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할머니와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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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11-14 ㅣ No.5535

 

나는 안경점에서 일을 합니다.

내가 일하는 안경점 앞 길모퉁이엔 좌판에 생선을 늘어놓고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던 그날도 할머닌 찬바람 부는 거리에서 온종일 생선좌판을 지켰습니다.

그날 저녁 무렵 할머니가 안경점 문을 밀고 들어섰습니다.

"어서오... 어?"

순간, 안경점 안은 생선 비린내로 가득 찼고 나는 나도 모르게 코를 싸쥐었습니다.

"할머니, 저흰.. 생선 필요 없는데..."

"아가씨, 나 생선 사라고 안 할 테니까 영감 돋보기 하나 줘."

지레짐작으로 할머니를 빨리 내보내려고만 했던 나는 그만 머쓱해졌습니다.

내 행동이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른 할아버지의 연세를 물어보고 돋보기를 내드렸습니다.

꽁꽁 얼어 갈라지고 터진 손으로 안경을 받아든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 순박한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나는 소파에 앉아서 편히 쉬시라고 권해 드리면서, 따뜻하게 데운 피로 회복제 한 병을 드렸습니다.

언 손이라도 녹이고 가시라고 난로 심지를 있는 대로 돋군 뒤, 돋보기를 깨끗이 닦아 예쁜 상자에 넣어 포장을 했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꾸벅꾸벅 졸던 할머니가 소파 모서리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고 나는 할머니의 그 곤한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이구, 이런! 내가 깜빡 졸았구먼."

잠이 깬 할머니가 허리춤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며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래, 이 돋보기 값이 얼마유?"

"할머니, 아까 돈 내셨잖아요."

"어어! 내가 은제?"

할머니는 자꾸만 그럴 리 없다고 가진 돈을 세고 또 셌지만, 나는 돋보기 값 몇천 원을 벌기 위해 점심도 거르고 생선을 팔았을 할머니한테 차마 그 돈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 간혀서 먹을 만할껴."

할머니는 마치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연신 ’고맙수, 고맙수’ 하시며 팔다 남은 간고등어 한 손을 내미셨습니다.

내가 괜찮다고 자꾸 밀어놓는데도, 부득부득 고등어를 주시고는 안경점을 나섰습니다.

유리창으로 내다보니, 돋보기를 품고 집으로 가는 할머니의 걸음이 한결 빨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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