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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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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30 ㅣ No.157

신경해설 (1) 저는 믿나이다
 
문화홍보실


신경이란

신경(信經, 라틴어 Credo)은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교회가 바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맨 처음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적에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또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과 같은 짧고 단순한 신앙고백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들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부터 주님의 가르침 전체를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담고 있는 신앙고백의 형태가 생겨났습니다.

왜 긴 신경을 바치나요

지금 쓰이는 신경으로는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있는데, 이 중 사도신경이 더 짧고 보다 오래 된 신경이고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니케아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381년)를 통해 보다 정밀하고 풍부하게 표현된 신앙고백문입니다. 『미사경본 총지침』에 보면, 본래 미사 전례 때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치도록 되어 있고 때때로 사도신경도 바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가 전례에 채택한 공식 신앙고백문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모든 이가 언제나 변함없는 신앙을 더욱 잘 이해하고 미래의 세대에게 전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도록 … 수도회와 본당 공동체, 그리고 모든 교회 단체는 이 신앙의 해에 공적으로 신앙 고백(Credo)을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자의교서 『믿음의 문』 8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로부터 전해 받은 나의 신앙을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믿음의 정수를 아름답고도 틀림없이 담고 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자주 바쳐서 입과 머리와 마음에 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신경은 일치의 표지이자 감사와 찬미의 기도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이 믿음을 일으키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이 그것을 드러내어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또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것이 됩니다. 신경을 바칠 때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예물을 드리는 것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말씀의 전례 중에 바치는 신경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이 믿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서로 목소리를 합쳐서 “같은 믿음”(티토 1,4)의 고백을 주님께 드리는 것은 참 아름답고 뜻 깊은 일입니다. [2013년 1월 20일 연중 제2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2)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도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아마도 우주 만물을 주재하는 어떤 존재가 있지 않겠느냐, 불안한 인생살이에 어딘가 의지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에는 더 깊은 뜻으로 그렇게 합니다.

전능하시다는 말은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고 못 하실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얼른 듣기에 아주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사실은 아주 심오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전능하신”에 이어지는 말마디는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도 그렇게 하지만 신경을 바칠 때에도 그렇게 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서라면 못 하실 일이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사람도 제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을 바라고 평생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부모님이 많습니다. 자식이 혹시 못나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 부모의 가슴이 찢어집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아무리 속을 태워도 부모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인간 부모의 자식 사랑을 멀리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라면 참으로 무엇이든 하십니다. 우리가 위험에 빠지면 물속에도 뛰어들고, 불길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보여 주시려고 몸소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고, 죽을죄를 지은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셔서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저주하는 극악무도한 인간이라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용서하십니다. 하느님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신경의 맨 첫머리에서 우리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 우리를 위해서라면 못하실 일이 없으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돈이나 지위가 능력인 줄 착각하지만, 불가능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기는 가장 큰 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무한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013년 3월 3일 사순 제3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3) 천지의 창조주
 

세상 사물은 있다가 없다가 하는 무상한 것입니다. 산이나 바다도 수십억 년 전에는 없었고, 장차 또 사라질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히 계시고, 스스로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있다 없다 하는 무상한 이 모든 것들을 존재하도록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재료나 도구가 필요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뜻과 말씀만으로, 아무 것도 없는 데서부터 만물을 지으십니다. 눈에 보이는 물체들뿐 아니라 형체가 없는 시간이나 공간, 우주의 모든 법칙, 사람의 영혼이나 천사들도 하느님께서 지으시고 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시는 아버지

세상을 살다 보면 큰 은혜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는 물론이고,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고민할 때, 또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때 곁에 있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런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고, “그 때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살아있기나 하겠는가?” 하고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 덕분에 제가 있게 되었고 또 오늘 이렇게 살아있으니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나를 귀여워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만물을 지으셨다는 말은 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고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12.18.21.25)고, 특히 사람을 지으신 후에는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고 말합니다. 착하신 하느님께서는 나쁜 것, 못 쓸 것을 하나도 만들지 않으십니다. 심보가 고약한 우리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좋은 것들을 나쁜 목적에 쓰거나 망치거나 하는 것이지요. 하찮은 모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원하시기에 생겨났습니다. 그러니 모기보다 훨씬 귀한 이 ‘나’라는 존재는 어쩌다 보니 우연히 생겨나 세상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좋은 뜻에 따라 생겨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찌 생각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지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나를 좋게 보시고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나를 만드셨겠습니까?

“천지의 창조주”라는 말은, 나를 사랑하셔서 세상에 나게 하시고 좋은 것들을 두루 갖추어 주신 아버지, 그 은혜로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아버지, 나를 귀엽게 여기시고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보아 주시는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2013년 4월 14일 부활 제3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4) 하느님의 외아들
 

아버지와 같으신 분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께 대해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해 …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 10,30),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당신 전체를 내어주시는데, 그렇게 해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와 완전히 꼭 같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버지와 같으신 분,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분이라고 해서 ‘아들’이라 부릅니다.

삼위일체

한 분 하느님께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위가 계신다고 하는 이 도리를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로 다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가 알아듣지도 못할 진리를 하느님께서 굳이 가르쳐주시는 까닭은, 우리가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게 되면 이 삼위일체의 완전한 일치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형제가 되고 한 몸이 되면 우리도 아버지의 아들, 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요한 20,17)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비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람이 머리로는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실천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사람도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 목숨을 벗을 위해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모두 내어주는 사랑이 바로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이고, 영원한 생명의 비밀입니다.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것이 바로 주님의 계명인데,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로마 5,7)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 아드님을 희생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찬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주신 사랑!” [2013년 5월 5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5)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예수님을 공경하여 부를 때 쓰는 호칭 가운데 가장 자주 쓰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신경에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세 단어는 신앙 고백의 표현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또 중심이 되는 말마디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시고, 저의 주님이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느님

‘예수’라는 이름이 주님의 본 이름입니다. 천사가 요셉 성인에게 일러 준 이 이름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또는 “구원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하고 말했습니다. 이 이름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왕, 사제, 스승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주님께 드리는 존칭이며, 그리스말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같은 뜻을 지닌 히브리말이 ‘메시아’입니다. 본래의 말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인데,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늘의 명을 받아 도탄에 빠진 세상을 건져낼 위대한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왕에게, 제사장에게, 또 예언자에게 기름을 발라 그 사람의 직책을 표시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류의 임금이시고 대사제이시며 스승으로서 세상을 하느님과 다시 화해시키시고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며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분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주님이신 예수님

예수님 당시에는 종이 주인을 부를 때, 신하가 임금을 부를 때 ‘주님’이라 불렀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도 ‘주님’이었습니다. 주인님이라는 말인데, 내 목숨을 마음대로 할 권리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세상의 이런저런 주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온 우주의 주인이신데, 하인에 불과한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세상의 높은 사람들에게는 그 권력 때문에 복종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은 그분의 큰 사랑에 감복한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마치 우리가 주인이고 예수님께서 우리 하인이신 것처럼 굴 때가 있지 않습니까? [2013년 5월 26일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6)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때,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아지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참 하느님이시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聖母)님이라 부릅니다.

종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

사람이 저지른 죄는 사람이 갚아야 하지만 사람의 능력으로는 하느님을 배반한 죗값을 도저히 치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몸소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 저질러 놓은 죄를 대신 갚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아드님께서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시어 여느 사람처럼 인생의 우여곡절을 탄생에서 죽음까지 다 겪으시며 인류의 죄를 몽땅 짊어지셨습니다.

원죄의 사슬을 끊으시는 주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한 탓에 본래의 순진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서로 부끄러워하고 허물을 떠넘기는 사이가 되어, 자녀를 낳는 일에 정욕이 끼어들고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장 참조). 우리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죄에 물드실 수가 없으므로, 남자의 정욕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낳으시기 전이나 그 후에나 평생 동정이시며, 예수님의 구원 공로를 미리 입어 원죄를 물려받지 않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달리 “원죄 없는 잉태”라고 부르며 공경합니다.

새로운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우리에게도 어머니가 되시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범이 되시는 어머니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태중에 모셨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 마음에 새기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주님의 수난과 영광을 함께 하신 성모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며 부활의 영광을 기다립니다. [2013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7)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세상에는 많은 고통과 불행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서로 고통을 주고받는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계신다면 어째서 불행을 멈추지 않으시는 것인지, 어째서 죄 많은 사람이 편하게 잘 살고 착한 사람이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를 따져 묻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죄를 없애시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호세 11,8)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선행을 행복으로 갚으시고 죄악을 벌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거역한 죄는 무엇으로 값을 치러야 합니까? 자기에게 목숨을 주신 분을 배반한 죗값은 죽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식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지은 죄 탓에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인간 부모도 자식이 아파서 울면 애가 타고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고 바라는데, 죄인들의 죽음을 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에제 33,11)

우리 사람들은 악인을 미워하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는 원한을 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아주 몹쓸 짓을 저지른 사람이 등장하면 죽어 마땅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는 그 극악한 죄인도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착하시기 때문에 죄를 싫어하시고, 죄 때문에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을 슬퍼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당신이 우리가 자초한 벌을 대신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내 아들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2사무 19,1)

죄인은 남을 위해 희생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가 벌을 받는다면 자기 죄 탓입니다. 하지만 착한 사람은 죄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고, 그 희생은 큰 가치를 지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사람이 되게 하시어 인류가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습니다. 사도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하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착하신 분이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느님께서는 자격 없는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 덕에 무죄하게 되었으니, 죄인들을 위해 대신 희생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2013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8)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 마땅한 벌을 대신 받아 돌아가셨다고 하여도, 단지 그뿐이었다면 그 죽음이 우리 사람에게 참된 희망의 근원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죄에 대한 벌은 이루어졌지만 의인의 희생이 받을 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부활 : 실제로 일어난 사건

빈 무덤과 제자들의 혼란이 증언하듯,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실제 사건입니다. 누가 이것을 조작하려 하였다면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좀 더 그럴듯하게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없는 까닭은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사도들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부활은 신앙의 은총을 입지 않으면 증언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 :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결정적 증거

예수님의 부활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수명을 다하면 죽어야 하는 이전의 육체적 생명을 다시 얻은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적인 생명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그분의 육신도 우리의 썩어 없어질 육신과는 달리 물리적인 한계를 갖지 않는 육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즉 하느님으로서의 권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수난 전에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8)

부활 : 예수님과 함께 죽는 모든 이의 희망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그 말씀과 행적이 진리임을 드러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지만, 또한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 참으로 인간답게 바로 사는 것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결국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어하는 이웃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것이야말로 참 생명의 길입니다. 자기만 잘 살겠다고 남을 모른 체하거나 해를 입히는 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은 지상에서부터 이미 영원한 생명의 맛을 느끼고,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마침내 그분 안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2013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9) 하늘에 올라
 
 
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고 성령을 약속하신 후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이것을 승천(昇天)이라 하는데, 우리 곁을 아주 떠나신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벗어나신 것입니다. 또한 장차 우리가 부활하여 하늘나라에서 입을 영광을 미리 드러내어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하늘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늘,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하늘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비행기나 우주선을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장소에 계셔야 했고 시간의 변화를 겪으셔야 했지만, 부활하신 후에는 문이 닫혀 있는데도 들어오시고, 한 번에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시었습니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본래 누리시던 하늘나라의 영광에 다시 들어가셨다는 말입니다.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다

신경의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의 영광을 다시 입으신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또한 예수님께서 천상천하의 모든 권능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것을 뜻합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어느 곳에서든, 어느 시대에든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승천하셨습니다. 지상에 계실 때에는 모든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실 수 없었지만, 하늘나라에 계신 지금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경 말씀을 들을 때, 기도할 때, 거룩한 성사와 전례에 참례할 때 우리와 함께 계시고, 특별히 성체 안에 현존하십니다. 또 우리가 가난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보살필 때 함께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 하십니다.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 뽑으시고 우리와 함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우리를 앞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도들을 이렇게 나무랐습니다. :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2013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10)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
 
 
다른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유한합니다. 끝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님이시므로 시대와 역사의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이미 승리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 아직 시간 속을 여행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 “마지막 때”(1요한 2,18)에, 만물이 그분께 굴복할 때까지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이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그 때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성령과 교회는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외칩니다.(묵시 22,20)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제자들에게 상을 주러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고 잘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기가 종말의 시간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마태 24,4-5)

모든 나라와 민족이 주님 앞에 모여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에는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직 자비를 베푸셨지만, 주님의 이 자비를 받지 않겠노라고 거절하는 사람은 스스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모든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살아있는 이들과 함께 주님 대전에 서게 되고 그들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였는지 거부하였는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의로운 사람들의 선행도 모두 밝혀지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는 기준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판가름하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이 새로운 우주에는 슬픔과 눈물이 없을 것이고,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영원히 패망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진짜 성전이신 주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2013년 10월 20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11)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
 
 
신경은 사도신경이든 보다 긴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든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 위격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분은 성부 하느님에 대하여, 두 번째 부분은 성자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성령께 대하여 믿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이신 성령

성령께서는 성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오직 하느님께만 쓸 수 있는 말이므로 성령을 주님이라 부름으로써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라는 말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동등하고 완전히 같으신 한 분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살리시는 성령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시고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태초에 혼돈 위를 휘도시었고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시며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에게 임하시어 천상 생명을 전하셨습니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성령께서 주신 초자연적인 생명,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삽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하신 말씀은 이 뜻입니다. 또 성령께서는 신자의 삶에 생기와 열정을 불어넣으시어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게 하십니다.

인도하시는 성령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주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알아듣고 기억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들으신 대로만 말씀하셨듯이 성령께서도 오직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되새기게 해 주시는데, 그 안에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은 곧 하느님이시므로, 하느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몽땅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모두 바치는 사랑,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이야말로 모든 능력의 총화이며 영원한 생명의 비밀입니다. [2013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주일) 대구주보 4면]
 

신경해설 (12)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직접 수립하신 것이므로 일반 세상의 단체와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를 신경은 네 가지로 나누어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파가 많이 있지만,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에 대한 이 네 가지 믿음을 다 지키고 있는 교회는 오직 가톨릭교회뿐입니다.

하나인 교회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몸에 합하여진 모든 세례 받은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나누어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한 분이시므로 이 몸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안에 여러 분파가 있는 것은 사람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분열된 결과이고, 실제로는 한 성령으로 같은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오직 하나의 참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거룩한 교회

교회는 하느님께서 직접 세우셨고 그 안에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므로 거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서 이 교회의 주인이시지만 또한 사람으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와 함께 이 교회에 속하십니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신자들이 모두 무죄하고 성덕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멤버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교회에 속한 이들이 악행을 저지르거나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는 한 교회는 여전히 거룩합니다.

보편된 교회

옛날에는 “공번된 교회”라는 표현을 썼는데, 같은 뜻입니다. 이 보편되다(희랍어로 katholikos)는 말에서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나왔으며, 초대 교부들 때부터 이 이름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일컬었습니다. 교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도구이므로 가입 조건에 제한이 없으며, 남녀노소 누구든지 인종과 출신을 불문하고 예수님의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우리 교구의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님께서는 전 교구장이셨던 고(故) 최영수 대주교님께 주교품을 받으셨고, 최 대주교님은 그 전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님께 주교품을 받으셨습니다. 이 주교품의 족보를 죽 따라 올라가면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 중 한 분에게 이릅니다. 세상 모든 주교님들은 그래서 한 분도 예외 없이 사도들의 후계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직접 명령 없이는 아무 사람도 목자의 직무를 스스로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3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대구주보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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