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사순 제2주일] 변모 (마르 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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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2-25 ㅣ No.87

 

[사순 제2주일] 변모 (마르 9,2-10)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이를 실행하려 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복을 내리겠다고 맹세하신다.(창세 22,1-2.9ㄱ.10-13.15-18)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냐고 한다.( 로마 8,31ㄴ-34)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오르셨는데,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신다.(마르 9,2-10)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사순 제2주일 제1독서(창세22,1~2.9ㄱ.10~13.15~18)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2)

 

부르심에는 구원에 대한 부르심이 있고, 포기에 대한 부르심이 있다. 믿음의 처음 단계는 얻는 것, 무엇인가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완성 단계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사악은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하는 주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은 들었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75세에부터 십년 동안 믿었다(창세16,3). 그런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움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는데, 아이가 없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라이의 몸종 하가르를 얻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기까지 흔들렸다(창세16,1~5). 자신의 몸이 노인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생겼다. 아브라함 100세, 사라 90세에 임신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은 지켜지고, 하느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이 늙고 환경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아브라함은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흔들렸지만, 이사악이 세상에 태어난 사건을 통해 인간의 방법, 지식, 이성, 환경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아이와 행복하게 살다가 아이가 성인(16~17세 정도로 추정)이 된 어느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이를 내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때 아브라함은 자신감이 생겼다.  '이사악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믿음이 있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고,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런 믿음이 생겼다. 이사악을 번제로 죽이라고 했을지라도,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다(히브11,19). 

하느님께서 어떤 모양으로 이사악을 다시 살려 주실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이사악은 다시 산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순종을 결심한다. 

'죽어도 살고, 망해도 이긴다'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생긴 것이다. 그러기에 '약속의 자녀로 칭함받은'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러 모리야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인가?  이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불리우게 되는 이유이다. 

이제 본문의 중요한 부분을 주해한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 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22,2)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이란 표현을 통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부성애를 깊숙히 자극하신다. 

'네 독자'(너의 외아들)로 번역된 '에히드카'(yehidka)의 원형 '야히드' (yahid)'독자', '유일한 것', '내 귀중한 생명', '사랑하는' <'아가페토스'(agapetos); 70인역 그리스말 번역 성경; 친밀성강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아하브'(ahab)는 단순히 좋아하다는 뜻 이상으로 '바라다', '갈구하다'(시편40,17), '좋아하다'(이사56,10)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표현속에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극한 부성애와 아들로 인해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더할 나위없는 즐거움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누구보다도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던 것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 오직 당신 만이 아브라함의 가장 큰 소망, 가장 큰 기쁨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모리야''선택', '지정'이란 뜻의 '마르에'(mare)'야훼'의 축약형인 '야'(ya)가 결합되어 '주님께서 친히 선별해 주셨다' 뜻이다.

 

'그를 ~ 번제물로 바쳐라'(sacrifice him ~ as a burnt offering) 

 

하느님께서는 번제의 통상적인 제물이나 정결한 짐승이나 새(창세8,20) 대신에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아들 이사악을 온전히 태워 번제로 드릴 것을 요구하셨다.  

'번제'를 뜻하는 '올라'(ola)'올라간다'는 뜻을 지닌 '알라'(ala)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희생물을 태운 연기를 하늘로 올라가게 해서 하느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제사의 한 방법이다(창세8,20).

따라서 본문의 하느님의 요구는 단순히 영적인 복종을 나타내는 명령이 아니라, 실제로 이사악의 배를 가르고 피를 흘려 태워서 바치라는 인간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 명령인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를 지금 아브라함에게 하셨다. 

자기 자신을 부정(부인)하는 온전한 순명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온전한 헌신, 즉 절대 신앙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다(마태16,24).

 

'아침에 일찍 일어나'<와야쉬켐~빱보케르; wayashikem(일어나)~baboker(아침에 일찍)> 

당시 믿음의 족장들이 하느님과 친교(교제)를 나누고 난 뒷날에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 하나의 경건한 관습이었다(창세19,27; 20,8). 여기서 '아침'(boker)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를 포함하고 있는 전치사 '빠'(ba)어떤 특정한 날의 다음 날 아침 지칭한다. 하느님의 명령이 있은 바로 뒷 날, 그것도 이른 시간에 일어나 순종의 채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결국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순종' 강조되고 있다.  잠시 인간적인 번뇌에 빠지기도 했겠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기대와 요구에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키기 위해서 오히려 아침 일찍 일어나 신속히 순종의 발걸음을 옮겨 놓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10)

여기서 '칼'에 해당하는 '마아칼레트'(maakalet)사람을 살상하거나  (창세34,25~26), 몸을 쪼개는데 사용되었던 날카로운 도구였다(판관19,29).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불'에 해당하는 '에쉬'(esh) 더불어 '칼'을  준비했던 것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獨子 이사악을 죽여 심장을 빼고, 목과 손과 발을 자르고, 각 부분의 각을 떠서 번제단 위에 놓고, 불을 붙여 바치는 번제의 과정을 조금도 차질없이 마치기 위한 준비였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을 속행하기 위해 도구를 준비한 아브라함은 결연한 의지와 굳건한 신앙으로 외아들을 죽이려 하기까지 순종한다.

 

우리는 이사악의 모습에서 인류구원을 위한 제물이 되시고 제관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외아들 이사악을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아담으로부터 인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과거에도 짓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을 죄로 말미암아 상처입은 성부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죄없으신 당신 아들 예수님이 기워 갚아야 하기에, 그것을 침묵중에 고통중에 바라 보아야 하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몸소 인류 구원을 위한 제물과 제관, 제단이 되신 당신의 죄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침묵중에, 죽음보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스런 고통을 지켜보고 아파해야 했던 당신의 마음을 알아듣게 하고 체험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토록 크나큰 고통의 시험, 믿음과 순종의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천주 성자 예수님의 고통과 성심만을 묵상하지, 그 이면에 그것을 침묵과 사랑과 고통으로 바라보시고 외아들 예수님안에서 고통당하시는 성부 하느님을 묵상하지 않는데,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포기의 부르심, 준 것을 도로 빼앗는 두 번째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을 때, 창세기 12장 1~4절의 첫번째 축복의 말씀이 창세기 22장 17~18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재천명되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17~18)    아멘.

 

 

 사순 제2주일 복음(마르9,2-10)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아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2-4)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13절까지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마르9,2-8)과 그것과 관련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눈 사건(마르9,9-13)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앞의 마르코 복음 8장 2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을 성부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신 사건임과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보여 주는 의미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 복음 8장 31절에 나오는 첫번째 수난 예고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힘이 없어 받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이며, 단순히 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예표하는 의미도 지닌다.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뜻을 갖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르8,29)과 첫번째 수난 예고(마르8,31) 이후에 있는 거룩한 변모 사건예수님 생애의 중대한 전환적 의미를 지니기에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이 사건을 다 기록하고 있다 (마태17,1-8; 루카9,28-36).

 

마르코 복음 9장 3절에서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내재하고 있던 충만한 신성(코로2,9)의 표출로 말미암아 주님의 옷은 광채로 빛나며 새하얗게 되었다.

여기에서 '빛났다'로 번역된 '스틸본타(stilbonta; shining; dazzling)여러 차례 문지른 금속 따위가 번쩍이며 빛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 '스틸보'(stilbo)의 현재 분사형이다. 

변모산에서 주님의 옷은 마치 금속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새하얗게'로 번역된 '류카'(leuka; white)의 원형 '류코스'(leukos) 역시 '빛나는', '찬란한'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신약 성경에서 마태오 복음 5장 36절요한 복음 4장 35절제외하고는 모두가 천상적 존재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하면서도 흰 색깔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도 천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사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의 기사에서는 마태오 복음(17,2;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과 루카 복음(9,29;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의 기록에 있는 기사는 빠져 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주님의 얼굴도 찬란하게 빛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9장 4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데, 원문에는 마르코 복음 9장 3절과 4절이 등위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나타나'로 번역된 '오프테'(ophthe; there appeared)는 '보다'는 뜻을 지닌 원형 '호라오'(horao)의 직설법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 부정과거 수동태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성령님, 또는 천상적 존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 보인 것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구약의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엘리야'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엘리야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로서(2열왕2,11) 유대인들이 다시 올 것을 대망했던 예언자이며(마르9,1), 모세비록 죽었지만(36,5) 유대인들은 하늘로 산 채로 올라갔다고 믿고 있던 인물이다. 

이들은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므로, 이들이 예수님께 나타나 그와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 성경을 결코 부정하거나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며,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이며, 율법과 예언서의 약속의 말씀과 예언들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마태5,17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분의 모습이 변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모시고 살겠다고 제안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제안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어서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변명도 해줍니다. 복음서는 이 이야기로써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사실(史實)만을 알려주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신앙인들이 그분에 대해 가졌던 믿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문서입니다. 그 문서는 우리도 그것을 읽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오늘의 복음이 언급하는 높은 산,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것, 옷이 빛나고 흰 것,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 등은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말할 때, 이미 사용한 표상(表象)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구약성서의 이런 표현들을 가져와 이야기를 꾸민 것은 예수님 안에 제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닮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켰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아서 이스라엘 신앙의 시조(始祖)가 된 분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만으로써 설명이 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닮은 분이지만,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보태어 고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깨닫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하느님이 세상의 권력자인 왕 파라오와 함께 계시지 않고, 천대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도하여, 이집트에서 대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그 거사(擧事)의 성공은 하느님이 과연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주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이런 해방과 구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사람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분”(탈출 33,19)으로 체험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행하신 일들이 과거 모세가 깨달은 하느님,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며,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고, 죄책감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그들이 자유롭게 또 보람 있게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도 실천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하느님에 대한 말이 왜곡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인물입니다.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원초의 체험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왕과 사제들은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치부하고, 대우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의 횡포에 맞서서 그들을 비판하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선포한 사람들이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과거 예언자들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시대 기득권자인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절대적인 것으로 강조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은폐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심판하실 무서운 하느님을 말하면서, 그들도 남을 심판하는 높은 신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그들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율법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자각하고,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성전이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그것들은 하느님을 알리지 못하고 사람에게 짐스런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체험하고 가르친 하느님을 깊이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과거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는 데에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고, 그분의 일, 곧 하느님 나라의 일을 실천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그분의 일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자기 자신을 더 내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군림하려 하지 않고, 섬기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실제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자유 안에 하느님을 살아 계시게 하는 운동입니다. 나 한 사람 잘되기 위해 쓰라는 나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이 지닌 자유입니다. 인간에게 그런 자유는 이기적인 아집(我執)이라 일컬어집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혼탁하게 하는 것은 자기 한 사람, 혹은 자기가 속하는 집단을 위한 아집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득권자들의 오만방자한 횡포가 사회에도,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 읽어낸 자유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기적 아집을 벗어나,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

 

 

 

우리 신앙인들의 최종 목표는 죽음을 이기고 예수님처럼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빛과도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0).
주님께서는 오늘 제1독서를 통해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삶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시지요. 어떻게 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칠 수가 있습니까? 엄청난 고뇌 끝에 아브라함이 실행에 옮기려 하자, 천사가 만류하며 복을 내릴 것을 약속합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더욱 성숙한 신앙을 갖도록 독려하시고자 끊임없이 시련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런 시련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감으로써 주님과 점점 일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고뇌 끝에 산에 오르십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자 그 모습이 눈부시게 빛나시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지요. 엘리야와 모세는 과거 산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이들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극복하시고 장차 부활하신다는 표징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떠한 시련이 닥쳐도 끝까지 주님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라도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살려 주실 것이 아닙니까?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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