), 박주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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